임산부석 앉으려다 임산부 폭행한 노인 입건
"임산부석 애초에 비워놔야 한다"
"비어있는 자리 앉는 게 무슨 잘못이라고 눈치주나"
17일 오후 서울지하철 2호선 임산부석에 한 노년 남성이 앉아있다. 사진은 기사 특정 표현과 무관함.사진=김슬기 인턴기자 sabiduriakim@asiae.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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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 기자, 김연주 인턴기자] 지하철 임산부 배려석에 앉겠다며 임산부에게 완력을 행사한 70대 남성이 경찰에 붙잡힌 가운데 애초에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면, 임산부 배려석의 효율성을 내세우며 배려가 강제성을 띤다는 의견도 있다.
경찰에 따르면 지난 16일 오전 9시15분께 한 70대 노인은 서울 지하철 2호선 외선순환선 열차에서 임산부석에 앉으려던 임산부의 어깨를 3회 정도 밀쳤다. 주변 승객들이 남성을 제지하면서 추가적인 피해는 없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를 두고 시민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임산부 배려석인 만큼, 양보를 해야 했다는 의견과 말 그대로 배려인 만큼, 규정이 없어 배려하지 않아도 된다는 주장이 있다.
지난 2018년 딸을 출산한 정 모(33)씨는 "임신했을 당시 임산부가 벼슬이냐는 인식과 간혹 임산부와 일반 시민들이 겪는 마찰을 전해 들으면서 몸이 좀 힘들어도 양보를 바라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며 "임신 초기 때는 물론, 만삭일 때도 임산부석 자리가 비어있는 게 아니면 비켜달라고 말하기가 껄끄러웠다"고 말했다.
정 씨는 "임산부 배지를 가방에 달고 있어도 다들 스마트폰을 보고 있어 관심이 없다"며 "애초에 자리를 비워두는 게 좋겠다는 입장이지만 임신 경험이 있어 불편을 느껴본 사람이 아니라면 크게 공감하지 않을 것 같다"고 탄식했다.
직장인 김 모(27)씨는 "애초에 임산부석을 따로 빼놓은 것도 노인들이 노약자석을 '노인석'으로 생각하고 앉지 못하게 하거나, 앉아있던 임산부들에게 언어적·물리적 폭행을 벌여서 아닌가"라면서 "티가 나지 않는 초기 임산부도 편하게 앉을 수 있도록 고작 그 몇 자리 비워놓는 게 그렇게 힘드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김 씨는 "이런 사건이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발생하는데 처벌 수위는 여전히 낮다. 임산부석 하나 비워놓는 것도 싫어하면서 애를 많이 낳으라고 하는 것은 모순"이라며 "임산부석을 비워놓는 건 물론이고 폭행 사건이 발생할 경우 가해자 처벌 수위를 강화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지하철 임산부석에 붙은 안내 문구.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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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산부 배려석은 지난 2013년 지하철을 이용하는 임산부의 편의를 위해 도입됐다. 그러나 이를 두고 "역차별 아니냐", "배려가 권리냐" 등 의견으로 논란이 됐다.
임산부 배려석과 관련한 민원도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서울교통공사에 따르면 지난 2015년 13건에서 2018년 2만7555건으로 늘어났다. 하루 평균 75건이 넘는 셈이다.
평소 지하철을 이용해 출퇴근한다는 직장인 김 모(28)씨는 "출퇴근 시간처럼 붐비는 시간대에도 임산부석에 앉아 있는 어르신들을 많이 봤다. 심지어 그 앞에 임산부 배지를 달고 있는데도 눈 하나 깜빡 안 하고 앉아계시더라"며 "주위에서 임산부가 앞에 있으니 자리를 비워달라고 이야기를 해도 보통 나이가 있으신 분들은 잘 듣지 않으시더라"고 말했다.
이어 "'애 가진 게 유세냐'고 길길이 날뛰시는 분도 봤다"며 "보통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악의를 품기 힘든데 임산부석과 관련해서는 임산부에게 악의를 품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덧붙였다.
사진=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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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1∼8호선 이용 시민 6179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비임산부 응답자의 39%가 임산부 배려석에 앉아 본 경험했다. 자리에 앉은 이유는 '자리가 비어 있기 때문'(54.64%)이라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게 나타났다.
주부 박 모(58)씨는 "임산부 배려석도 자리인데 임산부가 없는데도 굳이 비워두는 건 비효율적인 거 같다"며 "자리에 앉아있다가 임산부가 보이면 비켜주면 될 것 아니냐"고 말했다.
박 씨는 "임산부 배려석이 아니라도 앉아있다가 임산부에게 양보하는데, 굳이 배려석을 만들어 눈치를 보게 하는 것도 이상하다. 배려를 강요하는 느낌이지 않냐"며 "자리에 앉으면 개념이 없는 사람 취급하는 분위기도 이해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는 임산부 배려석에 대한 제대로 된 지침이 없다는 점을 지적하면서도 상황에 따라 취약계층이 자리를 이용할 수 있는 유연한 제도가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무조건 임산부 배려석을 비워둬야 한다는 지침이 명확하게 공지된 게 아니다 보니 임산부 배려석을 두고 갈등이 빚어지는 것으로 보인다"며 "임산부가 아니면 모두가 이용할 수 없도록 하는 것보다 상황에 따라 다른 불편한 사람도 앉을 수 있게끔 하는 등 유연한 제도가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김연주 인턴기자 yeonju185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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