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여민관에서 열린 수석.보좌관회의에 모두발언을 하고 있다. 청와대 사진기자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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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위안부 운동의 대의는 굳건히 지켜져야 한다. 대의는 할머니들의 증언으로부터 시작됐고, 민간의 자발적 참여와 연대가 더해진 것이다. 시민단체의 행태는 되돌아봐야 하지만, 운동 자체를 부정해선 안 된다.’
문재인 대통령이 8일 청와대 수석ㆍ보좌관 회의를 주재하면서 최근 '윤미향 사태'와 관련된 입장을 밝혔다. 방식은 윤미향 더불어민주당 의원과 정의기억연대(정의연·한국정신대대책협의회 후신)을 직접 언급하지 않고 '위안부 운동'이라는 포괄적 명분을 고리로 한 접근이었다. 지난달 7일 이용수 할머니의 폭로 이후 문 대통령의 직접적 발언은 처음이다.
이날 오후 2시부터 5분 남짓 문 대통령이 읽어내린 1890여자의 논리 구조는 ‘지켜야 할 대의-할머니의 증언-자발적 연대-운동의 정당성’이었다.
우선 문 대통령은 “위안부 운동을 둘러싼 논란이 매우 혼란스럽다. 말씀드리기도 조심스럽다”라면서도 “인류 보편의 가치를 실현하려는 (위안부 운동의) 숭고한 뜻이 훼손돼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또한 “위안부 운동의 대의는 굳건히 지켜져야 한다”며 “위안부 운동 30년 역사는 인간의 존엄을 지키고 여성 인권과 평화를 향한 발걸음이었다”고 말했다. 인류 보편, 존엄, 여성 인권, 평화 등으로 위안부 운동의 가치를 재확인했다.
그러면서 문 대통령은 “김학순 할머니의 역사적 증언에서부터 위안부 운동은 시작됐다”며 위안부 할머니들을 ‘운동의 출발점’으로 못 박았다.
특히 문 대통령은 “이용수 할머니는 위안부 운동의 역사”라며 “위안부 문제를 세계적 문제로 만드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셨다”고 강조했다. “미국 하원에서 최초로 위안부 문제를 생생하게 증언함으로써 일본 정부의 사과와 역사적 책임을 담은 위안부 결의안 채택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프랑스 의회에서도 최초로 증언했고, 연세 90의 노구를 이끌고 위안부 기록물의 유네스코 등재를 촉구하는 활동도 벌였다”며 이용수 할머니가 이뤄낸 성과를 일일이 언급했다.
강성 친문 지지층이 이 할머니를 ‘토착왜구’에 빗대 비난하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이 이 할머니를 적극적으로 감싼 것이다. 문 대통령은 “위안부 할머니가 없는 위안부 운동을 생각할 수 없다”, “위안부 운동을 이끌어오신 것만으로도 누구의 인정도 필요 없이 스스로 존엄하다” 같은 말도 했다.
문 대통령은 위안부 운동의 정당성을 거듭 강조했다. “30년간 줄기차게 피해자와 활동가들, 시민들이 함께 연대하고 힘을 모은 결과 위안부 운동은 세계사적 인권 운동으로 자리매김했다. 결코 부정하거나 폄훼할 수 없는 역사”라고 했고 또 “일각에서 위안부 운동 자체를 부정하고 운동의 대의를 손상시키려는 시도는 옳지 않다. 위안부 운동은 지금도 현재 진행형으로, ‘비 온 뒤에 땅이 굳어진다’는 말이 있듯이, 지금의 논란과 시련이 위안부 운동을 발전적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되길 기대한다”라고도 했다.
다만 문 대통령은 “이번 논란은 시민 단체의 활동 방식이나 행태에 대해서 되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정부는 이번 논란을 계기로 기부금 통합관리 시스템을 구축해 기부금 또는 후원금 모금 활동의 투명성을 근본적으로 강화하겠다. 시민단체들도 함께 노력해 주시기 바란다”고 했다. 정의연 등의 회계부정 의혹, 횡령 의혹 등을 콕 집어 언급하기보다 시민단체의 잘못된 관행 등을 지적하는 선에서 발언을 마무리한 것이다.
2018년 1월 4일, 위안부 할머니들을 청와대로 초청해 오찬을 함께 한 문재인 대통령. 문 대통령이 이용수 할머니의 손을 잡고 배웅하고 있다. [사진 청와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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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대통령이 공식석상에서 위안부를 비중 있게 언급한 것은 2018년 9월 27일 유엔 총회 기조연설에서 “우리나라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직접 경험했다. 분쟁 지역의 성폭력을 철폐하기 위한 국제사회의 노력에도 함께할 것”이라고 언급한 뒤 21개월여만이다.
문 대통령은 그 해 3ㆍ1절 기념사에서 “위안부 문제 해결에 있어서도 가해자인 일본 정부가 ‘끝났다’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고 했으며, 같은 해 8월 14일 위안부 피해자 기림의 날 기념식엔 직접 참석해 할머니들을 끌어안으며 위로하기도 했다.
이처럼 2년 가까이 위안부 문제를 공개적으로 거론하지 않던 문 대통령이 이날 이용수 할머니를 특정하며 ‘작심 발언’을 한 것은 그만큼 이번 사태를 심각하게 본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애초 ‘윤미향 사태'가 처음 불거졌을 때부터 청와대 내부에선 관련 입장을 밝힐지를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의연 관련 의혹을 기본적으로 민간 영역인 시민단체의 일이라 판단해 입장 표명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가 "정부 조사 결과를 살펴보자"(5월 20일)고 한 것도 이의 연장선이다.
특히 문 대통령이 이용수 할머니 폭로 한 달여 만에 이날 관련 메시지를 낸 데엔 전날 서울 마포구 연남동 '평화의 우리집' 소장 손영미씨가 자택에서 숨진 채 발견된 사안이 영향을 끼쳤다는 관측이 나온다. 청와대는 문 대통령의 관련 발언 여부를 이날 오전에야 결정했다고 한다. 윤 의원 등에 대한 검찰 수사가 진행중인 터라 직접적 언급이 논란을 부추길 수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날 문 대통령의 발언으로 여권 내 논의는 일단락되는 모양새다. 특히 이용수 할머니에 대한 인신공격은 사그라들 것으로 보인다. 강훈식 민주당 수석대변인은 "피해 할머니들과 활동가들, 시민들이 연대하고 힘을 모은 결과 지금의 위안부 운동이 존재하는 것"이라며 "이번 논란으로 위안부 운동의 역사가 부정당하거나 평가 절하돼서는 안 된다"고 논평했다.
하지만 야권의 반응은 싸늘했다. 회계부정·횡령 의혹 등 사태의 심각성을 외면한 채 '위안부 운동'이란 대의로만 물타기 했다는 비판이었다.
미래통합당 ‘위안부 할머니 피해 진상규명 태스크포스(TF)’ 위원장인 곽상도 의원은 이날 중앙일보와 통화에서 “위안부 운동에 대해 누가 부인을 했느냐. 다만 이를 훼손한 윤 의원을 처벌하고 정의연을 해체해 달라는 게 이용수 할머니의 절규”라며 “문 대통령 발언을 보면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넘어가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고 꼬집었다.
안혜진 국민의당 대변인도 "이번 사건의 본질은 역사의 피해자인 할머니들을 이용하여 윤미향 등이 사익과 권력욕을 취했다는 것"이라며 "윤미향 사건이 편가르기 진영논리로 호도되는 일이 없도록 문 대통령은 유체이탈 화법 대신 확실한 입장표명을 해달라"고 촉구했다.
권호·현일훈 기자 gnom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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