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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미 시인의 심플라이프] 내 젊음의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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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럴드경제

바쁜 5월이었다. 산문집 ‘아무도 하지 못한 말’을 홍보하느라 인터뷰를 하고, 일요일마다 기차를 타고 남원에 가서 여성시를 강의했고 며칠 전에는 김해에 다녀왔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아무것도 못할 수는 없어서 십여명이 모이는 강의와 낭독회를 진행했다. 집에 돌아오면 씻고 바로 누웠다. 멀리 외출한 다음날은 쉬기를 원칙으로 살아왔기에 나는 크게 아픈 적이 없다. 하루 이상 병원에 입원한 적도 없다.

나를 만난 어느 여기자가 내가 나이에 비해 젊고 생기발랄하다며 어려운데도 즐겁게 사는 비결이 뭐냐고 물은 적이 있다.

어렵지 않은데, 근로장려금을 받은 사실을 공개한 뒤 날 바라보는 시선이 나는 불편하다. 예전 대학 시절이나 등단 무렵에는 서울 평창동에 사는 날 삐딱하게 보는 이들에게 내가 부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느라 애를 먹었는데, 이제는 내가 가난하지 않다는 걸 증명하느라 바쁘다. 삼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내 생활은 씀씀이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이사 다니느라 지겨워 작년 가을에 은행 대출을 받아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작은 아파트를 샀다.

내가 집을 샀다고 하니 친구들이 정말 좋아했다. 서울을 떠나기 전 마지막 낭독회에서 “제가 집을 샀어요”라는 말이 떨어지자 ‘와~’ 손뼉을 치던 젊은 언니들. 독자들이 내 걱정을 많이 했구나. 그네들의 사랑이 전해져 마음이 따뜻해졌다.

냉장고는 친구들이, 세탁기는 동생이 사주었다. 거실에 소파가 있으면 좋겠는데, 아직 내 마음에 드는 물건을 발견하지 못했다.

내 젊음의 비결? 그때 그때 내 감정에 충실하게 살았다. 나는 포기가 빠른 사람이다. 아니다 싶으면 바로 돌아선다.

혼자서도 잘 논다. 친구들하고도 잘 지낸다.

모르는 사람하고는 일은 같이 할지언정 식사는 가급적 피한다. (긴장하며 밥 먹으면 맛을 모르거나 체한다) 누가 내게 밥을 사겠다고 대들면 스트레스를 받는다. 오래된 친구들과 맛난 것 먹으며 수다 떠는 재미야 꿀맛이지만…. 은근한 미식가인 나는 입이 고급이다. 내가 추천하는 맛집을 가면 후회하지 않는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어느 대학 평생교육원에서 강의한 뒤에 점심식사 자리에 불려 나간 적이 있는데, 그날의 수모를 나는 잊지 못한다. 일산의 한 주공아파트에 살 때였다. 며칠 전부터 정중한 말투로 내가 좋아하는 메뉴를 묻는 그들에게 나는 중국음식보다는 한식이나 이탈리안음식이 좋겠다고 했다. 괜찮은 이탈리안 레스토랑을 예약했다며 차를 보낼 테니 주소를 알려 달라는 문자가 왔다.

‘OO마을 주공아파트’를 쓰며 왠지 오그라드는 느낌이었다. 내 강의를 들었던 그들은 대개 강남에 살았고 기업체 간부이거나 전문직 남자들이었다.

운전사가 딸린 승용차에서 내려 들어간 곳은 종로의 어느 뒷골목 허름한 한식당. 신발을 벗고 2층 계단을 올라가는데 (나는 신발 벗는 식당은 질색이다) 며칠 전에 접질린 발목이 아파오며 가슴이 부대꼈다.

음식은 맛이 없었다. 먹는 시늉만 하고 앉아 있다 나왔다. 내가 사는 곳이 ‘주공아파트’임을 알고 그들이 식당을 바꾼 것이다. 이탈리안 식당이 아니라서가 아니라 못산다고 내 입맛까지도 싸구려로 (이 정도면 만족하리라) 예단한 무례를 용서하기 힘들었다. 가난하면 더 대접해줘야 하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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