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이미 많이 기울어 구조 어려웠다” 전·현직 책임자 첫 공판서 주장
“해경청, OO조선사에 ‘자력 탈출 가능 횡경사’ 기술검토 요청(5월 2주).”
2014년 5월 당시 국군기무사령부(현 군사안보지원사령부)가 작성한 문건 내용 중 일부다. 당시 기무사는 세월호 참사 직후 동향을 살피던 중이었다. 문건에는 해양경찰청이 2014년 5월 선박 탑승객들이 자력 탈출할 수 있는 선박 경사각을 대형 조선사에 문의한 내용이 담겼다.
기무사는 문건에서 “해경은 선박 손상으로 선체 기울기 45도일 때 탑승자 이동 및 탈출 가능 여부 및 선내 인원이 자력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선체 횡경사 각도 검토 요청”이라고 썼다. 문건에 나온 조선사의 검토 결과를 보면 “정상 보행자세는 아니겠으나 경사각 35도 이전까지는 느리게 이동이 가능할 것으로 판단됨. 다만 선체 내 장애물, 연기, 침수 상태, 사람들의 심리 등 각종 변수들이 심각한 영향을 미칠 수 있으므로 자력 탈출 가능 각도는 신중히 검토돼야 함”이라고 나와 있다.
목포신항에 거치된 세월호의 모습. 권도현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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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경이 검토를 요청한 이유는 기무사 문건에 담기지 않았다. 류하경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민변) 변호사는 해경의 ‘면피성 검토’라고 봤다. 류 변호사는 “해경은 당시 세월호 참사 수습에 여념이 없어야 할 때였다. 구조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아니라면 굳이 자력 탈출 가능성을 따져볼 이유가 없었다”고 했다. 해경이 ‘배가 기울어 퇴선 명령을 내리고 구조에 나섰어도 탑승객을 구하기 어려웠다’는 논리를 만들어 구조 실패 책임에서 벗어나려 했다는 취지라는 얘기다. 해경 측은 “재판 중인 사항과 관련된 내용은 말씀드리기 어렵다”고 했다.
‘구조 책임이 발생했을 때는 세월호가 이미 많이 기울어 구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논리가 최근 다시 등장했다. 세월호 참사 구조 책임으로 기소된 해경 전·현직 간부들의 첫 번째 공판에서다.
명백한 구조 책임
지난 4월 20일 열린 세월호 참사 구조 책임자인 전·현직 간부들의 첫 재판. 피고인 측 변호인들은 혐의를 인정하는지, 어떤 쟁점을 다툴 것인지 밝혔다. 도덕적 비난은 감수하더라도 법적 책임을 피해가려는 의도가 담긴 주장이 여럿 나왔다.
이춘재 전 해경 경비안전국장 측 변호인은 “설령 과실이 있다 하더라도, 당시에 이미 세월호가 많이 기운 상황에서 퇴선 명령이 있었다면 구조될 수 있었는지 의문이기 때문에 인과관계도 부인하고 있다”고 했다. 이 전 국장은 참사 2년 뒤 치안감에서 치안정감으로 승진해 논란이 일었다.
이 전 국장 측 주장은 ①적어도 나에게 구조 책임이 발생한 시점에는 ②퇴선 명령을 내렸어도 구조가 어려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해경 간부들은 업무상 과실치사상 혐의를 받는다. 고의는 아니었더라도 ‘주의의무(구조 책임)’를 다했는지 재판에서 다툰다. 주의의무 소홀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인과관계가 입증돼야 처벌이 가능하다. 해경 간부들의 재판에선 구조 책임 발생 시점과 구조 책임의 범위는 재판의 주요 쟁점이다. 구조 골든타임에 퇴선 명령을 하지 않은 사실은 주의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판단의 핵심 근거 중 하나다.
해상사고가 일어나면 해경은 매뉴얼에 근거해 중앙구조본부와 광역구조본부, 지역구조본부를 가동한다. 중앙구조본부장은 해양경찰청장이 맡는다. 해경 본청 간부들도 중앙구조본부의 주요 보직을 맡는다. 역할에 따라 주의의무도 조금씩 달라진다.
참사 당시 해경 매뉴얼상 이 전 국장의 역할은 중앙구조본부장(해경청장)과 부본부장(해경 차장) 밑의 중앙조정관이었다. 중앙조정관은 구조대응 상황 분석·판단과 조정·통제 등의 업무를 맡는다. 해상사고 구조의 실무를 총괄하는 업무나 마찬가지다. 해경은 세월호 참사 당시 매뉴얼에 나온 직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해경이 참사 당일 작성한 중앙구조본부 운영계획을 보면 중앙조정관은 직제상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해경은 해경청장 산하에 총괄반·상황반 등 5개 대응반을 꾸렸다. 이 전 국장은 상황반을 맡았다. 산하에는 상황담당관·경비항공과장·수색구조과장·정보통신과장·국제협력담당관이 배치됐다. 국제협력담당관을 제외하면 해상 구조와 관련한 주요 보직자들이다. 직제만 보더라도 이 전 국장이 핵심 구조 책임자인 점이 간접적으로 드러난다.
해경 간부들에게 구조 책임이 발생한 시점도 참사 직후다. 해경 측은 참사 당일 오전 9시 10분 중앙구조본부가 가동됐다고 주장한다. 적어도 오전 9시 10분부터 해경 주요 간부들은 모두 세월호 참사의 심각성을 인지했고, 구조 책임이 발생했다는 의미다. 이 전 국장도 예외는 아니다. 참사 당일 최초 신고는 오전 8시 52분쯤 이뤄졌다. 중앙구조본부 가동 시점과 큰 차이가 없다. 이는 중앙구조본부에서 구조를 지휘한 해경 간부들에게 세월호 참사 전반의 구조 책임이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4월 16일의 약속 국민연대’ 회원들이 지난 5월 5일 서울 세종로네거리에서 세월호 전면 재조사와 성역 없는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강윤중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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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분간 퇴선 명령 지시 공백
세월호 참사 당일 상황을 시간대별로 보면 이 전 국장의 구조 책임은 크게 해경 123정 도착 전후로 나뉜다. 123정은 참사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한 해경의 소형함정이다.
해경 주요 간부들이 모여 있던 본청 상황실은 오전 9시 40분쯤 123정으로부터 현장 상황을 보고받았다. 해경 본청 상황실에선 참사 당일 오전 9시 44분에야 구체적인 구조 지시를 시도했다. 당시 해경 본청 문자상황보고시스템을 보면 ‘현장 상황 판단, 선장과 통화, 라이프래프트(구명뗏목) 등 이용 탈출 권고 바람’(오전 9시 44분), ‘라이프재킷(구명조끼) 입고 갑판상으로 집결 조치’(오전 9시 55분)라고 나와 있다. 현장에 있던 해경 123정에 전달한 조치다. 이 전 국장은 본인 지휘 아래 123정에 지시를 내렸다고 주장하고 있다. 정작 123정에는 문자상황보고시스템이 없어 이 전 국장의 지시를 확인할 수 없었다.
법원은 김경일 전 해경 123정 정장 재판에서 “현장 상황을 보고받은 해경 상황실에서 오전 9시 57분까지 퇴선 방송 지시를 하지 않았다”고 결론지었다. 이 전 국장을 비롯한 해경 본청 간부들은 9시 40분부터 최소 17분간 실질적인 퇴선 명령 지시를 내리지 않은 셈이다. 앞서 법원은 김 전 정장이 현장 상황을 파악한 오전 9시 44분 이후 적극적인 퇴선 유도를 하지 않은 책임을 인정해 실형을 선고했다. 이 전 국장 측 변호인은 첫 공판에서 “중앙구조본부에서 최선을 다해서 노력했다”고 했다. 해경 간부들은 참사 직후부터 “해상사고는 중앙보다 현장의 중요성이 크다”는 주장도 이어오고 있다.
법원에 제출된 시뮬레이션 자료도 이 전 국장의 구조 책임을 뒷받침한다. 김 전 정장 재판에 제출된 가천대 초고층방재융합연구소의 ‘가상대피시나리오 및 탈출 시뮬레이션’에 따르면 참사 당일 오전 9시 45분 37초쯤 퇴선 방송이 실시됐다면 6분 17초 만에 선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탈출할 수 있었다. 세월호가 59.1도 기울어진 상태였다. 법원은 김 전 정장 재판에서 시뮬레이션처럼 전원 구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지만, 일부 승객의 탈출 가능성은 인정했다.
이 전 국장에겐 123정의 참사 현장 도착 전까지 구조 책임도 있다. 해경 본청 상황실 교신 등을 보면 123정 도착 전까지 세월호 교신 시도 지시, 항공 구조대 지휘 시도 등은 이뤄지지 않았다. 류 변호사는 “해경 본청 책임자들은 구조 세력이 도착하기 전까지 세월호와 교신을 하라고 일선에 지시하는 시도, 헬기와 교신하며 구조하려는 시도, 적어도 갑판 위로 올라오라고 해서 구조선이 도착하면 바로 구조될 수 있게 하는 사전적 조치가 필요했다”고 했다. 그는 “현장과 가까운 지역구조본부가 실질적 책임자라는 주장도 핑계다. 지역구조본부가 제대로 구조를 못 하면 이를 바로 잡는 게 중앙구조본부에 있는 간부들의 역할”이라고도 말했다.
퇴선 명령이 인명피해 부른다?
첫 공판에서는 섣부른 퇴선 명령이 오히려 인명피해를 더 키울 수 있었다는 취지의 주장도 나왔다. 조형곤 전 목포해양경철찰서 상황담당관 측 변호인은 첫 공판에서 “(구조) 선박이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퇴선을 지시했다면 사람이 익사하거나 뛰어내리는 도중에 사망했을 가능성도 있다”고 말했다.
조 전 상황담당관 측 주장 또한 법원이 내린 결론과 배치된다. 법원은 이미 김 전 정장 재판에서 퇴선 명령이 승객 생존과 직결된다고 봤다. 법원이 든 근거는 해경이 숙지해야 할 매뉴얼이다.
법원은 김 전 정장의 재판 판결문에서 “사고 당시 수온(12.6도)과 국제 항공 및 해상 수색구조 매뉴얼에 의한 생존 예상 시간을 고려하면 퇴선 유도 조치에 따라 세월호 승객들이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에 뛰어들었더라도 상당한 시간 동안 생존해 있었을 것으로 판단된다”고 봤다. 매뉴얼상 생존 예상 시간은 10~15도 사이 수온에서 6시간 미만이다.
법원은 세월호 참사 해역에 승객들을 구조할 수 있는 선박이 있었던 점을 들어 퇴선 명령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법원 판결문을 보면 “사고 이후 둘라에이스호, 어업지도선인 전남 201호 등 선박들이 세월호 근처에 도달한 시간, 승선 가능 인원과 해경 소속 CN-235 초계기가 참사 당일 오전 9시 30분쯤부터 상공에 뜬 상태로 세월호 주변을 관찰했던 점 등을 고려하면 승객 443명이 모두 사고해역에 표류했다고 하더라도 전남 201호가 도착한 오전 10시 6분쯤까지 바다에 표류한 모든 사람의 구조가 가능했다고 판단된다”고 했다.
법정 증언들도 퇴선 명령의 중요성을 뒷받침했다. 유조선 둘라에이스호 선장은 2014년 8월 세월호 선원 재판에서 “사고 당시 승객들이 맨몸으로 수영을 했거나, 구명조끼를 입고 (바다로) 뛰었으면 구조할 수 있는 상태였다”며 “구조만 됐다면 476명 승객 모두 둘라에이스호에 임시로 수용할 수 있는 공간도 충분했다”고 증언했다. 둘라에이스호는 참사 당일 오전 9시 18분쯤 배를 세월호에서 200~300m 인근까지 이동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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