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식 홈런 세리머니 미국 흥분
홈런 자체보다 빠던에 더욱 관심
어떤 규정도 없는 MLB식 불문율
KBO리그가 무조건 따라야 하나
두산 박건우가 타격 후 방망이를 던지고 있다. MLB는 이를 금기시하지만, 미국 야구 팬은 한국식 ‘빠던’(방망이 던지기)에 열광한다. [뉴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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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KIA에서 뛰었던 투수 호라시오 라미레즈는 유쾌하고 친절한 미국 선수였다. 메이저리그(MLB) 전문가 송재우 해설위원이 그와 즐겁게 식사한 뒤 KBO리그의 팁 하나를 전했다. “한국 타자들은 홈런을 친 뒤 동작을 크게 하는 편이다. 문화 차이니까 기분 나빠할 필요 없다.” 송 위원이 말한 ‘큰 동작’은 배트플립(bat flip)이었다. 미국 투수가 배트플립이란 단어에 민감한 걸 알기 때문에 에둘러 표현했다. 그런데도 라미레즈의 표정은 확 굳어졌다고 한다. 그는 “생각 좀 해봐야겠다”고 답했다.
배트플립은 타자의 세리머니다. 홈런을 치면(배트플립을 해도 홈런이 안 되는 경우도 가끔 있지만) 타자가 방망이를 내던지는(flip) 동작이다. 배트플립에 대한 MLB 투수들 생각은 매우 부정적이다. 홈런 맞아 기분이 상했는데, 타자의 세리머니까지는 못 보겠다는 거다. 많은 투수가 배트플립을 한 타자가 다음 타석에 들어서면 위협구로 보복한다. 2020년 5월, MLB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배트플립이 투수를 모욕하는 행위라는 것과 이에 대한 보복을 묵인하는 불문율에 대해 미국 미디어와 야구 팬이 의문을 제기한 것이다.
KBO리그 개막전이 열린 5일 미국 ESPN은 삼성-NC의 대구경기를 생중계했다. NC 모창민이 홈런을 때린 뒤 배트를 내던지자, 미국 중계팀은 “와우, 시즌 첫 배트플립이 나왔다”며 흥분했다. 홈런보다도 배트플립을 더 기다린 듯했다. MLB에서 보기 힘든 장면에 미국 팬도 흥분했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너무 재미 있어서 계속 반복해 보고 있다’, ‘MLB에도 이런 게 필요하다’, ‘모창민의 방망이는 아직도 날고 있는 것 같다’ 등의 반응을 보였다. 야후스포츠도 ‘MLB는 배트플립을 금지하지 말아야 한다. 좀 더 재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썼다. 배트플립을 훌륭한 팬서비스로 달리 보는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야구 세상의 풍경을 바꾸고 있다. MLB가 멈춘 상황에서 개막하자 KBO리그에 미국 팬이 열광하고 있다. 경기력이 MLB보다 떨어지는가 하는 건 별 문제가 되지 않는다. KBO리그 특유의 활력에 반했다. 특히 배트플립은 MLB가 이와 관련해 얼마나 고리타분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지 되볼아보는 계기가 됐다.
배트플립에 관한 규정은 MLB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심지어 야구용어를 총정리한 『딕슨 야구사전』에도 없다. 130년 역사의 미국 야구에서 배트플립이 이슈로 떠오른 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최근 배트플립으로 유명해졌던 MLB 선수는 호세 바티스타였다. 그는 2015년 토론토 소속으로 디비전시리즈 5차전 역전 3점 홈런을 터뜨린 뒤 방망이를 힘차게 내던졌다. 상대인 텍사스는 다음 타석 때 그에게 위협구를 던졌고, 양 팀 몸싸움으로 번졌다. 이후 MLB에서는 배트플립에 대한 뜨거운 논쟁이 이어졌다. “투수를 모욕하지 말라”는 목소리가 여전히 컸다. 그러나 “투수는 삼진을 잡으면 마운드에서 환호(fist pump) 하는데, 타자의 감정 표현은 왜 막나”라는 반박도 나왔다. 롭 맨프레드 MLB 커미셔너는 배트플립을 은근히 지지했다.
KBO리그에서는 1990년대부터 ‘빠던’(배트플립의 한국식 속어)이 유행했다. ‘빠따(배트)’를 위풍당당하게 던진, ‘빠던의 아버지’는 양준혁이었다. 이종범의 ‘빠던’은 풍차돌리기 같았다. 홍성흔과 김재현이 계보를 이었다. 박병호(키움)는 2016년 MLB에 진출하기 전에 ‘빠던’ 습관을 고쳤다. 1998년 외국인 선수 제도 도입 후에는 미국 투수와 한국 타자 사이에 신경전이 종종 벌어졌다. 한국 타자의 ‘빠던’은 그 전보다 온순해졌다. 그래도 KBO리그는 ‘빠던’에 대해 관대하다. 제이미 로맥(SK)은 한국에 온 뒤 배트플립을 즐겼다.
‘빠던’에 열광하는 미국 팬과 미디어를 보며 ‘KBO리그가 MLB의 불문율까지 따라야 할 필요는 없다’고 느꼈다. 축구선수는 골 세리머니를 한다. 복서는 KO로 쓰러진 상대 옆에서 환호한다. 투수의 심기를 1초 동안 건드리는 세리머니가 보복을 부를 만큼 불경한가 싶다. 한국의 ‘빠던’이 미국의 ‘배트플립’에게 묻고 있다. 팬이 좋아한다고. 재미있지 않냐고. 화내지 말라고. 너희도 한번 해보라고.
김식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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