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엄군 총에 남편 잃은 이귀임씨의 ‘40년’
홀로 닥치는대로 일하며 어렵게 생계 꾸려
“생활고로 보육원에 잠시 아이들 맡겼는데”
석달 뒤 찾아가니 갑자기 프랑스로 입양돼
“잘 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한 숨
1983년 2월 서울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프랑스로 입양을 간 정민주(오른쪽)·민성 형제. 이귀임씨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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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8 민주화운동이 어느덧 40돌을 맞고 있지만, 온전한 진실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여전하다. <한겨레>는 신군부의 무자비한 폭력 아래 삶이 헝클어진 이들의 이야기를 △이별 △고통 △망각 △참회 △부활 다섯가지 열쇳말로 나눠 들어봤다. 시민뿐 아니라 명령에 따라 광주에 투입됐던 ‘보통의 군인’들 역시 역사의 피해자였으며, 이들의 거친 숨소리는 아직 진행형이다. 5·18 40돌 다섯개의 이야기를 세차례에 나눠 싣는다.
그해 오월, 남편은 허망하게 떠나버렸다. 1980년 5월21일 광주 금남로에서 계엄군의 총을 맞고 사망했다. 시민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자행했던 날이다. 지난달 18일 경기도 안양에서 만난 이귀임(67)씨는 “남편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거짓말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두 아들을 데리고 나주 영산포 시누이 집에 있다가 뒤늦게 비보를 접했다. “광주 공용터미널에서 버스를 타고 영산포로 갈 때만 해도 광주가 그렇게 시끄러운 줄 몰랐어요.” 계엄군의 통제로 발이 묶여 시신 수습도 하지 못했다.
1980년 5·18 민주화운동 당시 남편을 잃은 이귀임씨는 두 아들을 임시로 보육원에 맡겼다가 자신의 동의도 없이 입양된 사실을 알게 됐다. 정대하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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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를 일찍 여의고 광주에 살던 그는 1973년 남편(고 정학근)을 지인 소개로 만났다. 인천 부평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고, 1975년과 1977년 연달아 아들을 얻었다. 1980년 3월께 광주로 이사해 사글셋방을 얻어 생활하던 중 5·18을 맞았다. 시민들이 아시아자동차 공장(현 기아자동차 광주공장)에서 군용차를 끌고 나올 때 그곳에 함께 있었다. 이씨는 “가족들이 나타나지 않자 남편의 주검은 아무런 장례 절차도 없이 망월동 묘역에 매장됐다”고 말했다.
홀로된 이씨는 닥치는 대로 일해 두 아들과 생계를 꾸려나갔다. 손수레를 끌고 옥수수를 쪄서 팔기도 했고, 병아리 행상을 하기도 했다. 사글셋방 얻을 돈이 없어 농성동 뒷산에 천막을 치고 몇달 지내기도 했다. 큰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했지만, 사기까지 당해 막다른 골목으로 몰렸다. 처지를 딱하게 여긴 한 교회 목사가 이씨에게 목포에 있는 보육원(고아원)을 소개했다. 이씨는 “중학교까지 졸업시켜준다는 말에 어떻게든 어려운 시기만 넘겨 보려고 임시로 아이들을 그곳에 맡겼다”고 말했다.
이귀임씨의 두 아들 정민주·민성 형제. |
이후 삶의 실타래가 엉켜버렸다. 이씨는 1983년 2월 석달 뒤 아이들 옷을 사서 보육원으로 향했다. 정민주(75년 9월17일생)·민성(77년 12월20일생) 두 아이는 그곳에 없었다. 보육원에서는 “아이들을 서울로 보냈다”고 했다.
“너무 놀라 ‘왜 서울로 갔느냐?’고 물었더니 서울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을 보낸다고 하는 거예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고 미친 사람처럼 서울로 찾아 올라갔지만 두 아들은 이미 프랑스로 떠난 뒤였다. “내가 입양을 보낸다고도 안 했는데 내가 동의서를 쓴 것으로 돼 있더라고요. 내 글씨체가 아니에요. 그땐 제가 한글을 쓰지 못할 때였어요.”
삶의 의욕을 잃은 이씨는 몸도 마음도 부쩍 허약해져 갔다. 눈에 헛것이 보여 시름시름 앓게 되자 무당을 불러 굿을 할 정도였다. 그러다 한 남자를 만났다. 중장비 기사였던 두번째 남편과 결혼을 약속하고 전남 보성 시가로 들어갔다. 하지만 한번 결혼에 실패했다는 사실을 안 시부모가 결혼에 반대했다. 남편에게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신 4개월 상태에서 시가를 나왔다. 울음을 삼키며 혼자 딸을 낳은 이씨는 자신의 성을 따 딸을 호적에 올렸다. “평생 아빠 한번 부르지 못하고 살게 해 딸에게 항상 미안하지요.”
이귀임씨의 작은아들 정민성군의 입양 당시 모습. |
5·18은 그의 삶을 날려버렸다. 5·18 유족들과 서울 연희동 전두환의 집까지 쫓아가 시위를 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쳐 죽이도 못하고, 아무 힘도 없는” 자신을 원망하기도 했다. 25년 전엔 안양으로 이사해 수년간 식당 보조로 일했다. 다행히 딸은 공부를 잘해 장학금을 받고 대학 영문학과를 졸업했다. 병원 비정규직 청소원으로 일하는 이씨는 주말이면 반찬을 만들어 딸을 만나러 서울 가는 게 유일한 낙이다. “딸이 없었으면 세상이 막막해서 어떻게 버텼을지 몰라요. 딸 때문에 살 이유가 생긴 거죠.”
이귀임씨의 큰아들 정민주군의 입양 당시 모습. |
물론 답답한 가슴은 여전하다. 두 아들 때문이다. 이씨는 “꼭 체한 것처럼 항상 가슴에 맺혀 있는 게 있다”고 말했다. “큰아이는 당시 철이 들어 있었어요. ‘엄마가 많이 아프니까 의사가 돼 낫게 해주겠다’고 보육원 직원에게 말하고 (입양을) 갔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20년 전께 서울 홀트아동복지회를 찾아갔지만, 둘째아들 근황만 어렴풋이 확인했다고 한다. “솔직히 이젠 두 아들 주소를 알아도 내게 감당할 힘이 없어요. 다만 두 아들이 잘 살고 있다는 소식이라도 들었으면 좋겠어요.”
안양/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알려왔습니다] ‘나 모르게 해외입양된 두 아들…5·18 이후 가슴에 돌이 박혔다’ 기사 에서 이귀임씨는 1982년 7살·5살 아들을 목포에 있는 보육원(고아원)에 잠시 맡겼는데, 석달 뒤 홀트아동복지회를 통해 입양 보냈다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고 보도했습니다. 이와 관련해 홀트아동복지회는 “입양동의서는 두 아들이 머물던 보육원에서 작성됐으며, 해외입양 과정에서 불법행위는 전혀 없었다”고 알려왔습니다. _ 2020년 6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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