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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단독] 성폭력에 저항하다 혀 깨물었다고 유죄…56년 만의 미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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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행 정당방위’ 재심 청구 최말자씨

1964년 성폭행 맞서 저항하다

남성 혀 깨문 혐의로 중상해죄 처벌

가해자·검찰·법원 모두

최씨 지탄해 기나긴 고통의 일생


한겨레

18살 때 자신을 성폭행한 남성에게 저항하다 상해를 입힌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최말자씨가 56년 만의 재심 청구를 준비하며 지난달 30일 부산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한겨레>와 인터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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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2월, 당시 72살이던 최말자씨가 ‘한국여성의전화’ 문을 두드렸다. 그해 1월 서지현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검찰국장의 성추행을 고발했고, 3월에는 김지은씨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성폭력을 폭로했다. 뉴스를 통해 사회 곳곳에서 쏟아지는 ‘미투’ 고발을 접한 최씨는 분노했다. 그리고, 50여년 동안 자신을 ‘가해자’로 규정해온 한국 사회의 모순을 고발하기로 마음먹었다.

1964년 5월6일 저녁. 18살이던 최씨는 자신의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을 데려다주기 위해 집을 나섰다가 당시 21살이던 노아무개씨와 마주쳤다. 위협을 느낀 최씨는 친구들부터 집에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노씨를 다른 길로 가도록 유인했다. 그러자 노씨는 느닷없이 최씨를 쓰러뜨리고 입을 맞추려고 달려들었다. 최씨는 넘어지면서 바닥에 놓인 돌에 머리를 부딪쳤다. 노씨는 성폭행을 시도했고, 최씨는 입안에 무언가 들어오자 ‘이대로 숨 막혀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그 무언가를 확 깨물어 저항했다. 노씨의 혀가 1.5㎝ 잘렸다.

최씨는 이 사건으로 이듬해 1월 부산지법 형사부(재판장 이근성)에서 징역 10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법원은 ‘중상해죄’라고 했다. 반면 노씨의 성폭력은 죄로 인정되지 않았다. 노씨에게는 성폭력을 가한 뒤 최씨의 아버지 집에 침입해 협박한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만 적용됐다. 노씨는 최씨보다 적은 징역 6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내가 피해자인데 왜 가해자로 돼 있냐는 거예요. 그놈이 가해자인데 나만 구속되어서 여섯달 넘게 교도소에 있었어요. ‘나는 잘못이 없다’, ‘정당방위라고 생각한다’ 수없이 얘기했는데, 검사는 ‘내가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있다’고 했고, 판결문에도 검사가 말한 그대로 나와 있더라고요.” 최씨는 오는 6일 한국여성의전화와 함께 부산 연제구 거제동 부산지법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성폭행을 시도한 남성에게 저항하다 남성의 혀 일부를 자른 혐의로 유죄 판결을 한 법원에 56년 만에 재심을 청구할 예정이다.

성폭행 사건 이후 최씨는 되레 궁지에 몰렸다. 주변에선 자꾸 노씨와의 결혼을 권했다. “결혼을 하면 간단히 끝나지 않느냐”는 반응이었다. 남동생은 “아버지한테 맞아 죽는다”며 최씨에게 도망가라고 했다. 결국 최씨는 몸을 추스를 새도 없이 집 밖을 떠돌아야 했다. 그러는 사이 집에 경찰이 찾아오고 신문 기자가 찾아왔다. “집에선 ‘이 가시나 때려죽인다’고 난리였어요.”

반면 노씨는 떳떳했다. 노씨는 그날 이후 친구 등 10여명을 데리고 최씨의 집에 찾아와 흉기를 책상에 꽂고 행패를 부렸다. “나를 ×신으로 만들었으니 죽일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최씨의 아버지는 최씨가 구속된 사이 노씨에게 돈을 주고 합의를 했다. “자식이 6개월 넘게 구속되어 있는 걸 더는 못 보겠다는 생각이셨던 것 같다”고, 최씨는 회상했다.

최씨를 죄인 취급 한 건 검찰과 법원도 마찬가지였다. 두달 동안 이어진 조사에서 검사는 때마다 “(가해자와) 결혼하면 간단하지 않으냐”, “못된 년. 가시나가 남자를 불구로 만들었다”와 같은 말을 했다. 그럴 때마다 최씨는 “최선을 다해 반항했을 뿐이다”, “정당방위다” 하고 항변했지만, 묵살당했다. “가장 억울한 건 검사실에서 강압적으로 조사를 받은 거예요. 검사가 주먹질하는 시늉을 하고 욕을 하면서 ‘니가 고의로 그랬지?’ ‘계획적으로 했지?’ 이런 말을 계속하는데, 조사를 받는 날에는 ‘오늘 또 죽었다’고 생각하며 정신이 아찔했어요.”

경찰은 검찰에 사건을 넘길 때 노씨에게 특수주거침입과 특수협박 혐의 외에 강간미수 혐의를 적용하자는 의견을 냈지만, 검사는 강간미수 혐의를 빼고 기소했다. 그나마 검찰은 노씨에게 징역 8년을 구형했고, 최씨에게는 단기 1년에서 장기 3년을 구형했다. 하지만 재판부의 판단은 상황을 더 악화시켰다. <부산일보> 1964년 10월22일치 4면을 보면, 재판장 역시 최씨에게 “첨부터 피고에게 호감이 있었던 게 아니냐”라거나 “피고와 결혼해서 살 생각은 없는가”라고 물었다. 최씨는 죄다 부인했지만,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범행 장소와 집이 불과 100m 거리이고, 범행 장소에서 소리를 지르면 충분히 주변 집에 들릴 수 있었다. 노씨의 강제 키스가 최씨로 하여금 반항을 못하도록 꼼짝 못하게 해놓고 한 것은 아니다. 혀를 깨문 최씨의 행위는 방위의 정도를 지나친 것”이라고 판단했다.

한겨레

1964~1965년 당시 사건 관련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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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와 검경의 가혹한 수사, 사실과 다른 유죄 판결까지. 8개월 동안 최씨가 겪은 일들은 그에게 트라우마로 남았다. 이웃들은 최씨에게 손가락질을 했다. 재판이 끝난 이후 서너달은 집 밖에 나오지 못했다. 결국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방을 구해 혼자 살았다. 집에선 계속 결혼을 권했고, 떠밀리듯 결혼한 뒤 아들을 낳고 곧 이혼했다.

와이셔츠 공장과 노점상 등을 전전하며 홀로 밥벌이를 하는 힘든 세월을 버티면서, 언젠가 때가 되면 공부를 하겠다고 맘먹었다. 63살이 된 2009년에야 지역 신문에서 배움의 기회를 놓친 만 18살 이상 여성을 위한 2년제 중·고등학교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지난해 8월 한국방송통신대 문화교양학과를 졸업했고, 졸업 논문으로 여성의 삶과 역사에 대한 논문을 쓰면서 자신이 겪은 일도 함께 정리했다. 논문을 미리 읽은 같은 학교에 다니는 지인이 말없이 최씨를 끌어안고 “언니, 여태까지 어떻게 참고 살았나. 우리 이 한을 풀자”고 말했다. 최씨가 한국여성의전화 문을 두드리게 된 계기다.

형사소송법 제420조의 재심 청구 사유에는 ‘증언이나 증거가 허위임이 입증되는 등 수사 과정에서의 위법성이 발견된 경우’가 있다. 법무법인 지향의 김수정·이상희 변호사 등 최씨의 법률지원단은 검찰 수사의 위법성을 밝혀내 재심 신청을 하겠다는 계획이다. 이상희 변호사는 “피해자가 원래는 불구속 상태로 있다가 검찰 수사 단계에서 갑자기 구속됐다. 그 과정에서 피해자는 영장도 보지 못했고, 왜 구속됐는지 이유도 몰랐다고 기억하고 있어 그 자체가 불법 수사라고 보고 있다”고 말했다.

관건은 당시 수사 과정 등이 담긴 재판 기록을 찾아내는 것이다. 검찰보존사무규칙 제8조(보존기간)는 형의 시효가 완성될 때까지 사건기록을 보존한다고 규정한다. 그렇다면 최씨의 사건기록은 이미 폐기됐을 가능성이 크다. 다만 국내외적으로 중대하거나 검찰 업무에 특히 참고가 될 사건에 관한 사건기록은 준영구로 보존한다. 당시 이 사건이 큰 이슈가 됐을 뿐만 아니라 이후 비슷한 사건의 최초 판례로도 거론되며 법학도들의 교재에서 정당방위 행위 부분에 실릴 만큼 중요 사건이었다. 따라서 최씨의 사건기록이 검찰청에 남아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경기남부해바라기센터 소장인 장형윤 아주대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일반적으로 폭력 피해자는 주변 사람들과 사회, 국가의 차원에서 가해자의 행동이 잘못됐고, 피해자는 잘못이 없다고 인정하는 절차가 있어야 그다음의 삶을 살 수가 있다”며 “재심을 통해 정의를 되찾고 또 다른 피해자들에게 희망을 주는 등 긍정적 의미를 찾아 심리적으로 (사건을) 마무리 짓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한겨레

최말자씨가 지난달 30일 부산여성의전화 사무실에서 <한겨레> 인터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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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씨도 비슷한 말을 했다. “이 시대에도 보호를 못 받고, 억울함을 자기 혼자 끌어안고 말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엄청 있을 겁니다. 그들이 기회가 있으면 당당하게 나와서 사실을 밝히고, 억울함을, 상처를 회복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보고 용기를 내고 당당하게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당당한 사람 아닙니까.”

부산/글·사진 오연서 기자 lovelette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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