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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수 청와대 비서실장 김정렴 별세··· 조카사위 김종인 조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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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5일 작고한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


역대 최장수 청와대 비서실장 기록을 갖고 있는 김정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회장이 25일 오후 10시 작고했다. 향년 96세.

고인은 1924년 서울에서 태어나 1944년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들어갔다. 태평양전쟁 말기 강제징집돼 일본군에 배속됐다가 히로시마에서 일제 패망을 맞았다. 당시 미군이 투하한 원자폭탄의 영향으로 후유증을 앓았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뒤 1952년 예편한 그는 한국은행에 돌아와 1차 화폐개혁에 참여했다. 1959년 재무부로 옮겨 경제관료의 길을 걸었다. 재무부 장관과 상공부 장관을 지냈다.

상공부 장관을 하다 1969년 ‘3선 개헌안’이 통과된 직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후임으로 박정희 대통령 비서실장에 발탁됐다.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9년 3개월간 비서실장을 맡아 최장수 청와대 비서실장 기록을 세웠다. 비서실장 퇴임 후엔 주일대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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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2월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이 김정렴 신임 주일대사(왼쪽)에게 임명장을 준 뒤 악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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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의 회고록에 따르면 청와대에 불려간 김 회장이 “각하, 저는 경제나 좀 알지 정치는 모릅니다. 비서실장만은 적임이 아닙니다”라고 하자 박 전 대통령이 “경제야말로 국정의 기본이 아니오. 백성들이 배불리 먹고 등이 따뜻해야 정치가 안정되고 국방도 튼튼히 할 수 있지 않소”라며 설득했다고 한다.

고(故)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김 회장에 대해 “대통령의 신임이 두터워 차지철과 김재규가 비서실장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고 회고했다.

고인은 2003년 한 언론 인터뷰에서 “내가 비서실장으로 일한 9년3개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를 주재한 것은 10번도 안 된다”고 했다. 본인이 매일 청와대 회의를 주재하고 결과를 취합해 대통령에게 전달했다는 것이다. 박정희 정부에서 이뤄진 경제개발과 고도성장의 숨은 주역으로 그가 꼽히는 이유다.

한국학중앙연구원 현대한국구술자료관에는 “중화학공업화 추진은 일본과 만주의 산업화 모델에 자극을 받은 것이며, 경제기획원이 반대했지만 대통령 비서실이 중심이 되어 밀어붙였다”는 김 회장의 육성 기록이 남아 있다.

고인은 박정희 정부 말기 차지철 경호실장이 ‘부각하’라 불릴 정도로 위세를 떨치고 비서실이나 정앙정보부를 제치고 대통령에게 ‘직보’하는 등 ‘비선’(秘線) 조직이 발호하며 결국 10·26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을 회고록에 남기기도 했다.

고인은 1999년부터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와 회장을 차례로 맡아왔다.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에 내정된 김종인 전 총괄선거대책본부장은 고인의 조카사위다. 김 전 위원장은 26일 아내 김미경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함께 조문했다.

김 회장의 유족으로는 희경·두경(전 은행연합회 상무이사)·승경(전 새마을금고연합회 신용공제 대표이사)·준경씨(전 한국개발원 원장)와, 사위 김중웅씨(전 현대증권 회장, 현대그룹 연구원 회장)가 있다. 빈소는 서울삼성병원 장례식장 14호실, 발인은 8일 오전 8시30분, 장지는 서울추모공원. (02)3410-6923.

김형규 기자 fidelio@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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