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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04 (목)

이슈 쏟아지는 연예계 기부 행렬

'밥은 먹고 다니냐' 하춘화가 밝힌 #조인성 #이주일 #유산 #200억 기부 [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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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SEN

[OSEN=박소영 기자] ‘밥은 먹고 다니냐?’ 하춘화가 고 이주일과의 인연, 조인성을 향한 팬심, 딸 넷을 박사로 키운 아버지에 대한 속내를 털어놨다.

13일 오후 전파를 탄 SBS 플러스 ‘밥은 먹고 다니냐?’에 하춘화가 게스트로 나왔다. 1961년 6살의 나이로 가요계에 데뷔한 그는 60년째 노래하고 있다.

김수미를 만난 하춘화는 대뜸 “조인성을 저한테 양보해 달라. 김수미가 한 방송에서 녹화 날 조인성이 대기실 앞에서 연인처럼 배려했다고 자랑하셨다. 굉장한 질투를 느꼈다”고 말했다. 김수미는 “집문서를 주더라도 조인성은 안 된다. 조인성이 결혼해도 내 마음은 변치 않는다”고 단호하게 거절했다. 하춘화 역시 조인성은 자신의 이상형이라고 강조했다. 두 사람의 양보 없는 조인성 전쟁이 시작된 것.

하춘화는 “잘생기기만 한 남자는 싫다. 조인성은 잘생겼는데 남자답다”고 치켜세웠다. 김수미는 “‘발리에서 생긴 일’ 때 조인성이 내 아들 역이라고 인사하는데 하느님이 강림한 줄 알았다. 내가 제임스 딘을 좋아하는데 조인성은 그 느낌이 난다”고 자랑했다. 하춘화 역시 “저도 ‘발리에서 생긴 일’ 때부터 좋아했다”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김수미와 하춘화는 조인성의 혈액형, 키, 심지어 팬티 사이즈에 대한 퀴즈까지 맞히며 엄청난 팬심을 뽐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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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으로 하춘화의 인생 토크가 펼쳐졌다. 하춘화는 “6살 아이가 대중가요 발표한 건 최초라 외신들이 취재왔다.역도산이 한국을 방문해 만났다. 일본으로 데려가서 키우겠다고 했다. 그런데 조건이 있었다. 일본인으로 귀화하라고 해서 아버지가 반대했다. 일본인이 되는 건 싫다고 해서 무산됐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이어 그는 “제 첫 무대는 당시 제일 큰 극장이었다. 독집 앨범에 12곡을 담았다. 발표한 노래만 2500곡 정도 된다. 신곡 연습할 시간도 없이 다음 앨범을 제작했다. 작사 작곡이 끝나면 바로 녹음에 들어갔다. 몇 천 곡의 노래를 발표한 건 나훈아, 이미자, 하춘화 셋 뿐”이라고 자랑했다.

하춘화는 한국 가수 최다 공연 보유자로 기네스북에 올라 있다. 그는 “기록을 내려고 한 건 아닌데 하다 보니 최다 콘서트 보유자가 됐다. 8500회 정도 된다. 1년에 절반을 공연했다. 리사이틀 한참 할 땐 하루 공연 2~5회였다. 최대 10시간 공연이었다. 한 공연에 8가지 무용, 노래 30곡을 했다. 등창난다고 땀 때문에 등이 곪았다. 사춘기도 못 겪고 성장했다. 친구들과 떡볶이 먹고 짜장면집도 가고 싶었는데 시간이 없었다. 중3 때 첫 히트곡 ‘물새 한 마리’가 나왔다. 제 의지대로 할 수 있는 게 없었다”고 털어놨다.

또한 그는 남북 분단 이래 최초의 평양 공연 무대에도 섰다. 하춘화는 “1985년 그때만 해도 김일성은 살아 있었다. 하지만 동포, 민족보다 적진에 가는 기분이었다. 벌벌 떨며 갔다. 고려호텔에 묵었다. 자유로운 개인 행동은 불가했다. 방 앞에 안내원이 지켰다. 방 안에서 대화도 자유롭게 못했다. 녹음기 틀어놓거나 필담했다. 3박 4일, 긴장과 초조한 마음으로 지냈다”고 조심스럽게 회상했다.

월남전 공연에도 간 그다. 하춘화는 “베트남전에 참전한 우리 군인들, 오늘 죽을지 어쩔지 모르니까 좋아하는 연예인과 사진 찍는 걸 정말 좋아했다. 참전 군인들에게 설문조사를 해서 뽑혔다. 그때 아버지가 국방부에 호출됐다. 나이가 너무 어려 위문 공연을 거절했더니 국방부가 설득했다. ‘그곳에 대한민국의 아들들이 있는데 위문 공연이 그렇게 어렵냐’고 묻더라. 그래서 미성년자이지 보호자 동행을 요청했다. 대학생이던 언니가 보호자로 따라갔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한 달 있었다. 비둘기 부대, 백마 부대, 천룡 부대를 다 돌면서 공연해야 했다. 공연 중에도 포탄 소리가 들렸다. 자다가도 깼다. 안심 시키는데도 무서웠다. 그리고 군예대 위문단에 이주일이 있었다. 무명이던 그를 만났다. 먼저 귀국하니 대신 안부전화 해주겠다고 했다. 못생긴 사람이 친절하구나 싶더라. 전화번호 주고 귀국하니 이주일이 전화했다더라. 그때 인연이 시작됐다”고 덧붙였다.

하춘화와 이주일의 인연은 10년간 이어졌다. 그는 “1977년 리사이틀 하는데 전속 사회자를 모집했다. 공고를 보고 이주일이 찾아왔다. 단장님이 너무 못생겼다고 불합격시켰는데 제가 오디션을 보자고 했다. ‘탈선 춘향전’ 공연을 하는데 이주일이 너무 열심히 하더라. 전속 계약을 맺고 10년간 함께 공연을 돌았다다. 제 8500회 공연 중 7500회는 그와 함께였다”고 고백했다.

특히 이주일은 하춘화의 생명의 은인이었다. 하춘화는 “이리역과 제 공연장은 500미터 거리였다. 그런데 화약을 실은 열차가 폭발했다. 위력이 엄청났다. 이리시 전체의 유리를 깨뜨렸다. 1977년 11월 11일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죽는구나 싶더라. 땅속으로 떨어지는 공포가 느껴졌다. 이리시 전체가 암전됐다. 공연장 지붕이 무너져 내렸다”고 아픈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러면서 “나 혼자 살아 나가야 하는구나 싶었는데 이주일 목소리가 들렸다. 암흑 속에서 ‘나는 많이 다친 것 같아요’ 하더라. 전쟁이 난 것 같으니 빨리 나가자고 했다. 나무 하나가 걸려 있는데 그걸 타고 올라가더라. 담장 위로 가서 뛰어내리라고 했는데 못하겠다고 했다. 결국 이주일의 머리를 딛고 내려왔다. 머리 위로 벽돌이 떨어져서 두개골 함몰 부상을 당했는데도 몰랐다. 이주일이 내 생명의 은인이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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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하춘화를 만든 건 8할이 아버지였다. 하춘화는 “딸 넷만 있다. 당시 할머니와 어머니는 아들을 낳아오라며 아버지의 혼외를 허락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 딸 구분 없는 시대가 올 거라고 했다. 딸 넷을 잘 키웠다. 딸들 모두 박사가 됐다. 아버지는 작년 101세에 돌아가셨다. 어머니는 현재 100수 99세가 되셨다”고 자랑했다.

그는 중매 결혼으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고. 하춘화는 “결혼 25주년이 됐다. 누군지 모르고 만났다. 국장 언니가 진국이라고 해서 봤는데 와이셔츠 안에 검정 러닝셔츠를 입었더라. 너무 별로였다. 1년 만에 크리스마스에 다시 만났다. 12월 31일 호텔에서 만나자더라”며 남편과 러브스토리를 들려줬다.

그러나 슬프게도 첫 아이를 유산한 그다. 하춘화는 “순리대로 살기를 원하는데 노력을 많이 했다. 이미 나에게 많은 걸 주셨으니 자식은 안 주시려나 보다 싶었다. 그런데 주변에서 더 걱정하더라. 큰 불행, 결점인 것처럼 얘기하더라. 입양도 생각했는데 주변에서 극구 만류했다. 그런 마음으로 어려운 사람을 도우라고 했다”고 털어놨다.

19세 때부터 기부해서 지금까지 수백 억 원을 기부했다. 하춘화는 “40년 전 서울 집값이 300만 원이었는데 공연 수익금 1~2천만 원을 기부했다. 기부 액수를 묻길래 어림잡아 200억 원 대충 얘기했는데 더 될 수도 있다”며 “제가 1세대인 황금심, 백설희, 현인, 김정구 선생님들과 한 무대에 섰다. 아버지가 그 자료들을 다 모으셨다. 먼 훗날 공공기관에 기증해서 대중문화의 연구 자료로 주고 싶다 하셨다. 전남 영암군에 기증했다. 대한민국 최초 한국 트로트 가요센터를 건립했다”고 알렸다.

그의 목표는 신인가수를 발굴할 트로트 아카데미 건립과 90세가 될 때까지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하춘화의 현재진행형 행보에 많은 이들이 박수와 응원을 보냈다.

/comet568@osen.co.kr

[사진] 밥은 먹고 다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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