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번방 가담자들에게 분노한 여론은 신상공개 요구로 이어졌다. n번방 피의자의 신상공개를 요청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은 4월 2일 오전 580만 명에 달했다. 지난 3월 24일 오마이뉴스 의뢰로 리얼미터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응답자의 82%가 n번방 피의자 신상공개를 찬성한다고 밝혔다. 트위터에서 ‘#n번방_가입자_전원_신상공개’ 해시태그를 달고 공유된 게시물은 4월2일 오전에만 23만 건을 넘었다.
피의자 신상공개에 비판적이었던 시민사회 인사들도 n번방 피의자 신상공개는 필요하다고 봤다. 오창익 인권연대 사무국장은 “디지털 성범죄는 별다른 기술 없이도 사람을 죽일 수 있는 끔찍한 범죄”라며 “신상공개로 ‘제2의 조주빈’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범죄 예방 효과가 크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오 사무국장은 지난해 전 남편과 의붓아들을 살해한 혐의를 받는 고유정씨(36)의 신상공개 결정을 두고 “범죄 예방 효과를 비롯해 공익적 가치가 없다”고 비판했다.
여성들을 협박해 성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판매·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지난 3월 25일 오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 이석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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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이 먼저 공개한 이름 석 자
조씨의 신상공개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조씨의 신상을 맨 처음 세상에 공개한 것은 정부가 아니었다. 언론이었다. SBS는 지난 3월 23일 <8시 뉴스>에서 단독 보도로 조씨의 얼굴과 이름을 공개했다. 서울경찰청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 개최를 하루 앞둔 시점이었다. SBS는 “추가 피해를 막기 위해”, “수사에 도움을 주는 차원에서”, “국민 알권리를 위해”라는 단서를 달았다. 이전까진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만 어렴풋이 조씨의 이름이 떠돌았다.
SBS 보도는 내용과 시점에서 논쟁을 불렀다. 보도에는 조씨의 대학 시절의 성적, 지인들이 말하는 성격 등이 담겼다. 조씨가 학보사 기자 때 쓴 칼럼도 알려졌다. 첫 보도 이후 세간의 관심이 조씨의 일거수일투족에 쏠렸고, 이후 여론이 조씨를 ‘악마화’하는 데 집중하게 됐다는 비판이 나왔다. 보도가 조씨 개인사에 치중한 나머지, 광범위하게 발생한 디지털 성착취 문제의 본질을 흐렸다는 지적이었다.
윤여진 언론인권센터 사무처장은 “다음날 공개될 가능성이 매우 컸던 조씨의 신상을 하루 먼저 공개해서 일상화된 디지털 성범죄를 예방하는 데 얼마나 도움이 될 수 있을지 의문”이라며 “조씨의 대학 시절 행적이나 성격을 공개해 얻은 공익적 가치가 있었는지도 고민해봐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의 신상정보공개심의위 개최 하루 전 언론이 신상을 공개할 필요가 있었느냐는 지적도 뒤따랐다. 언론이 하루 먼저 조씨의 신상을 공개해서 얻는 공익이 크지 않다는 취지였다. 언론 보도가 빠르게 나와 피의자로 오인받던 시민이 ‘신상털이’ 피해를 덜 입었다는 반론이 맞섰다. 오 사무국장은 “이번 사건의 충격과 공포를 감안하면 어떤 언론이라도 조씨의 신상을 확인했다면 보도했을 것”이라며 “조씨를 악마화하는 보도도 아니었기에 특별히 언론 윤리를 지키지 않았다고도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일사천리’ 신상공개 결정
경찰은 지난 3월 24일 오후 신상정보공개심의위에서 조씨의 신상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 신상정보공개심의위는 같은 날 오후 1시 30분에 시작해 1시간 넘게 진행됐다. 회의 종료와 신상공개 발표 사이의 시간 공백은 길지 않았다. 경찰이 보도자료로 조씨의 신상공개를 한 시점은 같은 날 오후 3시였다.
조씨의 신상공개는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력 처벌법)’에 근거해 진행됐다. 성폭력 처벌법에 따라 신상공개가 이뤄진 첫 사례다. 지금까지 모든 피의자 신상은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에 따라 공개됐다. 경찰 신상공개심의위는 조씨 신상을 공개하며 “범행 수법이 악질적·반복적”, “범죄가 중대하다”, “구속영장이 발부되고 인적·물적 증거가 충분히 확보됐다”고 했다. 모두 성폭력 처벌법에 규정된 신상공개 사유다.
피의자 신상공개는 일종의 행정 처분이다. 피의자 신분이기에 형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처분이 내려진다. 특정범죄 가중처벌법이나 성폭력 처벌법이 피의자 신상공개의 조건의 하나로 ‘충분한 증거가 확보됐을 때’를 단 이유도 형이 확정되지 않은 점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법원의 신상정보공개 명령을 받은 성범죄자에게 적용되는 신상고지와는 별개의 절차다.
경찰의 피의자 신상공개 결정에 따른 공식적인 불복절차는 규정에 없다. 법원에 집행정지 가처분 신청을 하기에는 신상정보공개심의위 결정과 경찰의 신상공개가 거의 동시에 이뤄져 시간이 부족하다. 양홍석 법무법인 이공 변호사는 “지금은 신상공개 결정에 피의자가 이의를 제기할 방법이 사실상 없는 상황”이라며 “피의자 신상공개를 검찰의 기소 전후로 조정하고 피의자 방어권을 보장하는 제도 마련도 필요해 보인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 신상공개는 공개재판이 원칙인 법원으로 사건이 넘어가기 전까지만 의미가 있다”며 “시간적 여유가 없어 불복절차를 두는 것은 쉽지 않다”고 했다.
포토라인의 역설
조씨는 지난 3월 26일 오전 처음으로 세상에 직접 얼굴을 드러냈다. 경찰의 신상공개가 이뤄진 다음 날이었다. 조씨는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면서 포토라인에 섰다. 조씨는 얼굴을 가리거나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경찰청 훈령 ‘경찰 수사 사건 등의 공보에 관한 규칙’은 얼굴 공개와 포토라인 설치를 할 수 있도록 규정한다.
반면 검찰은 경찰과 달리 조씨를 포토라인에 세울 수 없다고 밝혔다. 지난해 12월 1일 바뀐 검찰의 ‘형사사건 공개금지 등에 관한 규정’은 어떤 공적 인물도 수사과정 일체를 촬영·녹화·중계할 수 없도록 규정한다. 언론의 포토라인을 제한하는 규정도 담겼다. 이 규정은 검찰의 조국 전 법무부 장관 수사과정에서 피의자 인권 보호 등을 위해 개정됐다.
조씨가 경찰 포토라인에서 발언한 직후 논란은 더 불거졌다. 조씨는 포토라인에서 “피해자들에게 할 말이 없느냐”는 질문에 “멈출 수 없었던 악마의 삶을 멈춰줘 감사하다”고 답했다. 피해자를 향한 사과나 혐의를 인정하는 발언은 없었다. 조씨에게 발언을 하게 해 자아도취된 모습을 드러낼 기회를 줬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조씨는 손석희 JTBC 사장, 윤장현 전 광주광역시장 등을 언급하며 여론의 관심을 다른 방향으로 돌리기도 했다.
박이대승 불평등과시민성연구소장은 “n번방 피의자들의 신상을 공개한 뒤 모두 포토라인에 세운다고 가정하면 각자 하고 싶은 말을 할 기회를 주는 것”이라며 “여론의 초점이 피의자들의 발언을 따라가면서 디지털 성착취라는 문제의 본질이 흐려진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김원진 기자 onejin@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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