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 인터뷰
"치밀하고 끔찍한 범죄 'n번방' 예견된 일"
"성착취 핵심은 소비자…소지죄 신설 필요"
"국회 더 많은 여성 의원 참여해야"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사진=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제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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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경제 한승곤·김가연 기자, 김연주 인턴기자] "일이 다 터진 뒤에 주목받는 현실이 안타깝다."
미성년자 등 여성들을 협박해 만든 성 착취물을 텔레그램 대화방을 통해 유포한 이른바 'n번방 사건'이 국민적 공분을 일으키고 있다.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25·구속)에게 나체 사진 등을 전송한 피해 여성들은 해당 사진이 가족은 물론 학교 친구들, 지인들에게 알려질까 두려워 범죄자들이 지시하는 그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 해당 사진과 영상 등은 돈을 받고 팔렸다. 치밀하고 조직적인 범죄였다.
지난 30일 서울 동작구에 위치한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를 만나 'n번방' 사건에 대한 전문가 견해를 들었다. 서 대표는 끔찍한 이 사건이 일어날 것을 예견했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이 사건 중심에는 우리 사회 한국 남성들의 뿌리 깊은 '강간문화'(Rape Culture)가 자리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2의 'n번방' 사건은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일종의 경고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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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번방 사건 배경에는 한국 남성들의 '강간 문화' 자리하고 있어"
끔찍한 'n번방' 사건은 한국 남성들의 소위 '강간 문화'에서 비롯됐다는 게 서 대표의 결론이다. 강간문화란 문자 그대로 '강간'이라는 성범죄가 남성들의 문화로 자리 잡고 있음을 이르는 말이다. '강간'과 '문화'가 형용 모순에 해당하지만, 뒤틀린 성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남성들의 가치관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성폭력 상담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강간 문화의 일부분은 피해 여성을 조롱하며, 자신들의 범죄를 정당화한다. 서 대표는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동조한 가해자들 역시 '우리는 처벌 안 받는다', '지금 탈퇴하면 의심받는데 왜 탈퇴하냐'면서 오히려 공권력과 분노를 비웃는 행태를 보인다"면서 "성착취물을 소비·구매하는 것이 자신이 행할 수 있는 것이라 믿고 이게 성폭력이라고 인식하지 못하는 게 이런 폭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피해자를 조롱하는 '2차 가해'에 대해서는 "우리 사회가 '행실이 바르지 않아서', '짧은 치마를 입어서 성폭력 당한다', '대부분 성폭력 사건은 가짜 미투·꽃뱀' 등 방식으로 성폭력 사건을 인정하지 않았다"며 "이 사회에 정말 억울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폭력 피해라는 게 굉장히 드물다. '여성도 잘못이 있다', '피해자의 순결성을 입증하라'는 목소리는 오래전부터 있었다"고 했다.
이어 "이 사건에서 어그러진 성 인식이 두드러진 게 아니다"라며 "강간 문화라고 부르는 '성폭력이 별 게 아니라고 하는 것', '여성 비하 방식의 문화를 공유하는 것' 등이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결과"라고 비판했다.
우리 사회에서 성 착취가 근절되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는 "성착취물을 소비하는, 구매하는, 모아놓고자 하는 이용자들이 처벌받는 법이 없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지난 25일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탄 차량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조주빈의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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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치밀하고 끔찍한 범죄 'n번방' 사건…괴물로 진화"
서 대표는 'n번방' 사건을 치밀한 조직적 범죄라고 규정했다. 그는 "이전에는 온라인 그루밍이라고 하면 성인 남성이 여성 청소년에게 접근해 영상물을 받아낸 뒤 협박하는 방식이 전형적이었다. 직접 가해자는 1명이었다"면서 "그런데 텔레그램은 관전자·구매자가 대기하고 있고 조직적 형태로 성착취를 기획하고 피해자를 물색하고, 영상을 공급하는 형태를 갖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어 "이전에는 시청·공유·판매에 적합한 플랫폼을 통해 성착취 영상물을 유통했다면, 이 사건은 메신저를 플랫폼화했다는 특이점이 있다. 5만명까지 접속 가능한 보안이 강화된 메신저를 이용해 대화 중 잡담, 언어 성폭력 사이에 영상이 계속 올라가는 방식으로 '메신저'라는 특수성이 반영됐다"고 부연했다.
서 대표는 'n번방' 사건은 이미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고, 또 그러므로 우리 사회가 대응할 수 있었는데, 그렇지 못했다고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은밀히 일어나는 끔찍한 성범죄에 대해 우리 사회가 관심이 부족하다는 지적이다.
그는 "온라인을 통한 성폭력이 수면위로 떠올랐는데도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다. 오히려 반복되면서 사건이 늘어났다"면서 "그렇기 때문에 그루밍 형식으로 온라인에서 접근한 뒤 협박으로 전환해 성착취물을 받아내는 사건이 크게 터질 거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법이 일찍 마련됐다면, 국가적으로 일찍 주목을 잘 받았다면 대규모 성착취는 줄었을 것이다. 일이 다 터진 뒤에 주목 받는 현실이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지난 25일 인터넷 메신저 텔레그램에서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들의 성 착취물을 제작 및 유포한 혐의를 받는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탄 차량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와 검찰 유치장으로 향하자 시민들이 조주빈의 강력처벌을 촉구하며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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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사법부 등 주요 자리 채우는 '중년 남성의 얼굴' 바뀌어야"
지난 24일 국회 홈페이지와 속기록 등에 따르면 국회가 1월10일 온라인 청원사이트 '국민동의청원'을 열자 같은 달 15일 '텔레그램에서 발생하는 디지털 성범죄 해결에 관한 청원'이 올라왔다.
텔레그램 성범죄 해결을 위한 △국제 공조수사, △수사기관의 전담부서 신설,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 강화 등을 요구하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국민청원 개설 이후 처음으로 10만명의 동의를 얻어 2월 11일 법제사법위원회에 회부됐다.
그러나 3월3일 법제사법위원회 법안심사 제1소위원회 당시 회의록을 보면 일부 참석자는 'n번방' 사건 등에 대해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한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 나온다.
김인겸 법원행정처 차장은 "이것도 소위 'n번방 사건'이라는, 저도 잘은 모르는데요", "(딥페이크는) 자기는 예술작품이라고 생각하고 만들 수도 있거든요"라고 말했다. 김오수 법무부 차관은 "청소년이나 자라나는 사람들은 자기 컴퓨터에 그런 짓 자주 한다"고 했다.
송기헌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나 혼자 스스로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는 것까지 처벌할 수는 없잖아요. 내 일기장에 내 스스로 그림을 그린단 말이에요"라고 언급했다.
김도읍 미래통합당 의원은 "기존 법으로도 처벌이 가능하지 않냐"며 "청원한다고 법 다 만듭니까"라고 발언했고 같은 당 정점식 의원은 "내가 자기만족을 위해서 이런 영상을 가지고 나 혼자 즐긴다 이것까지 (처벌이) 갈 거냐…"라고 말했다.
성인지감수성이 부족한 국회가 사실상 'n번방' 사건을 키운 게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현재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n번방' 강력 처벌 관련 법안을 만들고 있다.
미성년자를 포함한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이 지난 25일 오전 서울 종로경찰서에서 검찰로 송치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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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인지감수성 낮은 국회…여성 의원들의 적극적 참여 절실"
서 대표는 입법·사법부의 낮은 성인지감수성을 비판하면서 더 많은 여성 국회의원들이 필요하다고 제언했다.
그는 "이 사건의 핵심을 명확히 파악하고 제대로 된 대안을 내놓는 것이 국회의 책임이자 1호 청원의 의미였는데 너무 형식적으로 처리했다. '이건 국회 일이 아니다', '관련 발의 법안이 있으니까 이걸로 됐다'는 태도로 1호청원에 대해 의무를 다 했다고 쉽게 판단한다"면서 "이런 태도는 중년 남성의 얼굴로 국회가 이뤄졌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또 상당수의 가해자가 성폭력이 아닌 음란물 유포 혐의를 받는 것에 대해 "매우 문제적"이라면서 "피해자 입장에서는 엄청난 성폭력 가해 행위인데, 음란물 유포죄를 받게 되면 약식 기소로 벌금 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피해자들은 법적 제도로 피해를 회복할 수 있는 길이 없다"고 거듭 지적했다.
이어 "그래서 '왜 성폭력을 행한 것인데 사법기관, 수사기관은 그걸 음란물을 적용했는가'라고 생각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국회에 대해서는 "결정권이나 중요 역할 대부분이 중년 남성으로 채워져 있다. 그러나 권위 있고 엘리트 남성이기 때문에 피해자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데 한계가 있다"면서 "아무리 법과 제도가 바뀐다고 해도 실제 결정을 하는 것은 수많은 역할자로 채워진다. 때문에 그 자리를 채우는 사람들의 얼굴이 많이 바뀌어야 한다"고 말했다.
지난 30일 대전여성단체연합 관계자들이 대전지방검찰청 앞에서 성 착취 동영상 유포 사건인 '텔레그램 n번방' 사건 관련자들을 강력하게 처벌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미지출처=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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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착취물 소지하는 순간 처벌할 수 있어야…'성착취물 소지죄' 신설 촉구"
텔레그램 성착취 사건을 수사 중인 경찰은 성착취 영상을 본 사람도 음란물 소지죄로 처벌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29일 경찰 등에 따르면 서울경찰청은 텔레그램 대화방에서 오간 미성년자 성 착취물을 단순히 시청한 행위도 아동·청소년의 성 보호에 관한 법률(아청법)상 '아동·청소년 이용 음란물 소지죄'를 적용할 수 있을지 여부를 두고 법리를 검토하고 있다.
다만 성인이 등장하는 성착취물의 경우 소지죄 행위를 처벌할 조항이 없어, 법적 공백이 있다는 비판이 이어지고 있다.
관련해 서 대표는 "성 착취물을 성적으로 이용할 목적으로 구매하는 행위, 소지·시청하는 행위에 대해 다 처벌할 수 있는 새로운 입법이 필요하다"며 소지죄 신설을 촉구했다.
그는 "디지털 성범죄에서 폭력을 이루게 하는 핵심은 기획자가 아닌 소비자다"라며 "성착취물을 보고자 하는 몇만명이 언제나 준비를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박사'를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또 다른 박사를 만들게 된다"고 지적했다.
서 대표는 "명칭이 '소지죄'일 필요는 없으나, 이용자로 존재하는 사람들을 처벌할 수 있어야 피해자들도 공포를 덜 느낄 수 있다"며 "소지 자체가 죄가 되면 성착취물을 보관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범법행위라는 인식을 주면서, 재유포를 막는데 굉장히 효과적이다. 그래서 소비·수요를 차단했을 때 공급 또는 기획자가 탄생하지 않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
이어 "사실 이 범죄는 몇 만명이 함께 저지른 것인데 몇 명만 처벌 받고 있다"면서 "이번에 잡지 못하면 성착취물을 보고자하는 사람들들, 다운받아서 모아두는 사람들이 다른 플랫폼에서 다른 방식으로 구성할 것이라고 본다. 성착취를 소비하고 향유하는 가해자를 벌하지 않는 게 핵심 문제"라고 거듭강조했다.
한편 'n번방'의 종류인 '박사방'을 운영한 '박사'(텔레그램 닉네임) 조주빈(25)은 아동·청소년의 성보호에 관한 법률 위반등 혐의로 구속돼 지난 25일 검찰 송치됐다. 'n번방' 최초 운영자로 알려진 '갓갓'으로부터 'n번방'을 물려받은 '켈리' 신 모(32) 씨는 지난해 9월 구속돼 1심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고 27일 항소심 선고공판을 앞두고 있다. 전 운영자로 알려진 '와치맨' 전 모(38) 씨는 구속기소됐다.
*사진이나 영상의 불법촬영·유포, 이를 빌미로 한 협박, 사이버 공간에서의 성적 괴롭힘 등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여성긴급전화1366,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 지원센터(02-735-8994)에서 지원받을 수 있습니다.
한승곤 기자 hsg@asiae.co.kr
김가연 기자 katekim221@asiae.co.kr
김연주 인턴기자 yeonju1853@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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