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11.16 (토)

이슈 텔레그램 n번방 사건

[오래 전 ‘이날’]3월26일 10대 납치해 성행위 강요한 주범 검거, 모바일 없던 시대의 ‘텔레그램 n번방’

댓글 첫 댓글을 작성해보세요
주소복사가 완료되었습니다
1960년부터 2010년까지 10년마다 경향신문의 같은 날 보도를 살펴보는 코너입니다. 매일 업데이트합니다.

■1990년 3월26일 10대 납치해 성행위 강요한 주범 검거, 모바일 없던 시대의 ‘텔레그램 n번방’

서울지방경찰청은 지난 24일 ‘텔레그램 n번방’의 운영자로 일명 ‘박사’로 불리던 조주빈씨(25)의 신상을 24일 공개했습니다. 경찰이 공개한 조씨의 신상 정보는 이름과 나이, 얼굴 사진, 송치 시점 등이었습니다. 경찰의 신상공개심의위원회는 조씨의 신상을 공개한 이유에 대해 “불특정 다수의 여성을 노예로 지칭하며 성착취 영상물을 제작·유포하는 등 범행 수법이 악질적·반복적”이라며 “국민의 알권리, 동종범죄의 재범방지 및 범죄예방 차원에서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지 여부를 종합적으로 심의해 성명, 나이, 얼굴을 공개하기로 결정했다”고 설명했습니다. 조씨는 미성년자 등을 협박해 성착취 불법 촬영물을 찍고 이를 신상정보와 함께 텔레그램 대화방에 유포한 ‘텔레그램 n번방’의 주범으로 미성년자 등의 성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유포한 혐의를 받고 있습니다.

30년 전 오늘 경향신문 사회면에 보도된 ‘납치 10대 소녀 윤락행위 강요 1명 구속·5명 수배’ 기사에 소개된 사건은 모바일 기기와 메신저 같은 요소들만 제외하면 ‘텔레그램 n번방’과 본질적으로 다를 바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서울용산경찰서는 26일 10대 소녀들을 고용해 윤락행위를 시킨 뒤 화대 1500여만원을 가로챈 지모씨(25·강동구)를 미성년자 약취유인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달아난 김모씨 등 5명을 수배했다. 지씨 등은 지난달 24일 강동구 천호2동에 ㅅ주점을 차려놓고 동네 후배인 김씨 등이 납치해온 홍모양(17) 등 10대 소녀 5명을 고용, 윤락행위를 시키고 1500만원의 화대를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경찰 조사 결과 지씨는 수배된 김씨 등 5명에게 여관방을 얻어주고 “여자를 데려오면 한 사람에 30만원씩 주겠다”고 약속, 이들로부터 여자를 공급받아온 것으로 밝혀졌다.”

경향신문

여성을 협박해 성 착취 불법 촬영물을 제작하고 유포한 텔레그램 ‘박사방’ 운영자 조주빈씨가 25일 오전 얼굴이 공개된 채 검찰 송치를 위해 서울 종로경찰서를 나서고 있다. 이석우 기자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당시 구속된 지모씨는 동네후배인 김모씨 등 5명을 시켜 “여자를 데려오면 한 사람에 30만원씩 주겠다”고 했고, 이들로부터 납치한 여성을 공급받아 윤락행위를 강요해 화대를 챙겼습니다. 1990년은 모바일 메신저가 존재하지 않았고, 휴대전화를 소유한 이들도 극히 드물었던 시기였습니다. 모바일 메신저를 이용한 성착취 동영상 유포 같은 범죄가 존재할 수 없었던 것이지요. 대신 당시는 여성이나 어린이를 대상으로 한 인신매매가 현재보다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당시 사건과 ‘텔레그램 n번방’은 유사점이 많습니다. 가장 비슷한 점은 1990년의 지씨나 현재의 조씨 모두 여성을 성적으로 착취해 돈을 벌기 위한 수단으로만 생각했다는 점입니다. 지씨 등에 의해 1990년의 피해자들이 납치를 당해 윤락행위를 강요당하는 극한상황에 빠졌던 것처럼 현재의 피해자들 역시 납치 상태만 아니었을뿐 실질적으로 조씨 등에게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당하고, 인권을 유린당했습니다. 인간을 돈벌이 대상으로만 본 피의자들 때문에 과거와 현재의 피해자들은 모두 유형, 무형의 감옥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산 것입니다. 여성을 인격적인 존재로 존중했다면 저지를 수 없었던 범죄들이었습니다.

또 납치 및 윤락행위를 강요한 범죄조직의 우두머리라 할 수 있는 지씨는 조주빈씨가 n번방의 회원들 중 일부를 직원으로 지칭하면서 피해자들을 성폭행하도록 지시하고, 성착취 동영상 유포 등의 임무를 맡긴 것처럼 동네후배인 김씨 등에게 납치 행위를 지시하는 등의 행태를 보였습니다. 검찰은 현재 조씨가 다른 피의자들을 조직적으로 통솔했다는 근거로 범죄단체조직 혐의를 적용할 수 있을지 검토 중입니다. 형법상 ‘범죄단체조직죄’는 ‘사형이나 무기징역·4년 이상의 징역에 해당하는 범죄를 목적으로 하는 단체를 조직한 경우’인데 조씨와 ‘직원’ 들의 범죄는 모두 징역 4년 이상을 선고할 수 있는 범죄입니다. 1990년 지씨와 김씨 등의 범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1990년 사건의 기사를 보면 현재의 언론 보도에서는 볼 수 없는 내용들이 보입니다. 바로 피의자인 지씨의 실명과 나이뿐 아니라 지씨의 주소가 번지까지 나와있다는 점입니다(본 기사에서 실은 당시 기사의 갈무리에서는 민감할 수 있는 해당 정보들을 삭제했습니다). 주소라는 민감한 개인정보가 언론 보도를 통해 불특정 다수에게 노출된 것은 ‘피의자 인권’에 대한 인식은커녕 피의자의 인권을 존중해야 한다는 인식 자체가 부족했던 시대였기에 가능한 일로 보입니다. 성범죄 또는 강력범죄의 피의자에 대해 실명과 얼굴 등을 공개하는 기준이 법적으로 정해져 있는 현재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게다가 비록 익명처리가 되어있기는 하지만 피해 여성에 대해서도 학교 이름을 유추할 수 있는 정보가 들어있습니다. 역시 개인정보 보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했던 시기였기에 일어날 수 있던 일입니다.

현재 강력범죄 및 성범죄 피의자의 신상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성폭법)’과 ‘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특강법)’상의 기준에 따라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번에 경찰이 ‘텔레그램 n번방’의 조씨 신상을 공개한 것은 성폭법에 따른 것으로, 성폭법에 따른 신상 공개는 조씨가 처음입니다. 성폭법 제25조는 “성폭력 범죄 피의자가 죄를 범하였다고 믿을 만한 충분한 증거가 있고, 국민의 알권리 보장, 피의자의 재범 방지 및 범죄예방 등 오로지 공공의 이익을 위하여 필요할 때에는 얼굴, 성명 및 나이 등 피의자의 신상에 관한 정보를 공개할 수 있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기존의 피의자 신상공개는 특강법에 따라 주로 살인범 등에 대해 이뤄져 왔습니다.

경향신문

경기 서남부 부녀자 연쇄살인범 강호순이 현장검증 이틀째였던 2009년 2월 2일 오후 경기 수원 구운동 황구지천변에서 여대생 연양의 시신을 암매장하는 모습을 재연하고 있다. 정지윤기자


국내의 강력범, 성폭력범 신상 공개에 대한 사회적 논의는 2009년 7명을 연쇄살해한 강호순 사건으로 인해 촉발됐습니다. 당시 경찰은 강씨의 얼굴을 가렸지만 일부 언론이 자체 취재를 통해 그의 얼굴을 공개했습니다. 이때 촉발된 범죄자의 신상 공개에 대한 논의를 통해 2010년에는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얼굴 등 신상 정보를 공개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을 담은‘특정강력범죄의 처벌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이 국회에서 통과됐습니다. 해당 요건들은 범행 수단이 잔혹하고, 죄를 입증할 충분한 증거가 있고, 국민의 알 권리와 공공의 이익을 위하며, 피의자가 청소년이 아닐 것 등이었습니다.

경향신문

MBC 교양프로그램 ‘실화탐사대’가 지난해 방송에서 공개한 조두순의 얼굴. 방송 갈무리.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2008년 경기 안산에서 8살 여자아이를 납치, 강간 상해한 조두순의 경우 이 요건에 모두 부합했지만 범행 시점이 법 시행 이전이었던 탓에 얼굴이 공개되지 않았었습니다. 조두순의 얼굴을 처음 공개한 것은 MBC 교양프로그램 ‘실화탐사대’였습니다. 이 프로그램은 지난해 4월 24일 성범죄자의 신상을 알려주는 사이트인 ‘성범죄자 알림e’의 관리 실태를 지적하면서 복역 중인 조두순의 얼굴을 공개한 바 있습니다. 당시 실화탐사대 측은 “조두순이 나올 날이 머지 않았다”며 “깊은 고민 끝에 사회가 좀 더 경각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얼굴을 공개하게 됐다”고 설명했습니다. 포항교도소에서 복역 중인 조두순은 올해 12월 출소를 앞두고 있습니다. ‘성범죄자 알림e’ 사이트에는 출소 후 5년 동안 조두순의 얼굴, 키와 몸무게, 실명, 거주지 등이 공개될 예정입니다.

김기범 기자 holjjak@kyunghyang.com

▶ 장도리 | 그림마당 보기

▶ 경향 유튜브 구독▶ 경향 페이스북 구독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