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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환의 흔적의 역사] '산 메뚜기 삼킨 당태종, 제단 오른 조선 태종'···작금엔 "내 탓이오" 지도자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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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선도본>(조선 후기 조운선과 군선을 그린 도본)에 나타난 조운선. 선수(뱃머리)가 선미보다 넓고 깊이가 깊다. 세금으로 거둔 곡식의 적재량을 늘리기 위해 배의 구조를 바꾼 것이다. 이 때문에 선박사고의 위험성도 커졌을 것이다.|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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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당 태종의 연호) 2년인 628년 당나라 황제 태종(재위 626~645)이 살아있는 황충(蝗蟲·메뚜기 혹은 풀무치)을 꿀꺽 삼켰다. 독특한 음식 취향인가 싶지만 그게 아니다. 당시 당나라 백성들은 큰 시름에 빠져 있었다. 가뭄과 함께 황충떼가 당나라 수도인 장안을 뒤덮었다. 가뜩이나 가뭄 때문에 고초를 겪던 백성들은 황충떼까지 창궐해서 그나마 맺힌 곡식을 훑고 지나가자 발만 동동 굴렀다.

■탄황의 고사

당 태종이 황급히 들에 나가 백성들의 참상을 목격한 뒤 황충떼를 향해 소리쳤다.

“사람은 곡식으로 살아가는데, 너희가 먹어대면 백성에게 해가 된다. 잘못이 있다면 모든 책임은 짐(나)에게 있다. 너희는 차라리 내 심장을 갉아 먹어라. 백성에게는 해가 없도록 해라.”

태종은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돌발행동을 벌였다. 들판을 메우던 황충을 손수 두 마리 잡아 삼킨 것이다. 대신들이 뜯어 말렸지만 늦었다. 태종은 “황충의 피해가 나에게만 옮겨지기를 바랄 뿐”이라며 ‘삼키고’(呑蝗) 말았다. 그러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황충떼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이것이 당 태종의 ‘탄황의 고사’이다.(<정관정요>)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

비단 당 태종 뿐이 아니다. 중국 역사를 통틀어 국가적인 재난 발생 때마다 “내탓이오”를 외친 군주들이 있었다. ‘내탓이요’의 원조는 바로 상나라를 세운 탕왕(기원전 1600~1589)이다. 우여곡절 끝에 창업한 탕왕에게 위기가 닥쳤다. 무려 7년간이나 가뭄이 계속된 것이다. 그러자 나라의 길흉을 점치던 태사(太史)가 “사람을 제물로 삼아 기우제를 지내야 한다”고 아뢰었다. 탕왕은 “어찌 생사람을 죽일 수 있냐”면서 “내가 희생양이 되겠다”고 자청했다. 탕왕은 목욕재계하고 머리카락과 손톱을 자른 뒤 자기 몸을 흰띠풀로 싸서 희생물의 모습을 갖추고는 뽕나무숲, 즉 상림(桑林)에 들어가 기도를 올렸다.

탕왕은 이 때 ‘6가지의 일(六事)’로 자책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가 무절제해서 정치가 문란해진 겁니까, 백성이 직업을 잃어 곤궁에 빠졌습니까. 궁궐이 너무 화려합니까. 제가 궁궐 여인들의 청탁에 빠졌습니까. 뇌물이 많아져서 정도를 해치고 있습니까. 제가 아첨하는 자들의 말을 듣고 어진 이를 배척하고 있습니까.”(<사기> ‘은본기’)

그렇게 탕왕이 간절한 자책의 기도를 올리자 금방 천 리에 구름이 몰려들어 비를 뿌렸다. 덕분에 수 천 리의 땅이 해갈되었다. 상 탕왕이 가뭄을 맞아 상림에서 스스로 6가지를 자책했다고 해서 ‘상림육책(桑林六責)’ 혹은 그냥 ‘육사(六事)의 자책’라고 한다.(<십팔사략> <제왕세기> <사문유취> 등)

상 탕왕과 당 태종을 섞어 벤치마킹한 황제가 있었으니 바로 송나라 태종(재위 976~997)이다. 송 태종은 황충떼가 하늘을 뒤덮자 ‘하늘의 노여움을 산 것은 곧 짐(태종)의 책임’이라고 자책하면서 역시 돌발행동을 벌였다. “짐이 내 몸을 태워 하늘의 견책에 응답하고자 한다”고 자기 몸에 불을 붙이려 했다. 그러자 기적이 일어났다, 곧 비가 내리고 황충의 떼가 즉시 죽은 것이다. 비단 중국 뿐이 아니다. 조선의 임금들도 상나라 탕왕과 당나라 태종, 송나라 태종의 고사를 줄기차게 인용했다. 영조는 1765년부터 3년 이상 가뭄이 이어지고 황충떼가 창궐하자 ‘당태종의 탄황’ 고사를 인용하며 한탄했다.

“당 태종은 백성을 위해 황충를 삼켰는데 아무리 어진 군주라도 정성이 없었다면 어찌 목구멍으로 넘어갔겠느냐. 그러나 이제 늙어버린 과인이 당 태종처럼 할 수 있을 지 걱정이다.”(<영조실록> 17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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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운선 그림(19세기 화기 유운홍의 작품)이다. 조운선 운행과정에서 과적과 무리한 운항 때문에 대형참사가 잇달아 발생했다.|국립중앙박물관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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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우를 아시나요?

조선에서 ‘모두 내탓이요’ 정신을 몸소실천한 이가 바로 태종이다.

즉 조선시대에 해마다 음력 5월10일에 내리는 비를 특별히 ‘태종우(太宗雨·태종 임금이 내려준 비)’라 했다. ‘태종우’가 과연 무엇인가, 조선말기 문신인 이유원(1814~1888)의 <임하필기> ‘문헌지장’ 편을 보면 이 태종우의 유래가 잘 나와있다.

“태종이 승하하기 직전 시절이 하수상했다. 전국에 가뭄이 들었다. 이때 태종이 ‘백성들이 어찌 살라는 것이냐’고 걱정하고는 ‘안되겠다. 과인이 하늘에 올라가 천제에게 즉시 단비를 내려달라고 고하겠다’고 했다. 과연 음력 5월10일 태종이 승하했는데, 전국적으로 비가 내렸다.”

이러한 민간의 속설에 시간이 흐를수록 드라마가 덧붙여진다.

“태종 말년에 극심한 가뭄이 계속되어 많은 사람이 죽자 태종은 스스로 제물이 되기로 했다. 장작더미에 올라 불을 붙이고 비가 내리기를 간구했다. 갑자기 비가 내려 장작불이 꺼졌다. 해마다 이날 전국적으로 비가 왔는데 이 비를 태종우라 한다.”(<한국대표야담집> 2)

처음엔 태종이 “내가 죽은 뒤에 하늘에서 천제를 만나서 비를 뿌리게 해달라고 부탁할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세월이 흐를수록 기우제의 희생물을 자처했다느니, 실제로 장작더미 위에 앉아 불을 붙였다느니 하는 이야기로 번졌다. 상나라 탕왕의 고사를 덧붙인 것이 틀림없다.

야사 뿐이 아니다. 정사인 <영조실록>에도 ‘태종우’가 나온다. 즉 1764년(영조 40년) 음력 5월10일 약간의 비가 내리자 영조가 반색하는 내용이다.

“비가 약간 내렸다. 영조는 ‘이는 조상(태종)의 덕분’이라고 했다. 해마다 이날이면 문득 비가 내리니, 사람들이 ‘태종우(太宗雨)’라고 했다. 그래서 임금이 언급한 것이다.”

선조~인조 때의 문신인 박동량(1569~1635)의 <기재잡기>에는 심상치않은 내용이 들어있다.

즉 “1591년 5월 10일 근 200년 만에 처음으로 태종우가 내리지 않아 식자들이 은근히 걱정했다”는 것이었다. 이 언급이 사실일까. 사실이라면 태종의 승하(1422년) 이후 1590년까지 170년 가까이 해마다 음력 5월10일이면 어김없이 태종우가 내렸다는 얘기가 아닌가. 그랬던 태종우가 내리지 않았으니 조짐이 좋지 않다는 것이다. 이듬해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으니 태종우가 내리지 않은 조짐이 전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 당대의 속설이었던 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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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조운선을 복원한 모양. <각선도본>을 근거로 만들었다. 태종 때 이러한 조운선이 침몰하면서 1000여명이 물에 빠져 수백명이 죽고 쌀 1만석이 수장됐다.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제공


■조선판 세월호 사건

‘태종우’의 당사자인 태종이 또 ‘자책의 임금’으로 등장한다. 때는 바야흐로 1403년(태종 3년) 5월5일 큰 재난이 일어났다. 경상도의 조운선(세금 현물을 운반하는 배) 34척이 배가 한가운데서 침몰했다.

피해가 막심했다. 쌀 1만여석이 수장된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배에 탔던 1000여명이 물에 빠져 수백명이 목숨을 잃었다. 태종은 “모든 사고의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고 자탄했다.(<태종실록>)

“사람들을 사지로 몰아넣었구나. 출항날(5월5일)은 수사일(受死日·대흉일)이고, 풍랑마저 거센 날이어서 배를 띄우면 안되었는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백성을 몰아서 사지로 나가게 만든 것이다.”

태종은 그러면서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느냐”고 애통해했다. 이 참사의 원인을 보면 기막힌다. 사고발생 후 3개월 후인 8월, 사간원이 올린 상소를 보자.

“올해 조운선을 올릴 때 풍랑을 잘 파악하고, 화물적재의 중량을 제대로 감독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중요한 일을 용렬하고 간사한 무리에게 맡겨 수군 수백명을 수장시키고, 적재한 쌀 1만 여 석을 모두 물에 빠뜨렸습니다. 이로써 부모 처자가 하늘을 부르며 통곡했습니다.”

결국 사고가 난 배는 자질이 부족한 선장이 날씨를 제대로 파악하지도 않은채 운항을 강행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과적이 사고의 큰 원인이었음을 알려주고 있다. 그럼에도 태종은 신하들에게 책임을 돌리고 ‘깨알지시’를 내리는 대신 ‘내탓이오’를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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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령 카나리아 제도에 날라든 메뚜기 떼. 1억 마리의 메뚜기가 서아프리카 대륙에서 넘어왔단다.


■천재지변까지 책임진 군주

사실 조선시대 조운선이나 6년 전의 세월호는 전형적인 인재(人災)여서 국정의 최고책임자인 국왕이나 황제가 ‘당신 탓’이라고 비판할 수는 있겠다. 그러나 천재지변까지 어떻게 책임지란 말인가.

하지만 왕조시대의 왕은 특별한 존재다. 한자인 ‘왕(王)’ 자를 뜯어보면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사람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자리가 아니라 하늘과 땅을 소통시켜서 백성들을 먹고 살게 하는 것이다. 조선조 세종대왕이 이런 말을 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며 먹는 것을 하늘처럼 우러러 보는 사람들(民惟邦本 食爲民天)이다. 만약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어죽는 자가 있다면 군주의 책임이다….”(<세종실록>)

그렇다면 백성을 굶주리게 하고 어렵게 하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었다. 오죽하면 <순자> ‘왕제(王制)’는 “물은 배를 띄울 수도 있지만 배를 뒤집을 수도 있다(水則載舟 水則覆舟)”고 했을까.

순자가 말한 물(水)은 백성, 즉 민심을 말하고, 배(舟)는 군주를 말한다. 민심을 잃은 군주는 언제든 민심에 의해 뒤집힌다는 얘기다. 좀 극단적인 사례지만 <삼국지> ‘위서 동이전’은 “부여에서는 기상이변으로 오곡이 영글지 않으면 국왕을 바꾸거나 죽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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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시대엔 메뚜기(황충) 떼가 습격하면 ‘임금의 부덕’ 때문이라고 자책했다.


그래서 중국 뿐 아니라 조선의 군주들도 나라에 큰 일이 일어나면 “모두가 내 책임”이라고 자책하면서 여러 가지 대책을 세운 것이다. 때로는 인간 제사의 희생물을 자처한 적도 있다. 땅과 사람, 하늘을 소통시키는 군주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백성들을 편안하게 만들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작금의 코로나 19 사태와 함께 새삼 메뚜기를 삼킨 당 태종, 제단의 희생양을 자처한 상 탕왕과 송 태종, 조선의 태종 임금을 떠올린다. 지금 코로나 19의 진원지인 중국의 최고지도자 시진핑(習近平) 주석의 행보가 도마 위에 올랐다. 다른 지도자들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인 재난과 맞닥뜨린 각국 최고지도자들은 과연 어떤 행보를 보이고 있는가.

이기환 선임기자 lkh@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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