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선택적이다. 설 연휴, 가수 이정현이 TV 오락프로그램에 나왔다. 거리에서 만난 팬은 그의 대표곡을 기억해내며 반가워했다. 그녀의 대표곡 <바꿔>는 2000년 낙천·낙선운동을 벌인 총선시민연대의 공식 캠페인 노래였다. 당시 작곡자로부터 저작권을 위임받은 대중음악작가연대는 총선시민연대가 두 차례에 걸쳐 선정한 114명의 공천반대인사들은 이 노래를 선거로고송으로 사용하지 못하도록 했다. 반면 총선시민연대 측은 저작권료 지급 없이 이 노래를 캠페인송으로 쓸 수 있었다.
68% 목표달성 전폭 지지받은 낙선운동
2000년 1월 12일. <총선시민연대 백서>가 기록하고 있는 ‘2000년 총선시민연대’ 발족일이다. 전국 412개 단체가 참여했다. 꼼꼼히 준비했다. 전년 12월 정치인조사팀이 만들어져 기초자료를 시작했고, 공천반대자 기준에 대한 여론조사를 1월 9일 실시했다. 발족식 날 발표한 것은 반대자 선정기준이었다. 사흘 뒤, 상임집행위원들이 총 95명의 예비명단을 선정했다. 제보와 소명, 선정 세부기준 검토 등의 과정을 거친 뒤 최종 발표된 공천반대인사는 67명.
2000년 4월 4일, 당시 총선시민연대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은 박원순 변호사(오른쪽 두 번째)와 김기식 사무처장(오른쪽 세 번째)이 강동을 지역구에서 낙선대상으로 선정된 김중위 당시 한나라당 후보 낙선운동을 벌이고 있다. / 서성일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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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별 명단을 보면 당시 한나라당이 30명, 새천년민주당 16명, 자민련이 16명, 무소속이 5명이었다. 정치적 고려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낙천운동의 대상이 현재 자유한국당의 전신인 한나라당에 집중되었을 것이라는 ‘기억’과 달리 당시 공동정권을 구성하고 있던 DJP연합, 즉 여권 낙천대상자가 32명으로 더 많았다. 공천반대가 몸풀기였다면 본게임은 낙선운동이다. 4월 3일, 총선 10일을 앞두고 낙선대상자 명단이 발표됐다. 총 86명. 이 가운데 민주당 16명, 한나라 28명, 자민련 18명, 기타 정당 11명이었다. 낙선대상 숫자가 많아진 것은 무소속(13명)이 늘었기 때문이다.
결과는? 이중 59명이 낙선했다. 선거를 앞두고 총선시민연대는 22개 집중낙선지역을 선정해 운동을 벌였는데, 이중 15명이 낙선했다. 각각 68.6%, 68.2%의 목표달성률을 기록했다. 특히 수도권 출마자의 경우 95%가 낙선했다. 이 정도면 대성공이다.
올해는 이 운동이 벌어진 지 2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현재까지 기념하는 행사나 모임 같은 것이 열리거나 준비되지 않고 있다. 왜일까.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하다못해 같이했던 사람들끼리 모여 술 한잔하는 자리라도 있을 만한데….”
2000년 당시 총선시민연대에서 공보실장을 맡았던 김타균 수원시 홍보기획관의 얘기다. 환경단체 녹색연합에서 일하던 그는 염태영 현 경기 수원시장을 따라 공직으로 자리를 옮긴 인물이다. 3선 시장이니 그도 공직 경력이 벌써 10년은 넘었다. “당시 시민의식은 높았지만 지금처럼 소셜미디어(SNS)가 발달하거나 커뮤니티가 활성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시민의 입장을 대변해 국회를 감시하는 기능은 상당히 약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의사나 이해를 대변한 총선시민연대 활동에 폭발적인 응원과 열정적인 참여가 있었던 것 아닐까요.” 김 기획관이 풀이하는 ‘당시 총선시민연대의 활동이 국민적인 주목과 지지를 받은 이유’다. 발족 20주년 행사 같은 것이 없었던 이유는 “다들 이제 각자의 위치에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덧붙였다.
백서에 실린 조직표를 보면 익숙한 이름들이 나온다. 상임집행위원장을 맡은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은 2011년 10월 재·보궐선거에서 서울시장에 당선된 이후 현재까지 그 자리를 맡고 있다. 역시 상임집행위원이던 여성단체연합 남인순 총장은 국회의원이 되었고, 집행위원이자 총선시민연대 공동사무처장을 맡았던 김기식 전 의원은 국회의원·금감원장을 역임한 뒤 싱크탱크 더미래연구소의 정책위원장을 맡고 있다. 집행위원이었던 하승창 당시 함께하는 시민행동 사무처장은 문재인 정부 들어 청와대 사회혁신수석을 역임한 뒤 총선에서 민주당 예비후보로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이밖에 정책자문단장을 했던 조희연 성공회대 교수는 서울시 교육감으로, 당시 공동대변인이었던 정대화 교수는 2018년 12월부터 상지대 총장을 각각 맡고 있다. 이른바 성추행 논란으로 시민운동을 떠난 장원 당시 대변인은 2000년대 중반 경남 함양으로 내려가 녹색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최근에는 같은 지역에서 다볕자연학교라는 대안교육기관을 운영하고 있다.
2000년 이후 총선연대활동, 지금은?
2000년 활동이 던진 파장이 워낙 크다 보니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지만 2004년과 2012년, 2016년에도 총선시민연대 또는 총선시민네트워크라는 이름으로 전국·부문이 결집해 총선 공천반대·낙선운동이 벌어졌다. 2004년 총선시민연대활동에서 100인 유권자낙천낙선선정위원회에 위원으로 참여한 백찬홍 에코피스아시아 운영위원장은 “2004년까지만 하더라도 2000년 결집된 정치개혁의 열기가 식지 않은 때였고, 물갈이 여론과 시민사회의 영향력이 클 때였다”며 “2004년의 경우 특이하게 탄핵정국과 맞아떨어지면서 탄핵에 찬성한 국회에 대한 분노와 맞아떨어지며 성과를 낼 수 있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2008년 총선 때는 별다른 대응이 없었다. 총선시민연대는 주로 진보성향 시민사회단체들을 중심으로 결집했는데, 2008년 총선은 보수(이명박 정부)로 바뀐 첫해에 치러진 국회의원 선거였기 때문이다. 총선 직후인 4월 말부터 미국산 쇠고기 반대 촛불시위가 시작됐지만, 그 전까지 전국적으로 결집해 정치개혁을 주장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후 2012년과 2016년에도 낙천·낙선운동은 진행되었지만 딱히 ‘선거결과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라고 평가할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백 운영위원장은 “그 뒤 보수단체들도 벤치마킹해 자신들의 이념기준으로 낙천·낙선명단을 발표했고, 초기 대표하던 인물들이 활동영역을 옮기면서 시민사회 영향력도 떨어진 것은 사실”이라고 덧붙였다.
시민사회의 낙천·낙선운동은 역사적 시효를 다한 것일까. 김타균 기획관은 “걸어왔던 길을 보면 현재와 앞으로 갈 길이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당시 씨를 뿌린 참여정치 문화가 20년이 지난 지금 18세 투표권으로 발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지금도 SNS나 유튜브 등에서 자기 의견을 개진하는 형태의 정치참여뿐 아니라 광장에서도 목소리가 나오고 있는데, 이것이 맨 마지막엔 정치개혁 목소리로 이어질 가능성이 있다”고 덧붙였다. 시효를 다한 것이 아니라 형태와 방법을 달리해 정치개혁·참여 흐름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는 시각이다.
정용인 기자 inqbus@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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