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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세월호 인양 그 후는

[커버스토리]“내가 있는 현장에서 세월호 참사 같은 일이 일어날까 두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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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왕국의 내부고발자’로 산 2년 … 배우 허정도 인터뷰

경향신문

배우 허정도씨는 매일 아침 명상을 하고 한 시간씩 집 근처에 있는 북한산길을 걷는다. 교회나 절에 나가진 않지만, “지혜와 용기를 달라”고 기도한다. 지난해 말엔 태국의 플럼빌리지(틱낫한 스님이 만든 수행공동체)에도 다녀왔다. 명상과 기도, 산책은 지난 2년간 그를 지탱한 힘이다. 그는 “탄탄한 나무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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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만해도 되잖니? 들을 때마다 뭘 더 해야 할까? 늘 고민했다

“왜 그랬어요?”

배우 허정도씨(42·사진)는 지난 2년 동안 이 질문을 많이 들었다. 최근에는 “이제 그만해도 되지 않겠느냐?”라는 얘기도 듣는다. 질문이라기보다 걱정과 만류라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허씨 자신도 비슷한 질문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 “내가 또… 뭘 더 해야 할까?”

개성 있는 연기로 배우로서 탄탄한 인지도를 쌓아가던 허씨는 2018년 1월 블로그에 글을 한 편 올렸다. ‘만드는 이들도 행복한 드라마를 꿈꾸며’라는 제목의 글에서 그는 드라마 제작현장의 비인간적인 노동환경과 위험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돼 있는 아역 배우들의 현실에 대해 썼다. 2016년 이한빛 PD가 세상을 떠난 뒤 공론화되기 시작한 드라마 제작현장의 살인적인 노동인권 문제는 현역 배우인 허씨의 문제제기가 기폭제가 돼 현장에 변화를 가져왔다. 배우로서 일은 확 줄었다.

허씨는 지난 14일 국회에서 열린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 토론회’에 발제자로 참석했다. 그는 자신을 “우리가 다룰 문제들의 목격자이자 과거에는 방관자였다”고 소개했다. 이날 토론회에선 6~19세 연기자 103명에 대한 실태조사 결과가 발표됐다. 응답자의 36.89%가 “하루에 12~18시간 촬영을 경험”했고, 21.36%는 “18~24시간까지도 일했다”고 답했다. 촬영 전 화재사고 등에 대비한 안전교육을 받은 사람은 2.91%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런 실태조사는 한국 드라마 제작 역사상 처음이다. 이 조사를 시작하게 만든 것이 허씨다. 지난 2년여간 드라마 제작환경이 개선됐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어른들 중심이고 아이들은 가장 열악한 환경 속에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자각에서 시작됐다.

허씨의 제안이 씨앗이 돼 여러 시민단체와 공익 법무법인, 노동조합 등이 모여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단체 ‘팝업(Pop-UP)’이 결성됐다. 팝업은 ‘프로텍트 101’이라는 소셜펀딩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을 위한 입법 활동을 펼치고 있다.

2년 동안 ‘드라마왕국의 내부고발자’로 산 허씨는 자신의 이름이 사회·정치 뉴스에 나오는 것이 부담스럽다고 했다. 인터뷰도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끊임없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아이들한테 왜 그랬을까요? 보고도 모른 체하는 것은 안되지 않나요? 아무리 위대한 작품이라도 누군가의 고통을 바탕으로 만들어선 안되는 것 아닐까요?” 지난 21일 서울 북한산길에서 허씨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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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허정도씨는 ‘왜 아이들 문제를 이야기하는가’라는 질문에 “제 주변에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 중에 어린시절에 제대로 보호받지 못한 경우가 많다”며 “아역배우 출신 성인배우들도 어렸을 때 현장에서 겪은 상처를 잊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이준헌 기자 ifwedont@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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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활동이 아니라 노동인권 문제로 인터뷰를 하는 게 어색하진 않나요.

“많이 조심스럽죠. 사실 국회 토론회 끝나고 며칠 아팠어요. 몸살이 잘 안 나는 편인데. 짧은 시간 안에 글도 쓰고(그는 지난 2일 블로그에 ‘더 이상 아이들에게 미안해하지 않기 위해’라는 제목의 글을 썼다) 토론회 준비도 하다 보니까요. 제 일자리가 줄어드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물론 있고, 제가 아이들 인권에 대해 대단한 감수성을 가지고 살아온 것은 아니어서 과연 이렇게 나서서 문제제기를 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도 들었어요.”

- 망설였다고 하기엔 꾸준히 관련 활동을 했던데요.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에서 아동·청소년 연기자들에 대한 실태조사를 시작하게 된 것도 허정도씨 때문이라고 하던데요.

“아…네. 지난 2년여간 스태프 노조도 생기고 변화들이 일어나긴 했는데 아이들은 그대로더라고요. 아이들은 노조도 없고… 모든 약자들이 그렇잖아요. 정치에서도 정책에서도 소외되고. 아이들이 목소리를 내기 힘들면 어른들이 물어봐줘야 하는데 그렇지 않으니까 아무 변화가 없는 거예요. 사실 제가 먼저 가슴 아프게 생각했던 건 드라마 제작현장의 아이들이었거든요.”

2017년 여름 장편드라마를 끝낸 그는 프랑스의 한 수도원에 머물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으며 자신을 지속적으로 괴롭히던 문제에 대해 생각했다. 드라마 현장에서 어떤 보호도 받지 못하고 방치당하는 아역배우들의 문제를 모른 척한 스스로를 자책하다 2018년 1월 공개 글을 썼다.

- 지금도 생각나는 장면들이 있나요.

“많죠. 한겨울 산속에서 아침부터 종일 촬영을 하는데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한 아이가 내내 울었어요. 어른들도 정말 추운 날씨였는데, 보조출연자이다 보니 의상도 얇았고 옆에서 방한복을 들어주는 매니저도 없었어요. 슬픈 장면이어서 우는 게 이상하지 않았지만, 그때 옆에 있던 사람들은 알았죠. 저 아이가 연기를 하는 게 아니라 너무 춥고 괴로워서 울고 있다는 걸요. 화학물질 냄새와 먼지가 가득한 실내 세트장에서 엄마 품에 안겨있던 아이의 모습도 생각나고요. 너무 많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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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조도 생기고 변화했지만

안전교육 받은 아이들 딱 3명

열악한 환경 방치는 그대로

어른들이 물어봐줘야 하는데

듣던 말은 ‘문제 일으키지 마’

‘부름’ 받아야 하는 배우니까

눈 밖에 날까 불안도 했지만

침묵의 불편·죄책감 더 컸다


- 촬영 현장에서 문제제기를 하긴 힘든 분위기인가요.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배우는 작품마다 ‘부름’을 받아야 일을 할 수 있잖아요. 이 바닥이 워낙 좁으니까요. 제작진의 눈 밖에 나면 바로 생계와 연관이 되죠. 저만 해도 일이 확 줄었잖아요. 저처럼 혼자 먹고살면 다행인데, 생계를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다면… 못하죠. 어렵죠. 더구나 아이들은 소위 ‘짬’에서 밀리잖아요. 배우들이 현장에서 문제제기를 한다? 편성을 좌지우지하는 톱스타급이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죠. 저도 처음에 드라마업계에 들어왔을 때 선배들이 가장 많이 해준 말이 ‘싸우지 마라’ ‘문제를 일으키지 마라’였어요. 저도 침묵한 게 많았는데, 그게 켜켜이 쌓여갔죠.”

- 본인도 노동자이자 배우인데, 이런 활동을 하기 전에 근로기준법이나 산업안전보건법 조항을 찾아본 적이 있었나요.

“없죠.(웃음) 글쓰려고 처음 찾아봤어요. 근로기준법 특례조항에 ‘연장근로할 때는 노동자 대표랑 합의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어요. 제가 처음 글을 쓸 때까지만 해도 드라마업계에서 그걸 알거나 얘기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어요. ‘오늘 몇 시까지 찍겠다’ 이런 설명도 들은 적이 없었고요. 법에는 있는데 현장엔 없었던 거죠. 대한민국 일하는 곳 어디는 안 그러느냐, 하실 수도 있지만, 그렇기 때문에 ‘나도 참아야 한다’가 아니라 그렇기 때문에 내가 있는 현장이라도 바꿔야 하는 거죠. 게다가 우리 현장엔 아이들도 있잖아요.”

- 문제제기 후, 사회적으로 주목을 많이 받았습니다.

“네. 신문에 글도 쓰고 시사프로그램에 인터뷰도 했어요. 정부에 계신 분들도 만났고요. 기고, 토론회 참여 등 모든 제안을 다 받아들일 순 없었지만 적어도 꼭 제가 해야 된다 싶은 일은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 실제로 일이 줄었나요.

“그렇죠.(웃음) 글쓰기 전에는 쉴 때가 됐는데 일은 계속 들어오고 저도 자꾸 혹하고 그래서 (일을 안 하려고) 삭발까지 했었는데… 그 일 이후엔 확 줄었죠. 저는 몰랐지만 나중에 제가 했던 문제제기로 인해 캐스팅이 무산됐다는 얘기도 여러 번 들었어요. 그래도 소수지만 오히려 저를 더 캐스팅하려는 분들도 있었어요. 그동안 뜸했던 연극과 독립영화를 다시 하게 된 건 제가 바랐던 균형이기도 했어요. 그게 이런 식으로 이뤄질지는 몰랐지만요.(웃음)

- ‘내부고발자’ 역할을 한 건데 후회하진 않았나요. 그때 글을 쓰지 않았다면 지금쯤 배우로서 더 승승장구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게 더 자연스러운 일 같습니다.

“(그는 이 질문에 대해 여러 차례에 걸쳐 고심해서 답했다) 후회라기보다는 그냥 힘든 거죠. 불안하니까요. TV에서 드라마를 보면… 그때 내가 나서지 않았더라면 지금쯤 저 역할을 내가 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적어도 다음 작품 걱정은 안 하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고요. 지금처럼 드라마 제안을 받은 지 5개월이 넘어가는 시점이 되면 더 그렇긴 해요.”

- 그런데도 계속 활동을 하시는 이유는 뭔가요.

“음… 저는 사실 세월호 참사 이후에 약간 공포가 생겼어요. 제가 있는 현장에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요. 장시간 노동과 폭언 못지않게 제작환경이 정말 열악하고 안전하지 않은 것도 문제거든요. 위험요소는 많은데 산업안전보건법이 지켜지지 않고 있어서 화재나 안전사고에 대한 대비가 매우 허술합니다. 실제로 스태프들이 죽거나 다친 경우가 꾸준히 있었고 최근에도 큰 사고가 있었어요. 그런데 아이들이 있는 상황에서 그런 사고가 일어나면 잘 대처할 수 있을까요. 아마 그 친구들이 탈출하기가 가장 어렵겠죠. 권한이 주어진 적 없는 아이들이 늘 제일 먼저 다치잖아요. 이번 실태조사에서 안전교육을 받은 적이 있다고 답한 아이들이 103명 중 딱 3명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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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태프들 반복되는 사고들

그걸 허락한 노동환경 문제

약자 보호 시스템 만들어야

근로기준법 준수·성인지교육

2년의 작은 변화 그나마 다행

계속 묻겠다 “아이들한테 왜”


그는 최근 쓴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현장의 아이들은 배고프고 힘들고 몸이 아파도, 심지어는 폭언과 모욕적인 대우를 당하고서도 아무 말을 못합니다. 티를 냈다간 다음 기회가 없다는 것을 어른들로부터 철저히 배워왔기 때문입니다. ‘말 잘 듣고 힘든 티 안 내는 아이들 있습니다’ 하며 무슨 물건 팔 듯 광고를 하던 한 에이전시 업자의 홍보문구를 저는 잊을 수가 없습니다.”

- 그런 생각만으로 현실적인 불이익을 감수하고 나서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많이 흔들릴 것 같습니다.

“저… 흔들림 그 자체입니다(웃음). 제 마음 편하자고 그런 거예요. 얘기를 함으로써 생기는 불편함과 침묵함으로 인해 생기는 불편함 중에… 침묵으로 생기는 상처와 고통, 죄책감이 더 큰 거죠. 후회는 없어요. 아마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어차피 또 그럴 걸 아니까요. 이것이 새로운 길의 시작일 수 있다고 ‘마음작업’을 하는 거죠. 어차피 이런 불안과 마음작업은 쭈욱 반복되는 거니까요.”

- 실례지만 생계 문제를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불안하긴 하지만 신기하게도 ‘다음달에 어떡하지’ 할 때쯤 일이 들어왔어요. 그리고… 제가 글쓰면서 소속사를 나왔거든요. 좋은 소속사여서 글을 써도 된다고 했고 계속 일하자고 해줬는데, 제가 신경 쓰이는 게 싫어서 나왔어요. 제가 다작을 못하는 편이라 소속사에도 피해가 가는 것 같기도 하고요. 수입을 나누지 않으니까 좀 나아진 면도 있어요(그는 매니저 없이 혼자 일한다). 다행히 예전과 비교했을 때 아주 큰 차이는 없습니다.”

- 글쓴 이후에 드라마 <시간>(2018년 7월 방영), <신입사관 구해령>(2019년 7월 방영)에 출연했죠. 출연 제안을 받았을 때 어땠나요.

“너무 기뻤죠. 저를 쓰는 게 쉽지 않은 결정일 수 있는데 불러줬다는 게 너무 고마웠어요. (그 드라마들을 찍을 때 작업환경은 괜찮았나요?) 네. 연출자들이 다 그 부분에 대해 신경을 많이 썼어요. <시간>을 찍을 때는 조연출 맡은 분이 계속 ‘빨리빨리 나오세요’라는 말을 하더라고요. 노동시간 준수해야 되니까 빨리 찍어야 된다고요. <신입사관 구해령> 때도 노동시간 때문에 그날 분량을 다 못 찍고 접은 경우가 많았고요. 제가 촬영 전에 대중문화예술산업법에 있는 아동·청소년 노동시간을 지켜달라고 제안했는데 두 현장 다 받아주셨어요. 행복하게 촬영했죠.”

◆“대박났지만 노동환경 열악했던 작품들, 전 안 봐요…못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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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게 찍을 수도 있는데, 지금까지 잘 안됐던 이유는 뭘까요.

“제작비 문제도 있고, 예전에는 시청자들의 반응을 봐가면서 드라마 내용을 고치며 했었거든요. 그러려면 일주일에 2회분을 촬영해야 하는데 말이 안되는 거죠. 다들 잠을 잘 못 자니까 예민해지고 거칠어져요. 현장에선 악인인데 밖에서 만나면 호인인 분도 많이 봤어요. 가장 큰 원인은 시스템이 그것을 허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된다고 하는 거죠. 제대로 된 법이 없거나 법이 있어도 관리감독이 없었죠. 드라마 제작현장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여러 약자들이 계속 어려움을 겪는 이유도 그렇잖아요. 결국 법과 제도가 그걸 허락하니까 가능한 일이잖아요. 나쁜 일들이 반복돼도 처벌도 제대로 되지 않죠. 그래서 이런 문제는 개인의 선의에 기댈 것이 아니라 약자를 보호하기 위한 보다 견고한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사건·사고는 매년 발생하고 있다. 2017년 12월 드라마 <화유기> 촬영 중 소품 담당 스태프가 세트장에 샹들리에를 매달다가 천장이 무너지면서 추락해 하반신이 마비되는 중상을 입었다. 제작사는 벌금 300만원을 선고받았다. 넷플릭스 드라마 <킹덤>은 제작 기간 중 두 명의 스태프가 세상을 떠났다. 2018년 시즌1 제작 당시 미술 스태프가 귀가 중 어지러움을 호소하며 쓰러진 뒤 사망했고, 2019년 시즌2 제작 과정에서 한 막내스태프가 촬영장으로 소품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2월 방영 예정인 <본 대로 말하라>도 지난해 12월 추격 장면을 촬영하는 과정에서 충돌사고가 발생해 스태프 8명이 다쳤다. 부상자 중 한 명은 척추뼈가 골절돼 수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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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과정을 잘 아니까, 드라마를 보는 마음이 편하지만은 않을 것 같네요.

“아무래도 그렇죠. 소위 ‘인생드라마’라고 하는 작품들 중에 노동환경이 안 좋았던 작품도 많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저는 안 봐요. 못 봐요. (나쁜 사람이 만들었는데 결과물은 걸작이라는 평가를 받는 예술작품들도 많은데요) 그렇게 만들어진 예술이 우리에게 필요할까요? 결국 인간이 행복하자고 예술을 하는 건데 그 과정에서 불행을 낳으면 안되잖아요. 솔직히 예술작품은 없어도 살지만, 가혹한 노동환경과 인격모욕은 그 사람의 삶을 통째로 무너뜨리는 거예요.”

- 2년여 동안 조금씩이라도 제작현장이 변해가는 것을 보며 뿌듯했나요.

“뿌듯함은 당연히 있지만 아주 엄청난 희열과 기쁨을 느끼진 않아요. 그냥 다행이다 정도죠. 제가 갔던 현장에선 정말 노력을 많이 하시는 것을 봤어요. 얼마 전에 만난 한 후배도 ‘형, 한 2년 사이에 이렇게 된 거잖아요’라며 놀라워하더라고요.”

- 다음 작품 계획이 있나요.

“없습니다(웃음). 배우는 참 좋은 직업이에요. 돈을 벌 확률이 매우 낮다는 것 빼고는요. 작품을 안 하면 그냥 휴가잖아요. 그게 길어지면 실업자가 되는 거고요. 행복하려고 사는 거니까, 일이 완전히 끊기거나 배우가 온전히 재미없으면 다른 걸 해야겠죠. 일단 지금은 책을 쓰고 싶어요. 직업으로서의 배우 생활, 오디션, 소속사 문제, 마음의 병 등 거의 모든 배우들이 겪게 되는 고민에 대해서요. 함께 버텨나가기 위해서요. ‘돌아이 히어로물’도 한 편 써보고 싶어요. 제가 대학원에서 연기공부 때도 짧은 희곡을 쓴 적이 있거든요. ‘고도리 기다리며’라고.(웃음)”

-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했죠. 블로그에 쓴 글을 보면 늘 고민을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고민은 뭔가요.

“음… 덜 해로운 사람이 되고 싶다. 나쁘지 않은 어른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들을 많이 하죠. 철학은 지혜를 추구하는 학문이고 지혜의 시작은 결국 나를 돌아보는 것이잖아요. ‘꼰대’가 되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구나 싶어요. 정말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는 일이라는 걸 알겠어요. 예전에는 좋은 어른이 되고 싶었는데요. 지금은 사과라도 잘하는 어른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아이들 1일 노동시간 제한 없는 대중문화예술산업법

응답자 58% “12시간 이상 촬영”…68% “야간 강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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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12월부터 2020년 1월까지 ‘카카오 같이가치’를 통해 진행된 펀딩캠페인 ‘프로텍트 101-국민 프로텍터가 되어주세요’.


|6~19세 배우 103명 노동인권 실태조사

배우 양동근씨(41)는 2015년 한 TV프로그램에서 아역배우 시절 겪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장면에서 눈물이 나오지 않자, “감독이 ‘울어!’라고 소리쳤고, 심지어 담배 연기를 눈에 갖다 대기도 했다”고 말했다. 여덟 살 때부터 배우로 활동한 양씨는 30년 가까운 시간이 지나서야 이런 사실을 털어놓았다.

방송 제작현장에서 아역·청소년 배우들의 노동·인권 환경은 그때보다 얼마나 나아졌을까. 연대모임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개선을 위한 팝업(Pop-Up·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 만드는 법, 문화연대, 민주사회를위한변호사모임 아동인권위원회, 민주언론시민연합, 언론개혁시민연대, 정치하는엄마들, 청소년노동인권 노랑, 한국방송연기자노동조합,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이 2019년 5월13일~6월30일 실시한 실태조사(6~19세 배우, 응답자 103명)를 보면 상황이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관련법에는 처벌규정도 없고, ‘합의에 따라 가능하다’는 조항이 있어 실효성은 떨어진다. ‘팝업’은 실태조사 결과를 토대로 올해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을 위한 입법 운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 ‘현장 블랙리스트’가 무서운 아이들

실태조사를 보면 ‘1일 최장 촬영시간’을 묻는 질문에 응답자의 36.89%가 “12시간 이상~18시간 미만”이라고 답했다. “18시간 이상~24시간 미만”이라고 답한 응답자도 21.36%나 됐다. “야간 촬영에 참여해봤다”는 응답자는 67.96%였고, 야간 촬영 당시 “특별한 동의를 구하지 않았다”는 응답은 54.29%로 과반을 넘었다. “무더위, 강추위, 미세먼지 등 악천후에도 촬영했다”는 답변은 67.96%, 당시 “아무런 준비 없이 촬영이 강행됐다”는 응답은 55.71%로 조사됐다. 응답자 중 69.90%는 “촬영기간 동안 수면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낀다”고 했지만, 이들 중 55.55%는 “(수면이 부족해도) 그냥 참는다”고 답했다.

“무더위·강추위에도 촬영” 68%

10명 중 7명은 수면 부족 느껴

주연·조연·단역 따라 차별도

부모들, 아이 데려오고 싶어도

현장 ‘블랙리스트’ 오를까 걱정


법엔 15세 미만 1주일 35시간

당사자 합의 따라 연장 가능하고

처벌조항도 없어 ‘있으나 마나’


영국처럼 ‘현장 보호관’ 의무화

연습·리허설 시간 등 기록하며

식사·휴식 적절한지 관리해야


심층면접 조사 결과를 보면 아동·청소년 배우들이 출연 비중에 따라 차별을 받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다. ‘주연’ ‘조연’ ‘단역’ ‘보조출연’ 등 ‘급’에 따라 현장에서 대우가 달라진다. 촬영 대기 장소와 물, 식음료 등의 제공도 다르다. 아역배우 ㄱ씨가 경험한 현장에선 “단역부터 식사제공이 된다”고 했다. 식사가 제공된다고 해도 주·조연 배우들이 먼저 먹고 나면 나머지를 단역·보조 출연 배우들이 먹는 경우도 있다는 증언도 나왔다. 드라마 제작현장에서 일상적으로 차별과 인권침해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팝업 측은 “심층면접에서 대상자들은 공통적으로 ‘블랙리스트’의 존재에 대해 이야기했다”고 밝혔다. 아동·청소년배우 보호자 ㄴ씨는 “자정이 넘었는데도 (아이가) 돌아오지 않으니까, 엄마가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이 출동해서 촬영현장이 뒤집어졌는데, 감독이 열 받아서 ‘애 그렇게 연기시키고 싶어 안달이면서 12시 넘었다고 신고하냐. 그럼 공부시키면 되지’라고 했다고 한다. 그 얘기가 일파만파 퍼졌고, 다음부터 그 아역배우는 안 부른다. 그게 블랙리스트”라고 말했다. 팝업 측은 “블랙리스트는 문건으로 존재하기보다는 캐스팅디렉터나 보출(보조출연) 반장, 학원 관계자들이 캐스팅을 배제·제한하는 식으로 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아동·청소년 연기자들과 보호자들에게는 위축의 효과를 일으키는 실질적인 힘을 미치고 있다”고 밝혔다.

한 청소년 연기자 보호자 ㄹ씨는 “현장 상황을 알면 당장이라도 아이를 데려오고 싶은 부모들이 대부분이겠지만, 아이가 원하기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다”고 말했다. 아동·청소년 스스로가 불합리한 제작환경에 익숙해지면서, “성공하려면 참아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실태조사 결과 응답자의 54.37%가 “본인의 의지”로 연예활동을 시작했다고 답했다.

한빛미디어노동인권센터의 진재연 사무국장은 “어른이든, 아동·청소년이든 대중문화예술 제작현장에서 ‘빨리 유명해져야 한다’ ‘사회적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불합리한 일을 겪어도) 쉬쉬하고 감내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며 “사회적 인정이라는 기준에 인권이라는 고려가 없다”고 말했다. 진 사무국장은 “건강하고 안전하게 일하는 것이 ‘기본권’이라는 것에 대한 공감대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 국민프로텍터가 되어주세요

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22조는 “15세 미만의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이 용역을 제공하는 시간은 1주일에 35시간을 초과하지 못한다(15세 이상은 40시간)”라고 명시하고 있다. 그러나 하루 노동시간은 제한이 없다. “대중문화예술제작업자는 오후 10시부터 오전 6시까지의 시간에 15세 미만의 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으로부터 대중문화예술용역을 제공받을 수 없다”는 조항도 있다. 이 조항들 뒤에는 “친권자 또는 후견인의 동의를 받아” “당사자 합의에 따라” 연장할 수 있다는 조항이 첨가돼 있다. 처벌조항도 없다. 울타리는 있지만, 넘어가도 상관없는 울타리인 셈이다. 지난 연말 자정 넘은 시간까지 진행된 방송사들의 시상식에선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과 연예인의 미성년 자녀들이 늦게까지 촬영에 참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공익인권변호사모임 희망을만드는법의 김두나 변호사는 ‘아동·청소년대중문화예술인 노동인권 관련 법제의 현황과 개선방안(국회 토론회 발제문, 1월14일)’에서 “장시간 강도 높은 촬영이 이어지는 현장에서 당사자들이 야간 촬영을 거부하기 어렵고, 이후 다른 기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이나 친권자가 이에 대해 문제제기하기 어렵다는 점에 비춰볼 때 당사자 동의조항 역시 실효성이 크지 않다”고 밝혔다.

팝업은 순위조작과 노동착취, 인권침해로 물의를 빚은 오디션프로그램 <프로듀스 101>을 패러디한 ‘프로텍트 101, 아동·청소년 연예인의 국민프로텍터가 되어주세요’ 캠페인을 진행했다. 2019년 12월10일부터 2020년 1월15일까지 진행된 이 캠페인에는 5570명이 ‘기부’에 참여했고, 800만원이 모였다.

팝업은 6가지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 개정안을 제시했다. 첫째,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건강권 보장을 위해 건강검사 및 심리상담, 심리치료 의무화. 둘째,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대중문화예술용역제공시간 제한 및 야간 용역제공 제한. 셋째,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학습권 보장을 위한 결석일수 제한, 학교 수업 불참 강요 및 중도자퇴 강요 금지. 넷째,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에 대한 다이어트 및 성형수술 강요, 폭언·폭행·성희롱 행위, 악천후 등으로 인해 보건상·안전상 위험의 우려가 있는 경우인데도 대중문화예술용역을 제공하게 하는 등의 권익침해 행위 금지. 다섯째,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재산권 보장을 위한 신탁제도 도입. 여섯째,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의 인권보장을 위한 아동인권보호관제도 도입과 아동·청소년들의 건강권, 학습권, 재산권을 실질적으로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가장 효과적인 방안으로는 제작현장의 ‘아동인권보호관’ 의무화가 제시됐다. 이 방안은 영국의 ‘샤프롱(chaperon)’제도를 벤치마킹한 것이다. 영국의 경우 샤프롱이 항상 아동·청소년 연기자를 책임지고 관리하도록 되어 있다. 샤프롱은 아동·청소년의 연습 시간, 리허설 시간, 공연 시간 등을 기록하며 식사와 휴식을 위해 적절히 시간을 보내는지 관리한다. 국내 공연계에서는 외국 라이선스 뮤지컬 제작을 계기로 6년 전부터 샤프롱제도가 도입돼 시행되고 있다. 미국(캘리포니아주 기준)의 경우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을 생후 15일~6개월 미만, 6개월~2세 미만, 2~6세 미만, 6~9세 미만, 9~16세 미만, 16~18세 미만 등으로 세분화해 각 연령대에 맞는 건강·학습·노동조건을 규정하고 있다. 현재 대중문화예술산업발전법에서는 용역 제공 시간을 15세 미만, 15세 이상으로만 구분하고 있다.


장은교 기자 indi@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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