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여성들의 목소리로 드러난 미투 사건에 대한 판결이 이어졌다. 미투 운동의 성과는 작지 않다. 권력형 성범죄에 대한 폭로와 처벌이 이어졌다. 어떤 판결은 미투 운동의 큰 전환점이 됐다. 가해자는 제대로 죄값을 치러야 한다는 메시지를 한국 사회에 남겼다.
여전히 진행 중인 사건도 있다. 모든 폭로가 재판에서 결실을 맺진 못했다. 어떤 판결은 미투 운동을 후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아직 법정 다툼을 이어가는 사건도 있다. 미투 운동으로 고발된 후 재판에 넘겨진 ‘그들’은 어떻게 됐을까. 지난 2년 동안 재판을 거친 주요 미투 사건을 정리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재량’이 된 ‘직권남용’…“다시 미투운동의 원점에 섰다”
‘서 검사의 가해자로 지목된 안태근 전 검사장에 대한 유죄 판결을 대법원은 지난 9일 파기환송됐다. 서 검사의 폭로는 법무부 검찰국장이던 안 전 검사장이 서 검사를 성추행한 사실을 덮기 위해 인사보복을 했다는 게 핵심이다. 1·2심은 안 전 검사장의 성추행과 인사보복이 있었다고 판단해 징역 2년을 선고했다. 대법원은 달랐다. 검사 인사의 ‘재량’을 이유로 직권남용죄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서울동부구치소에 수감됐던 안 전 검사장은 이날 판결에 따라 풀려났다.
서 검사는 대법원 판결 직후 자신의 페이스북에 “직권남용죄의 ‘직권’에 ‘재량’을 넓혀 ‘남용’을 매우 협소하게 판단했는데 납득이 어렵다”면서도 “검찰개혁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고, 성폭력이 피해자의 잘못이 아니라는 인식이 퍼져가고 있으니 이겨가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항소심 이후 “역사적 판결”이라고 환영했던 여성단체는 “미투 운동의 원점에 섰다”며 대법원 결정을 비판했다.
‘비서 성폭행’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항소심에서 3년 6개월 실형을 선고 받은 1일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호송차로 이동하고 있다. / 우철훈 선임기자 photowoo@kyunghyang.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보통의 김지은들이 이뤄낸 승리”
대법원은 지난 9월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 수행 비서 김지은씨를 성폭행한 안희정 전 충남지사에게 징역 3년 6개월형을 확정했다. 김씨가 언론에 피해 사실을 폭로한 뒤 1년6개월 만에 나온 법원의 최종 결론이다. 대선 후보자로 거론되던 정치인의 위력을 이용한 ‘권력형 성폭력’이 범죄로 인정됐다.
안 전 지사 사건은 1·2심 판결이 엇갈렸다. 1심 재판부는 ‘피해자다움’을 이유로 김씨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지 않았고, 안 전 지사에 무죄를 선고했다. 2심은 “성인지 감수성을 잃지 않도록 유의해야 한다”며 김씨 진술을 인정했다. ‘피해자다움’을 부정하며 권력관계를 이용한 성폭력을 범죄로 인정했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판결이 됐다.
김씨는 대법원 판결 확정 후 “이제는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다. 2차 가해로 거리에 나뒹구는 온갖 거짓들을 정리하고 평범한 노동자의 삶으로 정말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여성단체들은 “‘보통의 김지은들’이 만들어낸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했다.
연극계 성폭행 파문을 일으킨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열린 기자회견에서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을 하고 있다./이상훈 선임기자 doolee@kyunghyang.com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연극계 미투 1호, 미투 운동 후 첫 실형
극단 단원들에게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가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이윤택 전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지난해 4월 2심에서 징역 7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이 감독은 2018년 9월 1심에서 징역 6년을 선고받으며 미투 운동 이후 실형을 확정받은 첫번째 사례가 됐다.
이씨는 여성 연극인 10명에게 25차례에 걸쳐 안마를 시키거나 연기지도라며 성추행을 한 혐의로 기소됐다. 2심에선 ‘업무상 위력 추행’ 혐의가 인정되며 형량이 1년 늘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연희단거리패 단원이 아닌 ㄱ씨에 대해서도 “단순 외부 조력자가 아닌 밀양연극촌 일원으로 안무 업무를 담당했다”며 이 감독의 업무상 위력 행사 가능 범위를 넓게 해석했다.
이윤택 성폭력 사건 공동대책위원회는 선고 직후 “사법부의 올바른 판결을 통해서 연극계에서 ‘오랜 관행’으로 자리잡았던 것이 성폭력임이 분명해졌다”며 “피고인 이윤택은 연기지도를 핑계 삼아 성폭력 가해를 정당화하려했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길 바란다”고 했다.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온 힘 쏟아 굴린 작은 바퀴…문단 권력의 ‘대시인’을 멈추다
성추행 의혹을 폭로한 최영미 시인을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낸 고은 시인이 지난 11월 2심에서 패소했다. 고 시인이 1992년 겨울에서 1994년 봄 사이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근처 술집에서 성추행 등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는 최 시인의 의혹제기가 허위인지 여부가 재판의 쟁점이었다. 2심 재판부는 1심 재판부와 마찬가지로 최영미 시인이 제기한 성추행 의혹이 허위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고 시인은 2심 패소 후 대법원 상고를 포기했다.
최 시인은 2017년 12월 계간지 ‘황해문화’에 시 ‘괴물’을 썼다. “En선생 옆에 앉지 말라고/ 문단 초년생인 내게 K시인이 충고했다/ 젊은 여자만 보면 만지거든”라고 적었다. 고 시인이 상고 포기가 확정된 후 최 시인은 자신의 트위터에 “나는 작은 바퀴 하나를 굴렸을 뿐. 그 바퀴 굴리는데 나의 온 힘을 쏟았다”라고 썼다.
최 시인은 최근 경향신문 인터뷰에서 “미투는 남성과 여성의 싸움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의 싸움이다. 과거의 나쁜 관행, 권력남용, 잘못된 가치관과의 결별을 의미한다”며 “이번에 승소하고 기뻤던 것도, 피해자의 입을 닫게 하려는 흐름에 제동을 걸 수 있게 돼서다”라고 말했다.
■“어린 선수들은 더 나은 환경에서 살길”
‘스포츠계 미투’도 재판을 거쳤다. 유도선수 신유용씨를 성폭행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진 전 유도부 코치 ㄱ씨는 지난 7월 징역 6년을 선고받았다. ㄱ씨는 2011년 7월 전지훈련 숙소에서 당시 만 16살이던 신씨에게 강제로 입을 맞추고, 2011년 8~9월 신씨를 자신의 숙소에서 성폭행한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신씨는 지난해 1월 ㄱ씨로부터 5년간 성폭행 당했다는 사실을 폭로했다. 유망한 유도선수였던 신씨는 성폭행 사실을 숨기는 것만이 자신의 선수 인생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결국 소문이 퍼질 거란 생각에 부상을 핑계로 운동을 접었다. 신씨는 심석희 쇼트트랙 선수가 스포츠계의 폭력과 성폭력을 고발하는 모습을 보고 용기를 냈다.
1심 재판부는 당시 “성적가치관이 형성되지 않은 미성년자를 상대로 성범죄를 저지른 피고인의 범행은 죄질이 매우 불량하다”고 밝혔다. 지난 14일 열린 항소심 재판에서 ㄱ씨는 “연인 사이였다”며 무죄를 주장하던 기존 입장을 바꿨으나 검찰은 징역 10년 10개월을 구형했다.
경향신문 그래픽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크게 보실 수 있습니다> |
■폭로로 드러난 ‘빙상계 성폭력’…재판은 현재 진행형
한국 여자 쇼트트랙 간판선수 심석희씨는 조재범 전 코치를 상대로 법정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 조 전 코치는 지난 6월 심 선수를 상대로 3년여간 성범죄를 저지른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심 선수를 상습적으로 폭행해 다치게 한 혐의로 지난해 1월 항소심에서 징역 1년6개월을 선고받은 후다. 조 전 코치는 심 선수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2014년 8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30차례에 걸쳐 심 선수를 성폭행하거나 강제로 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심 선수의 진술이 구체적이고 일관적인데다 과거 심 선수가 성폭행 피해를 본 뒤 날짜와 장소, 당시 감정 등을 적어놓은 메모장을 근거로 조 전 코치의 혐의가 입증된다고 보고있다. 또 전 코치가 심 선수를 8세 때부터 정신적으로 지배했다며 ‘그루밍 성폭력’의 전형이라고 봤다. 심 선수의 폭로 이후 국가인권위원회는 스포츠인권 특별조사단을 출범한 후 실태조사 등에 나섰다.
심 선수는 힘든 시간을 겪고 다시 한번 태극마크를 단다. 지난 3일 서울시청에서 입단식을 가졌다. 4월 국가대표 선발전을 앞두고 있다. 심 선수는 최근 경향신문과 인터뷰에서 “더 당당하게 세상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며 “(여성들은)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라,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고 했다.
김희진 기자 hjin@kyunghyang.com
▶ 삼성 27.7% LG 24.9%… 당신의 회사 성별 격차는?
▶ 뉴스 남들보다 깊게 보려면? 점선면을 구독하세요
©경향신문(www.khan.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의 카테고리는 언론사의 분류를 따릅니다.
기사가 속한 카테고리는 언론사가 분류합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언론사는 한 기사를 두 개 이상의 카테고리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