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세 정의를 위한 조치다." vs .디지털 기업을 향한 명백한 차별이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한판 제대로 맞붙었습니다.
최근 언론에서 빈번하게 거론되는 '디지털세'가 바로 그것입니다.
미국 무역대표부(USTR)는 지난 7월 24일 프랑스가 디지털세를 발효시키자 이를 구글, 페이스북, 아마존 등 자국 기업에 대한 차별이라고 판단해 보복 절차에 나섰습니다.
약 4억달러(2조8000억원 상당)에 달하는 프랑스산 수입품 63종에 대해 최고 100%의 추가 관세를 물리겠다는 것입니다.
앞서 프랑스 상원은 연매출 7억5000만유로(약 9900억원) 이상이면서 프랑스 내에서 2500만유로(약 330억원) 이상 수익을 내는 글로벌 IT 기업들에 대해 이들이 프랑스 내에서 벌어들인 연간 총 매출의 3%를 디지털세로 부과하는 내용의 법안을 통과시켰습니다.
신설된 디지털세 부과 대상이 되는 기업은 구글, 페이스북, 애플, 아마존, 우버, 에어비앤비, 부킹닷컴, 크리테오 등 총 30개입니다. 프랑스의 선제적 움직임과 더불어 영국과 이탈리아 등 다른 국가들도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디지털세 도입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글로벌 디지털세 논의의 표적이 되고 있는 미국의 IT 공룡들. |
디지털세 필요성에 대해 이들은 "글로벌 IT 공룡 기업들이 유럽 각국에서 이윤을 창출하면서도 세율이 가장 낮은 아일랜드 등에 법인을 두는 방식으로 조세를 회피하고 있다"며 조세 정의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디지털세에 대한 공론화가 확산되면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지난달 말 프랑스 파리에서 디지털세 도입을 위한 1차 공청회를 열기도 했습니다.
주목할 점은, 단지 IT 서비스 기업뿐 아니라 제조업 부문도 디지털세 부과 업종에 포괄적으로 넣어야 한다는 의견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광의의 디지털세 도입 논의가 검토되면서 한국 대표 IT 제조사인 삼성전자, LG전자, SK하이닉스 등도 디지털세 부담 기업에 오를 가능성이 높아지는 흐름입니다.
디지털세만큼 첨예한 논의가 이뤄지지는 않고 있지만 '로봇세' 도입 문제도 선진 경제권에 뜨거운 감자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미국에서는 민주당 대선 경선 주자인 앤드루 양이 일자리 수백만 개가 자동화하면서 야기할 대규모 실직 폭탄에 대비해 '로봇세'가 필요하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이에 앞서 빌 게이츠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도 2017년부터 로봇세 도입을 주창하며 "인간 노동자의 실직으로 사라지는 소득세와 사회보장세에 상응하는 수준으로 세금을 걷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로봇세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습니다.
신규 세수 항목에 함몰돼 기업의 자동화 혁신을 방해하면 오히려 매출 악화에 따른 법인세 감소 등 '소탐대실'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가운데 뉴욕타임스(NYT) 논설위원인 에듀아르도 포터는 최근 '로봇과 싸우지 마라. 과세하라(Don't Fight the Robots. Tax Them)'는 제목으로 된 칼럼에서 "기업이 로봇화를 추진하는 것은 혁신적 생산성이 아니라 세제상 편익을 좇기 때문"이라고 비판해 눈길을 끌었습니다.
자동화 시설투자에 대한 정부의 각종 세액공제 혜택이 크다 보니 생산성 향상이라는 본질에서 비켜나 무분별하게 자동화에 나서고 있다는 지적이었습니다.
미국·EU 간 통상전쟁을 예고하는 디지털세와 최근 로봇세 논란에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디지털로 전환하는 경제 체제에서 정부가 '미래 세수'에 대한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재정 수입 관점에서 디지털세는 인터넷과 모바일로 유통되는 '무형의 서비스'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새로운 조세 기틀'을 마련해야 한다는 정부의 절박함이 엿보입니다.
재정 지출 관점에서 로봇세는 전통적으로 '고용'을 전제로 사회보장제도를 설계·운용해온 정부에 '동앗줄'이 될 수 있습니다.
자동화에 따른 급격한 일자리 감소로 거리에 쏟아지는 실직 국민을 상대로 정부는 새로운 사회보장제도를 설계해 충격에 대비해야 합니다.
'보편적 기본소득(Universial Income Tax)’ 논의가 대표적입니다.
노동에서 소외돼 사회적 보호가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무런 조건 없이 현금을 지급하자는 내용으로 한다는 점에서 사회보장제도의 새로운 대안으로 부상하고 있습니다.
미국 제도권 정치에서는 앤드루 양 후보가 매달 1000달러씩 보편적 기본소득을 지급한다는 다소 파격적인 공약을 내걸고 있습니다.
매달 1000달러씩 보편직 기본소득을 지급하자는 공약을 내걸고 있는 앤드류 양 민주당 대선 경선주자. |
이에 앞서 2017년 5월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최고경영자(CEO)는 하버드대 졸업식 축사에서 밀레니얼 세대의 대량 실직 가능성을 염려하며 보편적 기본소득 도입을 주장했습니다. 그는 "모든 이가 (실직의 충격을 극복하고) 새로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완충 역할을 할 보편적인 기본소득과 같은 아이디어를 개척해 나가야 한다"며 매달 수백 달러의 국가 지원이 '노동'으로 자신의 가치와 존엄을 확인해온 인간에게 재기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강조했습니다. 저커버그 CEO는 이 축사 뒤 월스트리트저널의 칼럼리스트인 앤디 커슬러에게 "대중을 향한 '아편'과도 같은 처방"이라는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양한 찬반 양론 속에서 분명한 것은 디지털세, 로봇세, 보편적 기본소득 논의가 한국 사회에서도 피할 수 없는 현안이 될 것이라는 점입니다.
미래 재정 수입과 지출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새로운 대안으로 한국 정부 역시 내부적으로 디지털세와 로봇세 도입 여부를 검토하고 있습니다.
세계 최악의 저출산 국가로 전락한 한국의 현실은 역으로 대량 실직에 따른 '보편적 기본소득' 논의가 인구학적 대응과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할 것입니다.
OECD는 저출산 여파로 약 40년 뒤 한국 노동연령인구(20~64세)가 지금보다 43% 줄어들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가장 빠른 감소 속도라고 합니다.
그런데 저출산 국가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고령화' 문제를 생각하면 향후 한국 청년들에게 공포의 대상은 로봇에 밀려나는 '실직'보다 '부모 세대 부양'이 될 수도 있습니다.
섣부른 관측이지만 한국에서 '보편적 기본소득' 논의는 저커버그 CEO가 말하는 청년세대에 대한 재기의 역할보다는, 제2의 기초연금제가 되지 않을까 벌써부터 걱정입니다.
[이재철 국제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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