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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8 (수)

이슈 '종교적·양심적 병역거부' 인정

양심적 병역거부 대법 판결 1년, 모두가 죄를 벗지는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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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

2004년 7월15일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이 대법원의 유죄판결을 받기 전 법정에서 재판관들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해 11월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한 형사처벌을 금하는 판결을 내렸지만, 비종교·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은 여전히 유죄판결을 받곤 한다. | 경향신문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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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11월1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형사처벌해서는 안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대법원은 헌법 19조가 보호하는 양심이란 “그렇게 행동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인격적 존재가치가 파멸되고 말 것이라는 강력하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로서 절박하고 구체적인 것”이라며, 이 같은 ‘진정한 양심’에서 나온 병역거부는 무죄라고 했다. 1년이 지났다. 변화는 있었다. 여호와의증인 신도 50여명에게 무죄가 최종 확정됐다. 법무부는 수감돼 있던 양심적 병역거부자를 모두 가석방했다. 하지만 양심적 병역거부자 900여명의 재판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대법원 판결 이후 일선 법원에선 ‘진정한 양심’의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 진행됐다. 양심은 인간 내면에 형성되는 것이라서 법원이 병역거부자가 진정한 양심을 가졌는지 판단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법원은 병역거부 사유를 종교적 양심으로 제한하지 않았지만, 비폭력·평화주의 등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가 인정된 사례는 단 1건에 불과하다. 그런 면에서 전쟁없는세상 활동가 용석씨는 지난 1년을 “빛 좋은 개살구”라고 표현했다.

■여호와의증인 신도 대부분 무죄

지난 1년간 여호와의증인 신도는 대부분 무죄 판결을 받았다. 가족들이 여호와의증인 신도인지, 침례를 받았는지, 정기적으로 집회·전도 및 봉사활동에 참여하는지, 일관되게 형사처벌의 위험을 감수하며 병역거부의 의사를 밝혔는지는 재판부들이 공통적으로 고려하는 요소다. 학창 시절 생활기록부에 폭력적인 성향이 기재돼 있는지, 형사처벌 전력이 있는지, 군과 무관하고 순수한 민간 대체복무제를 이행하겠다고 다짐하는지도 따진다.

검찰이 배틀그라운드·서든어택 등 슈팅 게임 접속 여부도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대부분의 재판부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게임에 지나치게 몰두한 경우가 아니라면 진정한 양심을 배척하는 근거로 사용되지 않는다. “피고인이 과거 다소 폭력성이 있는 게임을 한 사실이 있다는 사정만으로 현실에서도 폭력적 성향을 가지고 있다거나 종교적 신념 내지 양심이 진실하지 않은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수원지법 형사항소6부)는 식이다.

극소수 사건에서 게임이 문제가 된 경우도 있기는 하다. 김미진 인천지법 부천지원 판사는 “총기 게임은 가상세계에서 총기로 캐릭터 등을 살상하는 것으로 현실과는 다르고 여호와의증인 신도가 아닌 일반인들도 가상의 세계와 현실세계를 구분지어 오락 목적으로 게임을 하고 있다”면서도 “피고인이 폭력적인 총기 게임을 하면서 양심이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았다고 진술해 양심이 과연 깊고 진실한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다만 이렇게 유죄 판결을 받는 병역거부자들은 전과가 있거나 종교활동을 제대로 하지 않는 등 다른 사유가 있었다. 게임만이 유일한 유죄의 이유는 아니었다.

특이한 유죄 판결도 있다. 대전지법 형사항소1부(재판장 심준보 판사)는 지난 8월 여호와의증인 신도 ㄱ씨의 항소심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ㄱ씨는 무죄 판결을 받은 다른 여호와의증인 신도와 특별히 다른 부분이 없었다.

그런데 이 재판부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여호와의증인 성서 구절에 관해 “매우 포괄적이고 추상적이라 이 구절을 통해 곧바로 전쟁과 병역을 거부해야 한다는 신념이 도출된다고 보기는 어렵다”며 “사랑과 생명 존중이라는 가치는 비단 여호와의증인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종교 교리에 내포돼 있는데 다른 종교들은 병역거부라는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이 재판부는 ㄱ씨의 봉사활동도 지극히 협소하고 폐쇄적이라면서 양심의 표출로 인정하지 않았다. 이창화 변호사는 “대법원 판결 취지와 다른 독자적인 기준”이라고 지적했다. 대법원 판단이 남아 있다.

의정부지법·서울남부지법 등 일부 판결에는 대전지법 판결에 대한 사실상 반박이 포함됐다. 이들 재판부는 “피고인이 자신의 신념을 대외적으로 전파하거나 관철하기 위해 남다른 활약을 보이지 않았다는 사정만으로는 양심이 충분히 깊지 않다거나 진실하지 않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비폭력·평화주의 병역거부는 아직도 유죄

대법원은 판결에서 종교뿐만 아니라 ‘윤리적·도덕적·철학적 또는 이와 유사한 동기’에 의한 양심적 병역거부도 인정했다. 그러나 지난 1년간 하급심에서 이른바 비종교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은 단 1건이다. 반면 유죄 판결은 5건이 나왔다. 판결들을 보면 법원은 비종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의 진정한 양심을 판단하면서 ‘높은 기준’을 댔다. 대법원은 판결에서 “신념이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면서도 “반드시 고정불변이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했지만 비종교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겐 더 까다로운 심리가 이뤄진다.

농부인 부모 슬하에서 자란 ㄴ씨는 형이 장애를 겪는 등 취약계층 사람들의 다양한 삶을 보며 돕는 삶을 살았다. 사회복지사로서 제주 강정마을 주민들을 면담하면서 평화의 중요성을 깨닫고 신념을 가졌다. 이후 평화주의 관련 시민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예비군 훈련을 거부했다. 제주지법 최석문 판사는 지난 8월 ㄴ씨에게 벌금 150만원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ㄴ씨가 사회복무요원으로 병역의무를 이행했고, 시민단체의 주된 목적이 양심적 병역거부가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ㄷ씨도 비슷한 경우다. ㄷ씨는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면서 평화가 성서의 핵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신념과 결단이 무르익지 않아 군 입대를 했다. 제대 후 예비군 훈련을 받아야 하는데 ㄷ씨는 예상되는 어떠한 불이익에도 상관없이 신앙이 요구하는 바를 따르기로 결심해 병역거부를 했다. 서울남부지법 박강민 판사는 지난 9월 ㄷ씨의 각종 활동이 양심적 병역거부와 관련이 없고, 군 복무를 이미 했다는 점 등을 들어 유죄를 선고했다. 형량은 징역 6월에 집행유예 1년이었다.

시민단체인 참여연대에서 병역법 제도 개선 운동을 한 홍정훈씨는 지난 9월 항소심에서 권위주의적 문화에 대한 반감일 뿐 비폭력·평화주의라고 보기 어렵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지난 5월 오경택씨 사건에서 서울서부지법 형사항소2부(재판장 최규현 판사)는 극단적이고 가정적 상황을 진정한 양심 판단의 잣대로 대기도 했다. 오씨가 인간 살상은 용납될 수 없다면서도 5·18민주화운동 때 시민들이 총을 든 것을 폭력행위라고 비판하기는 어렵다고 한 게 ‘선택적 병역거부’라고 본 것이다.

결국 ‘양심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돌아온다. 활동가 용석씨는 “양심이 형성되는 과정과 발현되는 시기·형태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깡그리 무시하는 판결들”이라며 “석가모니도 어린 시절과 출가했을 때의 양심이 다르지 않으냐”고 지적했다. 그는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타협하다가도 어떤 때는 목숨을 내버리면서 지키는 게 양심인데 판결에서 전혀 고려되지 않고 있다”며 “단순히 평화주의 병역거부자들이 유죄를 선고받는 것에서 나아가 헌법상 양심의 자유의 범위를 협소화하는 것”이라고 했다.

다른 국가에서도 초반에는 양심적 병역거부권을 좁은 범위로 제한했지만 점차 넓혔다. 1980년대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는 소승불교 신자가 아파르트헤이트(흑백분리정책)와 침공에 반대하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선언한 것을 계기로 종교적 신앙뿐만 아니라 윤리적·도덕적 사상과 신념으로까지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범위가 확장됐다. 프랑스에서는 1960년대 양심적 병역거부의 사유를 종교로 제한했지만 1980년대 규제를 풀었다. 양심을 심사하고 측정하는 게 부적절·불가능하기 때문에 ‘행위에 의한 증명’을 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가 프랑스에서 나왔다. 진정한 양심은 군복무보다 더 긴 대체복무를 이행함으로써 증명된다는 것이다. 이마저도 지나치게 대체복무 기간이 길어 징벌적이면 안 된다는 비판을 받았다.

징병 문제를 연구해온 백승덕 역사문제연구소 연구원은 “(대법원 판결로 오히려) 지옥문이 열렸다고 할 만큼 개인에게는 엄청난 혼란과 실존적인 위협이 다가왔지만, 정작 판결이나 국회 논의는 현실과 동떨어지게 진행되고 있다”며 “헌법재판소 결정과 대법원 판결의 취지가 과연 제대로 작동하고 있는지 의문이 든다”고 했다. 지난달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범위를 현직 성직자와 종교단체에서 수학하는 신도로 제한한 아제르바이잔에 대해 유럽인권재판소가 “양심적 병역거부권의 실체는 거의 부정되는 것이며 그러한 권리는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결했다.

■실종된 대체복무제 논의

지난 1년간의 법원 판결과 재판 과정은 앞으로 만들어질 ‘대체복무제’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백종건 변호사는 “검찰이 재판 과정에서 제시한 기준과 법원의 사례들은 대체복무심사위원회가 도입됐을 때 (양심적 병역거부자에 대해) 이뤄지는 검증의 전초전”이라며 “결국 지난 1년은 대법원 판결이 세운 기준을 구체화하는 작업이었고, 대체복무 심사에 그대로 적용될 가능성이 높다”고 했다.

정작 대체복무제 입법 논의는 실종됐다. 헌재는 지난해 6월 대체복무제를 병역의 한 종류로 명시하지 않은 병역법 조항이 헌법에 어긋난다는 결정을 내리면서, 국회가 올해 12월31일까지 대체복무제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이 조항을 개정해야 한다고 했다. 입법 시한까지 두 달밖에 남지 않았다.

백승덕 연구원은 “병역이 무엇인가, 병역제도를 어떻게 유지할 것인가 등 근본적인 논의가 완전히 빠진 채 종교재판처럼 진행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했다. 임재성 변호사는 “양심적 병역거부자의 감옥행을 멈춰야 한다는 판결까지는 이끌어냈지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갔을 때 무엇을 말할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던 것 같다”며 “양심적 병역거부자 문제가 공론화된 지 20년이지만 양심을 어떻게 심사할 것이냐의 국면에서는 또 다른 양심 침해적인 방식이 나타나고 있다”고 했다.

이혜리 기자 lh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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