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흥 거리’로 전락한 수원 중심가 ‘나혜석 기념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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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2일 경기 수원시 팔달구 인계동 ‘나혜석 거리’에 설치된 무대 위와 바닥에 음료수 캔과 담배꽁초 등이 버려져 있다. |
한국 여성 최초의 서양화가
효원공원 인근에 ‘거리’ 조성
골목엔 90여개 식당만 빼곡
밤마다 취객 고성방가 눈살
시민들 “작품전·문화행사를”
시 “행사 계획도 예산도 없다”
경기 수원시 중심가인 팔달구 인계동 ‘나혜석 거리’는 당초 문화의 거리로 지정됐지만 밤이면 취객들의 고성방가가 오가는 ‘유흥의 거리’로 바뀐다. 이 거리는 한국 최초의 여성 서양화가이자 작가이며 여권론을 펼친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 선생을 기리기 위해 수원시가 조성한 곳이다.
지난 22일 오후 찾은 나혜석 거리는 쓰레기, 음식 냄새 등이 진동했다. 저녁이 되자 거리 양쪽과 골목 곳곳에는 돼지고기, 닭갈비, 곱창, 호프집 등 90여개의 다양한 종류의 식당에서 저마다의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낮에 깨끗하게 치워진 거리는 해가 저물면서 가동을 멈춘 분수대와 식수대에 쓰레기와 담배꽁초가 수북이 쌓여있고, 길거리에는 전단지들이 이리저리 뒹굴었다.
직장인 권성현씨(36)는 “친구들과 나혜석 거리에서 종종 모여 술을 마시는데 이름만 알지 인물은 잘 모르겠다”며 “오가며 동상은 봤는데, 위안부 할머니 동상인 줄 알았다”고 말했다.
나혜석의 고향인 수원시는 2000년 인계동 효원공원 서쪽 입구부터 600m 구간을 ‘나혜석 거리’로 조성했다.
시는 거리 조성 당시 서울 인사동과 같이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거리를 기대했지만 현실은 식당과 술집이 많은 거리일 뿐이다. 그나마 나혜석 거리임을 표시하는 것은 나혜석 동상 2개와 ‘개척자’, ‘초상화’, ‘조조(早朝)’ 등 판화 3점이 전부이다.
거리 조성 이후 거리에서 진행된 나혜석 관련 행사도 단 1건도 없었다. 반면 거리 한가운데 서있는 나혜석 거리 맛집 안내판에는 28개의 가게 상호가 적혀있다.
시민들은 나혜석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거리가 조성된 만큼, 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작품 전시와 문화행사도 진행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유동준 나혜석 기념사업회 회장은 “이 거리는 경기도문화의전당, 효원공원, 야외음악당과 연결돼 많은 문화행사가 이뤄질 것으로 기대를 모았다”며 “이제부터라도 문화의 거리로 이 지역의 상징될 수 있도록 각종 공연과 전시 등 다양한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펼쳐지도록 수원시와 시민들이 나섰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수원시 관계자는 “현재로서는 나혜석 관련 행사를 치를 계획이나 예산도 없다”며 “나혜석 거리를 방문하는 사람들을 위해 도로포장과 거리 디자인 개선에 대한 장기 계획을 구상 중에 있다”고 밝혔다.
글·사진 김동성 기자 estar@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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