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정 연출 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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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이갈리아의 딸들' ⓒ두산아트센터 |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다음 생에서 예쁜 여성으로 태어나고 싶다는 상상을 해왔다. 살짝 웃음 짓는 것만으로도 수만 남성의 심장을 찢어발기는 쾌감을 꿈 꿨다.
사회적 위치와 체력이 남들보다 비교적 떨어지는 남성이 지난한 현실을 잠시마나 잊기 위해 가져온 일장춘몽이다. '넌 날 소유할 수 없다'는 눈빛을 보내는 것만으로 카타르시스가 극에 달할 거라 생각하며 달뜬다.
하지만 김수정 연출(극단 신세계 대표)이 두산아트센터 'Dac 아티스트'로서 선보인 신작 '이갈리아의 딸들'을 본 뒤 몽매하고 무지한 남성의 유리 멘털은 산산조각났다.
1977년 출간된 노르웨이 작가 게르드 브란튼베르그의 동명 여성주의 소설을 각색한 작품. 1996년 국내에 출간됐는데 최근 몇 년 동안 젠더 이슈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다시 주목 받고 있다. 2015년 개설된 페미니즘 사이트 '메갈리아'는 '메르스'(MERS)와 '이갈리아'를 따 이름을 지은 것이다.
'이갈리아의 딸들'은 40여년전 나온 소설임에도, 최근 어떤 여성주의 콘텐츠보다 전복적이다. 극 중 배경인 '이갈리아'는 여자가 아이를 낳고 사회 활동을 하며 남자가 아이를 돌보는 것이 당연한 나라.
페트로니우스 브램을 비롯 이곳에 사는 소년들은 소년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적으로 품평 당하고, 성적인 폭력을 당할 위험에 항상 처해 있다. 이들의 좌절과 비탄은 지금을 살아가는 여성들의 것이기도 하다. 여성을 찬미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상품화, 외모지상주의, 물신주의에 빠져 그들 삶을 정작 톺아보지 못한 것이다.
남성이 여성을 연기하고 여성이 남성을 연기하는 역할놀이는 웃음을 안겼다. 특히 장관 '루스 브램' 역의 박지아, 상어잡이 '그로 메이도터' 역의 김선기의 남성을 흉내 내는 과장된 행동은 쓴웃음을 뱉게 했다. 희화화가 아닌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작품 속 소년의 수난이 현실에서는 소녀의 수난임을 새삼 깨닫게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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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몸틀'에 대해 환기시키는 이 연극을 단지 성별 문제로 수렴하는 것은 작품을 평가절하하는 것이다. 여성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가해지는 폭력성은 결국 권력의 문제로 수렴된다. '히'(he)나 '쉬'(she)가 아닌 '우리'(We) 문제임을 상기시킨다.
결국 여성의 실존이 아닌 사람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게 만든다. 극 속에서 짓궂은 소년 '바 브램' 역을 맡은 배우 김보경은 개막 전 만난 자리에서 "권력은 가지면 편안한 것 근데 자신은 모르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여성은 권력이라는 역할 놀이에서 을의 위치에 있다.
작년 성폭력 고발 캠페인 '미투운통'이 대학로를 휩쓸었다. 여성이 주인공이 작품이 늘어나고 젠더 프리 작품이 유행처럼 번지지만 여성에 대한 무차별적인 폭격은 여전하다. 남성적인 시선으로 구축된 서사에 주인공이 여성으로 바뀌었다고, 진짜 여성 서사가 될 수 있을까.
한국적인 상황이 반영된 2막을 비롯 '이갈리아의 딸들'은 김 연출의 시선과 배우들의 연기를 갑옷처럼 두르고, 시대의 권력 위계에 맞선다. '그녀'가 강해지는 것이 아닌 '우리'가 깨어나야 한다. 19일까지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realpaper7@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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