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노이 2차 북미정상회담 결렬 이후 멈췄던 비핵화 시계가 이달 말 다시 돌아갈 전망이다. 미국의 대화 재개 요구에 불응하던 북한이 지난 9일 전격적으로 "9월 하순에 만나자"며 호응하면서다. 반년 이상 기싸움을 벌여온 북미가 본격적 접점 찾기에 나설 지 주목된다. 하노이 회담 후 긴장과 기대가 교차했던 북미관계 주요 국면을 돌아봤다.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첫날인 27일 베트남 하노이 국제 미디어센터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회담이 생중계 되고 있다./사진=김창현 기자 |
◇2~3월 충격의 ‘노딜 하노이’…北은 침묵·美는 관망
아무도 예상하지 못 했던 하노이 북미정상회담 ‘결렬’이 예고된 건 회담 둘째 날인 2월 28일 오찬을 앞둔 시각. 오전 단독·확대회담 후 함께 오찬을 할 예정이던 두 정상은 돌연 자신의 숙소로 각자 돌아갔다. 모두를 충격에 빠트린 순간이자 앞으로 수개월 이어질 북미 롤러코스터의 출발점이다.
북한은 혼란스럽다는 입장을 내비쳤다. 회담 결렬 당일 밤인 1일 자정을 넘긴 시간 리용호 외무상과 최선희 당시 외무성 부상 주재로 북한 측 숙소 멜리아에서 긴급 기자회견이 열렸다. 1일 오후엔 최선희 부상이 같은 호텔에서 기자들과 만나 속내를 전했다. 최 부상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미국의 거래 계산법에 대해서 굉장히 의아함을 느끼고 계시고 생각이 좀 달라지신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이후 침묵하던 북한은 3월15일 러시아 타스 통신발로 “미국과 비핵화 협상을 중단시키는 걸 고려하고 있다”는 입장을 최 부상을 통해 공개했다. 평양 주재 외교관들과 일부 언론을 불러 모은 자리였다. 북미 교착이 꽤 오래 지속될 것이란 전망이 이어졌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8일 제2차 북·미 정상회담 이틀째인 28일 베트남 하노이 소피텔 레전드 메트로폴 하노이 호텔에서 열린 도널트 트럼프 대통령과 오찬이 취소된 후 멜리아 호텔로 들어서고 있다./사진=김창현 기자 |
◇4월, 입 연 김정은 “연말까지, 美 새계산법 갖고 와라”…北 ‘공식입장’ 발표
하노이 이후 북한의 공식 입장이 나온 건 4월12일 최고인민회의에서였다.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올해 말까지는 인내심을 갖고 미국의 용단을 기다려 볼 것"이라며 “미국이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우리에게 다가서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연말을 미국의 태도 변화 시한으로 제시한 것이다.
최고인민회의가 이틀에 걸쳐 열린 건 19년만이고 김정은 위원장이 ‘시정연설’이란 형태의 공개연설을 한 것도 매우 이례적이었다. 대미 메시지를 발신하기 위해 만들어진 자리로 해석됐다. 김 위원장은 "제재해제 문제때문에 목이 말라 미국과의 수뇌회담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며 상응 조치로 더 이상 제재 문제를 꺼내지 않겠다고도 선언했다.
아울러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을 약 30년 만에 교체(김영남→최룡해)하는 등 ‘김정은 2기 체제’를 공고히했다. 최 부상을 제1부상으로 승진시켜 대미라인을 재정비했다. 내부적으로 “제재가 우리를 굴복시킬 수 없다”며 ‘자력갱생’ 강조도 반복했다.
미국은 관망하면서도 압박에 나섰다. 최근 경질된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은 지난 4월17일(현지시간) 블룸버그 통신과 인터뷰에서 “우리는 빅딜에 대해 논의할 준비가 돼 있다"며 ‘새 계산법 요구’를 일축하는 메시지를 내놨다.
사진제공=ap |
◇김정은 푸틴 만나고 무력도발 재개...北 ‘협상력 극대화’ 작업?
협상력을 제고하려는 북한의 대외 행보도 계속됐다. 가장 먼저 러시아와 밀착했다. 김 위원장은 24~26일 블라디보스토크를 방문해 25일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과 만난다. 2011년 후 8년만의 북러정상회담이자 두 정상의 첫 대면이었다.
푸틴은 정상회담 후 단독기자회견에서 “북한도 비핵화를 원한다. (그 대가로) 체제보장을 원한다”고 했다. 제재해제보다 체제보장을 상응조치로 내놔야 한다는 북한의 의중을 대신 전해준 셈이다.
무력시위도 시작했다. 북한은 5월4일 돌연 함경남도 호도반도 일대에서 발사체를 발사했다. 2017년 11월 이후 첫 무력 도발이다. 닷새만인 9일 평안북도 신오리 일대에서 발사체를 또 쐈다. 대미압박, 대내결속, 무기시험을 위한 실질적 목적이라는 등 여러 해석이 이어졌다.
미국은 상황 관리에 나섰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앞장서 북한을 ‘두둔’하면서 군사훈련의 의미를 축소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10일(현지시간) 미 언론과 인터뷰에서 전날 북한이 쏜 미사일이 ”단거리였다"며 "전혀 신뢰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같은 달 26일엔 일본 방문 중 자신의 트위터에 “북한이 작은 무기들을 발사했다"며 "이것이 나의 사람들 일부와 다른 사람들을 거스르게 했지만 나는 아니다"라고 했다. 하루 전 북한의 발사체가 ‘유엔 안보리 결의 위반’이라고 했던 볼턴의 발언을 진화한 것이다.
◇北‘ 새 계산법’ 요구 지속...美 “동시적, 병행적 진전 위한 대화 준비”
대북제재를 둘러싼 북미간 기싸움도 이어졌다.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미국의 부당성을 강조하는 ‘여론전’을 폈다. 김성 유엔 주재 북한대사가 미국이 압류한 와이즈 어니스트호의 반환을 촉구한 기자회견(21일)을 열고, 한대성 주제네바 북한대표부 대사는 로이터 인터뷰(22일)에서 미국을 비판하며 선박 반환을 촉구했다.
5월24일 외무성 대변인은 "미국이 지금의 계산법을 접고 새로운 계산법을 가지고 나오지 않는 이상 북미 대화는 언제가도 재개될 수 없으며 핵문제 해결 전망도 그만큼 요원해질 것"이라 재차 경고했다. 그러자 미국 국무부는 “(6·12 싱가포르 정상회담 합의 사안들을) 동시적이고 병행적으로 진전을 이루기 위해 북한과 건설적 논의에 관여할 준비가 여전히 돼 있다"고 협상 재개를 거듭 제안했다.
'동시·병행적'이란 표현을 두고선 미국이 ‘상대적으로 유연해졌다’고 평가하는 긍정적인 해석과 미국의 실질적인 기조에 변함이 없다는 분석이 엇갈렸다. 미국이 대화를 지속하겠다는 의지를 재확인하면서 교착 속에서도 대화 불씨는 살아 있는 국면이 이어졌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30일 오후 판문점 북측에서 기념촬영을 한 뒤 남측으로 내려오고 있다. /방송화면캡쳐 / 사진=이동훈 기자 photoguy@ |
◇변곡점 된 친서…대화 채널 재가동·'깜짝' 판문점 회동까지
북미관계의 결정적 변곡점은 두 정상의 ‘친서 교환’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은 6월11일(현지시간) 김 위원장이 전날(10일) 친서를 보내왔다고 공개하며 ‘아름다운 편지’라 소개했다.
트럼프는 같은 달 20일에도 인터뷰서 "내 생일(14일) 축하 친서 받았다“고 공개했다. 조선중앙통신은 23일 김 위원장이 전날 트럼프 대통령의 친서를 받고 ”만족을 표시하고 흥미로운 내용이라 했다“고 전했다.북미관계에 정통한 한 소식통은 “북한이 연락을 거부하며 북미간 뉴욕채널도 가동이 되지 않다가 정상 친서교환 즈음 뉴욕채널을 통한 북미소통이 시작됐다”고 전했다.
6월20~21일에는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중국 최고지도자로선 14년만에 방북해 평양에서 5차 북중정상회담을 열었다. 북러 정상회담 이어 북중 정상이 밀착을 과시하면서 북중러 공조가 공고해졌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일본 오사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에 참석 중이던 6월29일 트위터에 "일본을 떠나 한국으로 갈 것이다. 그곳에 있는 동안 김 위원장이 이것을 본다면, 나는 DMZ(비무장지대)에서 그를 만나 손을 잡고 인사(say Hello)를 할 수 있을 것"이라며 'DMZ 번개 회동'을 전격적으로 제안했다.
트위터 후 불과 5시간 만에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은 "공식 제의를 받지는 못했다"면서도 "매우 흥미로은 제안"이라며 기다렸다는 듯 호응했다. 결국 트럼프 대통령이 방한한 30일 남북미 세 정상이 판문점에 모이는 새 역사가 만들어졌다. 이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2~3주 동안 실무작업을 진행할 것이라며 실무회담 재개를 공식화했다.
이도훈 외교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오른쪽)이 21일 오전 서울 종로구 외교부 청사에서 한·미 북핵 수석대표 협의에 앞서 스티븐 비건 미국 국무부 대북정책특별대표와 악수를 하고 있다./사진=김창현 기자 |
◇美 러브콜에도 예상보다 길어진 재개…이번엔 간극 줄일까
이에 앞서 스티븐 비건 미 국무부 대북특별대표는 6월19일(현지시간) 애틀랜틱 카운슬 강연에서 "북미 모두 비핵화 협상에서 유연한 접근이 필요하다는 점을 이해하고 있다"고 했다. 북한에 '유연한 접근'을 당근으로 대화 메시지를 발신한 것이다.
북한은 그러나 지난 7월25일부터 지난달 24일까지 7차례에 걸쳐 신무기 시험발사를 감행하고, 지난달 21일엔 노동신문 논평으로 이전까지 자제했던 대미비난을 본격화했다. 지난달 23일엔 리용호 외무상 담화로 '대북제재 유지' 원칙을 밝힌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을 "미국 외교의 독초"라 비난했다. 대화재개 기대에 역행하는 행보였다.
북한의 대미 비난 재개가 북미 회담 임박 신호란 해석도 나왔다. 대미비난이 협상 전 의제설정을 위한 사전작업일 수 있다는 것이다.
비건 대표는 지난달 21일 방한 당시 "북한의 카운터파트로부터 (소식을) 듣는대로 실무협상을 재개할 준비가 돼 있다"고 했다. 지난 6일엔 한 강연에선 북미협상이 실패하면 한일이 핵무장을 할 가능성을 거론했다. 러브콜에 이어 으름장을 놓으며 대화를 압박한 것이다.
결국 최선희 제1부상 담화로 북한은 지난 9일 '9월 하순 실무회담 용의' 의사를 표명했다. 하노이 회담 후 7개월 만의 대화 재개가 가시권에 접어든 것이다. 다만 북미가 이견을 좁힐지는 여전히 불확실하다. 북한은 '미국이 새 계산법을 가져와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미국은 유연성을 발휘할 여지를 남기고 있으나 근본적인 입장은 크게 달라진 게 없어 보인다.
미국은 대량살상무기(WMD)의 완전한 제거가 비핵화 마지막 단계이며, WMD의 동결을 시작으로 비핵화 로드맵 작성 후 완전한 비핵화를 향해 가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공식화한 상태다. 북한이 원하는 ‘새 계산법’과는 차이가 있다. 북미간 진검승부는 이르면 이달 말부터 시작된다.
권다희 기자 dawn27@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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