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자성향 분석 ‘투자자정보 확인서’
DLF 피해자들 ‘15111’ 답안 즐비
‘금융지식 많고 공격투자형’ 의미
피해자들 “직접 안 써”…허위작성 의혹
‘32335’가 석달새 ‘15111’로 바뀌어
안정형 5등급→초고위험 투자 1등급 되기도
‘원금 손실 위험’ 신호 켜졌는데도
80대 치매 할머니 끌어들여
고령자보호 투자권유준칙은 허울뿐
피해자·가족 “판매가 아니라 사기
원천무효 소송 나설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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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19일. 우리은행이 사모펀드로 판매한 독일 국채금리 연계 파생결합상품(DLF)의 ‘만기 폭탄’이 처음 터지는 날이다. 김아무개(59·주부)씨 부부는 명절 연휴가 끝난 직후인 이날 ‘사실상 전액 손실 폭탄’을 떠안게 될 60여명 가운데 일원이다. 11일 오후 기준으로 김씨 계좌에 남은 원금은 1458만9515원이다. 전날은 900만원까지도 내려갔다.
김씨 부부는 원래 은퇴 생활자로 남편 앞으로 매달 나오는 국민연금 100만원 정도가 정기소득이다. 지난해 말 노후 설계를 새로 하려고 18년간 살던 집을 팔고 전세로 전환하면서, 잠시 여윳돈이 생겼다. 부동산 시장이 불안정하니 조금 지켜보고 올해 연말에 노후에 살 집을 사려는 계획이었다. 그래서 집 판 돈 중 1억원을 지난 3월 독일 상품에 넣었는데, 6개월 만에 공중분해가 될 상황이다.
김씨는 “홀린 듯했던 가입 과정을 돌아보면 ‘사기’라는 생각밖에 안 든다고 말했다. 김씨 같은 피해자들 사이에선 ‘15111’이라는 ‘은어’가 있다. 다들 투자자정보 확인서를 직접 쓴 적도 없다는데, 투자자 성향을 분석하는 객관식 5개 문항에 다 똑같은 방식으로 ‘15111’이란 번호가 기재됐기 때문이다. 확인서에선 현재와 미래 수입, 투자성향, 금융투자 지식수준, 투자원금 손실 감수 수준, 투자가능 기간, 파생결합증권 가입 경험 여부 6가지를 묻는다. ‘15111’이란 현재의 일정 수입이 유지되거나 증가할 예정이며, 투자경험은 공격투자형이고, 금융투자 지식수준은 매우 높으며, 기대수익이 높다면 원금손실 위험이 높아도 상관하지 않고, 투자가능 기간은 3년 이상이라고 답한 것을 이른다. 그런데 여기에 어울리지 않게도 마지막 질문인 파생상품·파생결합증권 등에 대한 투자경험은 ‘0’이다.
김씨 역시 ‘15111’이지만 황당한 것은, 그가 석달 전엔 전혀 다른 투자성향의 ‘32335’였다는 점이다. 그는 지난해 집을 판 뒤 중도금을 받아 우리은행에서 국공채 중심 채권형 펀드에 넣었다. 이때는 은행 기록에 연금이 주수입원이며, 채권형 펀드 등 안정추구형 상품을 원하고, 금융투자 지식은 주식과 채권의 차이를 구분하는 정도로 낮은 수준이며, 투자손실은 10% 미만까지 감수하고, 투자 가능 기간은 6개월 이내로 돼 있다. 현재 김씨가 말하는 노후 계획과 들어맞는 내용이다. 김씨가 채권형 펀드를 할 때 ‘32335’를 적어 넣어 받은 점수는 39점으로 채권형 펀드 정도가 권유 대상인 최저 5등급(안정형) 투자자였다. 그런데 김씨 부부는 석달 만에 점수가 56점이나 뛰어오른 95점이 돼 초고위험 투자를 하는 1등급(공격투자형)으로 둔갑하게 된 셈이다. 김씨는 “집 판 돈 일부를 채권형 펀드에 넣었더니 문자·전화로 영업이 와서 통화할 때 은퇴한 사람들이고 집 하나 있는 거 판 돈이라 연말에 집 사야 한다고 다 얘기했다”며 “우리한테 딱 맞는 상품이라고 해서 지점에 가니 서류가 다 준비돼 있어서 동그라미 친 데 이름만 쓰고 통장 하나 달랑 받아왔는데, ‘15111’은 사건이 터지고야 알았다”고 말했다. 그는 “은행원이 제멋대로 서류를 조작한 것인데, 이건 ‘불완전판매’가 아니라 ‘사기’라고 본다”고 주장했다.
은행권은 펀드를 판매하는 만큼 자본시장법에 근거를 둔 금융투자협회의 표준 투자권유준칙을 준용해 만든 ‘표준판매 매뉴얼’ 등 영업 내규를 갖추고 있다. 이는 금융회사가 원금보장이 되지 않는 투자상품을 팔 때 투자자의 전반적 상황을 살펴서 ‘적합성 원칙’에 따라 투자권유를 하도록 정한 규정이다. 먼저 투자자정보를 확인해 1~5단계로 투자성향을 등급화한 뒤 판매에 적합한 펀드를 선정하고, 펀드상품 설명 등 투자권유를 하게 돼 있다. 투자목적, 재산상황, 투자경험에 맞게 펀드를 팔라는 얘기다. 특히 고령투자자는 건강상 인지능력 저하 등을 우려해 더 엄격한 절차를 둔다. 이른바 ‘불완전판매’를 차단하려는 것이다. 하지만 이번 디엘에프 사태에서 다수 피해자들은 “은행권의 판매행태가 ‘독일이 망하지 않는 한 괜찮다’고 말해 투자자 서명만 먼저 받아놓고 은행 직원이 추후 투자자정보를 입맛대로 작성하는 등 불완전판매를 넘어 ‘사기성’이 짙다고 본다”고 주장하고 있다.
게다가 디엘에프 사태에서 70살 이상 고령투자자가 다섯 명 중 한 명꼴로 많은 편이다. 케이이비(KEB)하나은행과 우리은행에선 100살이 눈앞인 90대 노인들에게조차 이런 초고위험 상품이 판매됐다. 은행권 판매 과정에서 투자권유준칙상 고령자 보호 절차가 제대로 지켜지지 않은 것 아니냐 하는 의구심이 커지는 상황이다.
실제 우리은행에선 치매진단서가 나온 초고령자인 80대 노인에게 디엘에프 상품을 판 사례가 나왔다. 이때 작성된 투자 관련 서류들을 살펴보면 투자권유준칙의 고령자 보호 취지 규정들을 사실상 무력화하는 방식으로 영업을 한 흔적들이 눈에 띈다. 이번 디엘에프 상품은 우리·하나은행 모두 내부 투자권유준칙에 따라 각각 65살과 70살 이상의 고령자에 대해선 더 강화된 판매절차를 적용해야 하는 ‘투자권유 유의상품’으로 지정해놨다. 이 경우 직접 투자권유 직원 말고도 지점장이나 준법감시 담당자 등 관리직 직원이 고령 고객과 직접 면담해서 사리판단 능력을 살펴서 확인서명을 해야 하며, 80살 이상 초고령자는 2명이 서명을 해야 한다. 사실 초고령자한테는 판매 자체를 자제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1939년생으로 올해 여든이 된 김아무개 할머니가 우리은행에서 지난 5월 독일 디엘에프 상품에 1억1천만원을 넣는 과정에선 이런 보호 장치가 사실상 작동하지 않았다. 할머니가 가입한 날 독일 국채 금리는 -0.0463%로 이미 마이너스 구간으로 접어들며 위험 신호등이 켜진 상태였다. 현재 독일 국채 금리는 -0.6% 안팎을 오가고 있다. 올해 11월 만기까지 금리가 -0.2% 위로 회복되지 않는다면, 원금은 한 푼도 못 찾게 된다. 김 할머니는 지난 2016년 대학병원에서 치매 진단을 받아 치매진행을 늦추는 약을 복용해왔다. 한때 환청 증세도 있었지만 약을 먹은 뒤 안정화했고, 딸 부부와 함께 살면서 장 보기나 간단한 은행 업무 정도를 스스로 한다. 가족들은 할머니가 은행에서 예금을 해지한 뒤 새로 재가입을 했다고 해서 정기예금에 재가입을 한 것으로 여겼다. 가족들이 할머니의 디엘에프 가입을 알게 된 것은 8월 중순 언론에서 관련 보도가 쏟아지자, 혹시나 하는 마음에 통장을 확인해보면서였다. 사위인 김아무개(58)씨는 “80대 할머니가 일확천금을 노릴 나이도 아니고 건강 문제도 있는데 누가 원금을 100% 잃을 수 있는 공격형 투자를 한다는 말이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실제 할머니가 작성했다는 은행 서류들을 보면, 투자권유준칙 차원에서 볼 때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다. 우리은행 투자권유준칙은 초고령자는 투자권유 유의상품에 대해 고객이 매수를 원해도 판매를 자제할 필요가 있다고 정해놨다. 또 고객 요구로 굳이 판매를 진행할 경우엔 가족 등의 조력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물론 고객이 가족에게 투자사실을 밝히기 싫다고 거절할 수 있지만, 권장사항은 아니란 얘기다. 할머니의 서류는 가족 조력과 연락을 거절한 것으로 작성됐다. 또 투자자 성향은 2등급(적극투자형)이 나왔는데도, ‘위험등급 초과 가입 확인서’를 추가로 쓰면서까지 1등급 투자자 해당 상품에 돈을 넣었다. 사위 김씨는 “초고령자라서 2명의 관리직 직원이 면담을 해서 건강상태 확인을 해야 하는데, 면담도 않고 확인서명을 한 사실을 은행 직원이 시인해서 녹취를 확보했다”며 “사기로 인한 계약 원천무효를 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 디엘에프 피해자는 물론 금융정의연대·금융소비자원 등 주요 시민단체들은 불완전판매뿐 아니라 은행의 ‘사기성’을 입증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 금융소비자원 주최 디엘에프 피해자 공동소송 설명회에 나섰던 법무법인 로고스의 전문수 변호사는 “은행권 영업행태가 불완전판매를 넘어서 피해자들을 속이는 ‘사기’ 성격도 큰 사례들이 다수 드러나고 있어 사기로 인한 ‘원천무효’까지 함께 주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세라 기자 sera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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