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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ForKyoani `방화참사` 쿄애니의 40년 발자취

매일경제 홍성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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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ayForKyoani `방화참사` 쿄애니의 40년 발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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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쉽게 읽는 서브컬처-71] 최악의 테러였다. 2019년 7월 18일 오전 10시 35분, 일본 교토부 교토시에 위치한 교토 애니메이션(이하 쿄애니) 제1스튜디오 건물. 빨간 티셔츠를 입은 수상한 남자가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이 남성의 이름은 아오바 신지(41). 피의자는 이내 건물 내부에 휘발유를 뿌리고 불을 질렀다. 이 방화로 제1스튜디오 건물은 전소됐고 34명이 숨졌다. 일본의 경제 보복으로 인해 한일 관계가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는 상황이지만, 무고한 이들이 목숨을 잃은 비극적 사건은 전후 사정을 떠나 슬퍼하고 분노하고 추모할 일이다.

방화 사건을 다룬 국내 언론 기사에서는 쿄애니에 대해 '1981년 설립된 애니메이션 제작사' '지브리 스튜디오 같은 대형 업체와 협력 작업' 등 단편적인 내용만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쿄애니가 애니메이션 업계에 남긴 족적은 생각보다 넓고 깊다. 쿄애니의 40년 발자취를 살펴본다.


◆'고퀄리티 제작사' 쿄애니의 시작

주식회사 교토 애니메이션은 1981년 애니메이션 제작 하도급업체로 출발했다. '만화의 신' 데즈카 오사무가 설립한 무시 프로덕션에서 근무했었던 핫타 요코가 인근 주부들과 함께 채색 마무리 작업 하도급을 받아 작업한 것이 쿄애니의 시작이다. 1985년 남편 핫타 히데아키가 사장을 맡으면서 법인화, 본격적인 하도급업체로 자리 잡았다. 하도급업체 시절부터 높은 퀄리티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실력을 인정 받아 일감이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최고 수준의 작화와 연출로 전설처럼 회자되는 극장판 애니메이션 '초시공요새 마크로스 사랑 기억하고 있습니까'(1984), 스튜디오 지브리의 장편 애니메이션 '마녀배달부 키키'(1989) '붉은 돼지'(1992)에도 참여했다.

◆하도급에서 원도급으로…실력으로 증명한 존재감

하도급업체에서 출발한 쿄애니는 2002년 직접 제작에 나선다. 다쓰노코 프로덕션과 합작한 '너스위치 코무기짱 매지카르테'라는 OVA 작품이 그것이다. 1화, 2화 원도급 제작에만 참여한 '너스위치'와는 달리, '풀 메탈 패닉? 후못후'(동명 원작의 TV 애니메이션 2기)는 작품 전체를 쿄애니가 자체 제작한 첫 번째 작품이다. 작품 자체의 완성도는 물론이고 작화와 연출 모두 뛰어나 풀 메탈 패닉 애니메이션 시리즈 중 최고의 흥행 성적을 기록했다.


2005년에는 빼어난 시나리오와 음악으로 걸작의 반열에 올라선 Key사(社)의 연예 어드벤처 게임 '에어(AIR)'를 애니메이션화했는데 당시 TV 애니메이션 수준을 아득히 넘어선 극장판 수준의 작화를 선보였다. 쿄애니 간판 감독인 이시하라 다쓰야(石原立也)의 데뷔작이기도 하다.

풀 메탈 패닉? 후못후

풀 메탈 패닉? 후못후


◆세계를 강타하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2006년은 쿄애니의 최전성기를 알리는 신호탄이자, 전 세계 애니메이션 업계에도 큰 흔적을 남긴 해였다. 쿄애니의 TV 애니메이션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이 공전히의 히트를 기록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다니가와 나가루 원작의 라이트노벨 '스즈미아 하루히의 우울'을 원작으로 한 학원물 애니메이션으로 일본 내에서는 그해의 최고 흥행작으로 자리매김했고, 전 세계적으로도 센세이션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인기를 끌었다. 혹자는 스즈미야 하루히 신드롬, 일명 하루히즘을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영향력에 비견하기도 한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은 심야 애니메이션의 최고 흥행작으로 알려졌으며, 라이트노벨 원작의 미디어 믹스가 활발하게 전개되도록 한 시발점으로 평가 받는다. 마니아들이 작품 속 숨겨진 메시지를 분석하고 복선을 찾아내고 2차 창작을 통해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어뒀고, 팬들은 이에 호응해 자발적인 붐을 조성했다. 무엇보다 미소녀 '모에(萌え·매력적인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면서 이후 작품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2006년 제11회 애니메이션 고베 작품상과 2007년 도쿄 국제 애니메이션 페어 작품상을 수상했고, 일본 문화청 주관 일본 미디어 예술 100선에도 선정됐다.

2007년에는 '에어'의 원작게임을 제작한 Key사의 '클라나드(CLANNAD)'도 애니메이션화 했다. 캐릭터들의 눈이 지나치게 커서 부담스럽지만 그 허들만 넘어서면 '인생 애니메이션'이라고 할 정도로 평가가 좋다. 오타쿠 여학생의 일상을 그린 '러키☆스타'도 이 시기 작품이다.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모에 열풍은 계속된다 '케이온!'


고등학교 밴드부(경음악부)에 입부해 밴드를 결성한 여고생들의 이야기를 다룬 애니메이션 '케이온!'(2009)은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이후 다시 한번 메가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부침을 겪으며 한때 위상이 흔들렸던 쿄애니를 부활시킨 공신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의 인기에 힘입어 원작 만화도 덩달아 인기를 끌었고, 애니메이션 엔딩 곡은 일본 오리콘 차트 데일리 싱글 부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는 애니메이션 캐릭터 송으로서는 최초의 1위 기록이다. 극 중 인물들이 사용한 악기와 헤드폰 등은 판매량이 늘어나고 한때 품귀 현상으로 프리미엄이 붙기도 했다. 닛케이마케팅저널은 케이온!을 2009년 대표 히트상품으로 꼽기도 했다.

쿄애니의 특징 중 하나는 학원물, 그중에서도 고교생의 동아리 활동에 관련된 작품들이 많다는 점이다. 고전부 학생들의 일상을 그린 빙과(2012), 수영부 이야기를 다룬 '프리!'(2013), 취주악부 부원들이 주인공인 '울려라! 유포니엄'(2015) 등 쿄애니를 대표하는 타이틀 대부분이 고교생의 일상을 다룬 작품이다.

케이온!

케이온!


◆뜰 만한 작품 직접 발굴…'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주로 검증된 원작이 있는 작품을 애니메이션으로 만들어왔던 쿄애니는 직접 작품을 발굴해 제작하는 방식으로 근본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쿄애니는 2009년부터 소설, 만화, 시나리오 공모전 '교토 애니메이션 대상'을 직접 주관하고 있는데, 해당 공모전에서 수상한 작품들을 KA에스마 문고라는 자체 라이트 노벨 브랜드를 통해 출간하거나,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하고 있다. 자사의 풀 안에서 미디어믹스 전략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제1회 소설부문 장려상 수상작인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는 KA에스마 문고와 쿄애니를 통해 각각 소설과 애니메이션으로 나온 첫 작품이다. 주인공이 중2병 시절 자기 소개를 하며 "토가시 유타다. 이 팔의 붕대는 이유가 있어 풀 수 없다. 흑염룡이 날뛰고 말아서 말이지"라고 말한 괴이한 대사가 잘 알려져 있다. 교토 애니메이션 대상을 통해 애니화된 작품으로는 '경제의 저편'(2013), 프리!(2013), 무채한의 팬텀 월드(2016), 바이올렛 에버가든(2016) 등이 있다.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중2병이라도 사랑이 하고 싶어!


◆넷플릭스와 손잡고 글로벌 무대로 '바이올렛 에버가든'

글로벌 OTT 서비스의 대표주자인 넷플릭스는 현지 시장에 최적화된 오리지널 콘텐츠 제작을 늘리고 있다. 일본에서는 주요 애니메이션 제작사들과 손잡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을 내놓고 있는데, 쿄애니의 '바이올렛 에버가든'(2018)도 넷플릭스의 투자를 받아 제작된 작품이다. 제5회 교토 애니메이션 대상 수상작인 아카츠키 카나의 라이트노벨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사람들의 편지를 대필해주는 자동수기인형으로 일하는 주인공 바이올렛 에버가든의 이야기를 다룬다. 한국에서도 넷플릭스를 통해 독점 방영 중이다.

바이올렛 에버가든

바이올렛 에버가든


◆비극을 딛고, 좋은 작품으로 재기하는 그날까지

쿄애니는 양질의 작품으로 전 세계 팬들을 매료시켰던 실력파 제작사지만, 그와 별개로 직원의 복지와 근로 환경, 고용 형태 등에서도 모범이 되는 '좋은 기업'이기도 했다. 다른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이 주로 프리랜서 애니메이터들을 고용하거나, 하도급 작업의 비중이 큰 것과 달리 애니메이터 전원을 봉급을 받고 정시 출퇴근하는 정직원으로 채용한다. 사내에 탁아소를 운영할 정도로 여성 친화적인 기업이기도 했다. 과도한 폭력이나 성적 묘사도 지양하고, 일본 애니메이션 업계에서 간간이 불거진 극우 및 혐한 논란도 없었다.

직원 수 160명 남짓의 작은 회사에서 68명의 사상자가 나왔다. 사망·실종자 중에는 지금의 쿄애니를 있게 한 베테랑들도 많다. 곳곳에서 쿄애니 재건을 위한 모금 활동이 벌어지고 있지만, 쿄애니를 이끌어 가던 사람들의 부재는 돌이킬 수 없다. 슬픔을 추스르기도 버거운 지금, 큰 상처를 입은 쿄애니가 다시금 명가(名家)로 우뚝 서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부활을 염원하고 응원하게 되는 건 지난 40년간 그들이 보여준 한결같은 열정 때문이다.

"잠시만 시간을 주십시오. 교토 애니메이션은 앞으로도 온 세상 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감동을 키워주는 애니메이션을 전하고, 사원, 스태프의 행복을 실현해 사회와 지역에 공헌해 나가기 위해, 손을 뻗어주시는 분들과 함께 필사적으로 싸워나가겠습니다." (지난 22일 핫타 히데아키 대표이사 사장이 내놓은 메시지)

방화 사건으로 전소된 일본 교토시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건물 앞에 추모의 꽃다발이 놓여 있다. /사진=교토 로이터 연합뉴스

방화 사건으로 전소된 일본 교토시 `교토 애니메이션` 제1스튜디오 건물 앞에 추모의 꽃다발이 놓여 있다. /사진=교토 로이터 연합뉴스


[홍성윤 편집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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