前사법수장 사상 처음 피고인석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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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사상 처음으로 전직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29일 피고인 신분으로 형사 법정에 섰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수감 중)과 박병대(62), 고영한 전 대법관(64)은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 등의 첫 공판에 출석해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의 공소장은 근거 없는 소설의 픽션”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검찰은 “검찰에 대한 근거 없는 모욕 수준”이라며 반박했다.》
“검찰의 공소장은 소설가가 미숙한 법률 자문을 받아서 쓴 소설 같습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71·사법연수원 2기·수감 중)은 29일 자신의 첫 정식 재판에서 검찰의 공소 사실을 전면 부인하며 이렇게 주장했다. 전직 대법원장이 사법연수원 24기 후배이며 열아홉 살 어린 서울중앙지법 형사35부 박남천 부장판사 앞에서 피고인 신분으로 무죄를 호소한 것이다.
재판 개입 등의 혐의를 받고 있는 양 전 대법원장은 구속 수감 125일 만인 이날 오전 10시 서울법원종합청사 417호 대법정에 출석했다. 먼저 법정에 나와 피고인석에 앉아 있던 박병대(62·12기) 고영한(64·11기) 전 대법관이 일어나 양 전 대법원장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세 사람 모두 직업을 묻는 재판부의 질문에 “직업이 없습니다”라고 답했다. 6시간 넘게 이어진 재판이 끝나자 양 전 대법원장은 박, 고 전 대법관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한 뒤 법정을 빠져나갔다.
○ 양승태 “공소장은 픽션”… 검찰 “어처구니없다”
양 전 대법원장은 모두 진술에서 25분간 검찰 수사를 강하게 비판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이 말한 공소 사실의 모든 것은 근거가 없는 것이고, 어떤 것은 정말 소설의 픽션 같은 이야기”라고 주장했다. 이어 “법관 생활을 42년 했지만 이런 공소장은 처음 봤다”며 “법률 문서라기보다 한 편의 소설”이라고 했다. 또 “온갖 재판 거래를 한 것으로 상상력과 창의력을 발휘해서 줄거리를 만들어내곤 결론 부분에선 재판거래는 온데간데없다. 용은커녕 뱀도 제대로 그리지 못한 격”이라고 주장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특히 재판 거래는 없었다고 강조했다. “재판 거래를 했다고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지만 조사해 보니 재판 거래라고 할만 한 건 없었다.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 바로 이런 것”이라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또 “권투하는 데 상대방 눈 가리기”, “골대도 없이 축구하자는 것”, “근사한 포장으로 소비자를 현혹” 등 다양한 표현으로 검찰의 공소장이 적법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자신이 방어권을 행사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고 했다.
양 전 대법원장은 검찰의 수사 방식도 문제 삼았다. “(검찰이) 나의 취임 첫날부터 퇴임 날까지 모든 직무행위를 샅샅이 뒤져서 법에 어긋나는 것이 없나 찾았다”며 “이것이 과연 수사인가. 사찰이 있다면 이런 것이 사찰”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검찰 측은 “피고인이 여러 주장을 했는데 어처구니없는 부분이 많다. 검찰에 대한 근거 없는 모욕 수준”이라고 반발했다. 이어 “향후 공판에서 언급되지 말아야 할 주장은 재판장이 엄격히 제재해 주길 바란다”고 요청했다.
○ 박병대 “말잔치 무성”… 고영한 “송구”
양 전 대법원장의 공범으로 기소돼 불구속 상태에서 재판을 받고 있는 박, 고 전 대법관도 혐의를 부인했다. 박 전 대법관은 “검찰 공소장은 알맹이, 실체보다는 부적절한 보고서 작성이 주종을 이루고 있다. 재판 거래니 사법 농단이니 말잔치만 무성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검찰 수사기록을 보니 많은 법관이 때로는 겁박당한 듯이 보이고, 때로는 훈계와 질책을 받은 것 같아 억장이 무너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또 “지금 이 처지가 되니 매사에 좀더 삼가고 절제했다면 좋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고 전 대법관은 재판에 임하는 심경을 미리 적어와 낭독했다.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이 자리에 선 것만으로 국민에게 심려를 끼치고 사법부에 부담을 주게 돼 송구스럽다”고 말했다. 이어 “내 가슴을 천근만근 무겁게 하는 것은 이 사건으로 사법부에 대한 신뢰가 크게 훼손된 것”이라며 “이 재판을 통해 그간 잘못 알려진 진실이 명명백백히 밝혀져 사법부에 대한 국민 신뢰를 회복하는 전환점이 되길 바란다”고 호소했다.
김예지 기자 ye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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