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물수수와 성범죄 의혹을 받고 있는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지난 9일 서울동부지검으로 들어서고 있다. 서재훈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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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검사장까지 지낸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이 입을 딱 닫았다. 그저 묵묵부답이다. 앞서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등 사법농단 사건으로 조사받던 고위 법관들도 그랬다. 진술거부권이 공적 책임이 막중한 법률전문가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28일 한국일보 취재에 따르면 김 전 차관은 지난 16일 구속 이후 열흘 넘게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고 있다. 구속된 다음날에는 “아직 변호인과 면담하지 못했다”며 검찰의 출석 요구를 거부하더니, 19일에는 출석하되 묵비권으로 일관했다. 이후에도 여러 차례 “건강이 좋지 않다”거나 “진술거부권을 행사하겠다”고만 말하고 조사실에 잠깐 머물다 구치소로 되돌아갔다고 한다. ‘건설업체 윤중천을 어떻게 알게 됐는가’라는 기초적 수준의 질문에도 대답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어떤 증거를 들이밀지 모르는 상황에서 섣불리 진술하다 꼬투리가 잡히느니, 차라리 재판에 넘어가 법정에 검찰의 증거가 제시되면 그 때 자신의 주장을 펼치겠다는 뜻으로 보인다. 특히 김 전 차관은 윤씨를 만나게 된 경위 자체가 뇌물죄 입증의 주요 단서라는 얘기가 나오는 상황이어서 더 몸을 사릴 수 밖에 없다. 실제 김 전 차관 측은 아직 윤씨를 안다고 할지 모른다고 할지, 안다고 한다면 어느 정도 안다고 할 지도 정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법조계에선 고위급 법률가들의 이런 행태를 두고 탄식을 쏟아내고 있다. 진술거부권의 취지에 대해 대법원은 “형사책임과 관련해 비인간적인 자백의 강요와 고문을 근절하고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보장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것인데 공적 책임이 막중한 자리에 있었던 고위 법률가들만 이를 써먹고 있다는 얘기다.
실제 형사 사건에 연루된 일반인들이 진술거부권을 적극적으로 쓰는 경우는 드물다. 수사협조 여부에 따라 기소 범위에 차이가 날 수 있어 겁을 먹거나, 이후 이어질 수사와 재판 과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하다 보니 진술거부권을 활용할 생각을 미처 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결국 진술거부권은 법률적 지식이 풍부하거나, 돈으로 그 지식을 살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활용되는 셈이다.
재경지검의 한 검찰 간부는 “피의자의 권한이라는 점에서 어쨌든 존중 받아야겠지만 형사사법 시스템의 일원으로 검찰 고위 간부를 지낸 사람까지 무슨 스포츠나 게임하듯 판단하고 행동한다는 것은 씁쓸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법조계 관계자는 “진술거부권도 보호받아야 하지만, 사회 고위층 수사에서 유독 도드라진다는 점은 반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최동순 기자 doso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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