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병완 민주평화당 의원/사진=홍봉진 기자 |
1980년 2월, 나는 해병 중위로 군복무를 하던 중 스물여덟의 나이로 결혼을 했다. 아내는 결혼식 한 달 후인 3월부터 조선대 교수로 근무하게 돼 주중에는 광주에 내려가 시댁에서 지내고 주말에는 서울의 신혼집에 올라오는 생활을 해야 했다.
그해 늦봄의 어느 토요일 아침, 아내는 임신 중인 몸으로 서울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그게 5월 17일이었다. 그리고 5월 18일, 나는 군인으로서의 일상 속에서 그날을 맞고 또 보내야 했다.
많은 이들이 그렇듯 나 역시 광주에 부채의식을 안고 있다. 광주항쟁에 참여했던 모든 이들과 희생자들에게 우리 모두는 큰 빚을 지고 있지 않은가. 그 시절 나는 임신한 아내가 무사히 집에 돌아올 수 있었던 것에 가슴을 쓸어내리기나 했던 무력한 군인일 뿐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한참 흐른 뒤, 광주에 작은 힘을 보탤 기회가 내게 왔다.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은 후보 시절 광주에서 5‧18 기념재단에 대한 예산 지원을 약속했다. 하지만 막상 대통령이 된 뒤에도 여소야대 상황에서 지원의 근거를 마련하기가 어려워 시간만 흐르고 있었다. 당시 5‧18 기념재단은 200억원 수준의 지원을 기대하고 있었지만 이 정도 규모의 예산이 국회를 통과하기 위해서는 법적 지원근거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2004년 3월, 나는 예산실장으로 임명된 뒤 일단 광주로 내려가 며칠에 걸쳐 조비오 신부, 윤한봉 선배, 지선 스님, 강신석 목사 등 5‧18 주역들을 모두 만났다. 왜 200억원을 필요로 하냐고 물으니, 이 분들은 기금모금 목표는 500억원 수준이고 그 이자로 5‧18기념재단을 운영할 계획인데 정부에서 우선 200억원 수준을 지원 받을 생각이라고 대답했다.
순간 번뜩 아이디어가 하나 떠올랐다. 국가가 5.18 기념재단에 200억원을 일시에 지원하기는 어렵지만 추진하고 싶은 개별 사업에 대해서는 지원해줄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5‧18 기념재단도 종잣돈이 아니라 당장 사업을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그렇게 하기로 5.18 주역분들과 합의를 이루어 내고 보고를 드리자 노 대통령께서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지금 5‧18 기념재단은 민주인권상시상식 등 여러 사업을 통해 5‧18 정신의 세계적 확산에 큰 기여를 하고 있다. 광주가 한국의 민주화 성지를 넘어 아시아의 민주화 성지로 발전하고 있는 셈이다.
이렇듯 어려워 보였던 5‧18 기념재단에 대한 예산 지원 문제가 풀린 것처럼 지금 우리에겐 5‧18 역사왜곡 처벌 특별법의 제정과 5‧18 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출범이 시급하다. 또 다시 5월이다. 5‧18 민주묘지 앞길엔 이팝나무들이 소복한 흰 꽃을 피우고 있다. 강대강 대치만 있고 정치가 실종된 국회, 5‧18의 역사적 의미를 바로세우고 왜곡과 폄훼를 멈출 국회의 활동이 절실히 필요한 시점이다.
장병완 민주평화당 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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