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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6 (화)

이슈 5·18 민주화 운동 진상 규명

전두환 5·18 진압 뒤 ‘30~40명 극형 처단’ 보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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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수부 조치 내용’ 군 문서 입수

“처벌 범위 500명 정도로 결정…주요 임무 수행자 극형 처단”

“내란·소요죄 여부는 정책적 결정…김대중이 내란 수괴여야”

합수부, 본부장 전씨에게 보고…5·18 뒤 관여한 또다른 증거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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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88) 전 대통령이 5·18 민주화운동을 강제로 진압한 뒤 5·18 연루자들의 극형 여부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는 군 문서가 나왔다. 전씨가 회고록에서 5·18 당시 광주 현장의 상황은 자신과 무관하게 벌어진 일이라고 주장한 것과 달리 5·18 민주화운동 전후에 직간접으로 연루됐다는 또 하나의 증거로 보인다.

13일 <한겨레>가 확보한 ‘합동수사본부 조치 내용’이라는 군 문서를 보면, 전두환 당시 합동수사본부장에게 ‘광주사태’ 처리 방향을 검토 보고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 문서엔 ‘검사 2명과 중앙정보부 수사관 2명 등 4명이 광주에 가 수사 상황을 검토’했다는 문구가 있다. 이 문서 건의사항으로 ‘처벌 범위 500명 정도로 결정’과 ‘주요 임무 수행자 3~40명(30~40명을 뜻하는 표현)은 극형 처단’이라는 대목이 적혀 있다. 실제로 1980년 10월25일 계엄사 1심 군사재판에선 255명의 5·18 관련자 가운데 5명에게 극형에 해당하는 사형을 선고하고 무기징역(7명), 징역(163명), 집행유예(80명) 등을 선고했다.

이 문서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을 조작했다는 내용을 합동수사본부에 보고했던 정황을 보여주고 있다. 합동수사본부는 1979년 10월27일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10·26 사건을 수사하기 위해 계엄포고령 제5호로 설치한 기구로, 정보기능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 문서를 보면 전남합수단은 5·18을 김대중 내란사건으로 조작하기 위해 80년 5월5일 정동년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자택에서 정부 전복계획을 말한 뒤 500만원을 수수한 내용을 포함하도록 지시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실제로 정씨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내란을 음모했다는 혐의를 부인하기 위해 제시한 완도읍 한 여인숙의 숙박부도 80년 5월29일 찢어 변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전남합수단은 보안대를 중심으로 중앙정보부·검찰·육군범죄수사단·헌병 등에서 차출된 수사요원 80여명으로 구성돼 5·18 관련자들에 대해 수사했다. 허장환 전 505보안대 특명부장은 <비겁한 아버지는 될 수 없었다>(1998)에서 “수사 과정에서 가장 신경을 쓴 대목은 김대중씨와 범죄사실을 연계시키는 것이었다. 재야에선 홍남순 변호사를 수괴로 만들고, 학생 수괴로는 전남대 복학생 정동년씨로 정했다”고 기술했다. 또 이 책엔 “군 재판부의 공판이 진행되기도 전에 송치된 자의 형량을 505보안부대와 군 검찰 및 재판부가 사전에 형량을 확정했다”는 대목도 나온다.

5·18 수사 과정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학생운동권과 내란죄로 엮으려고 했다는 정황도 이 문서에 포함돼 있다. 전남합수단의 건의사항으로 ‘내란 또는 소요죄 제기 여부는 정책적 결정. 단 광주시민은 김대중이 내란 수괴라야 납득’이라는 말도 등장한다. 이 문서엔 5·17 이전 학생 등의 행위를 내란 공모로 확정한 뒤 5월22일 이후 소요도 내란으로 본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정수만 전 5·18유족회장은 “보안사령관 자리와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사건 수사를 위해 설치된 합동수사본부 본부장 직책까지 겸임했던 전씨에게 김 전 대통령과 5·18 연루자의 향후 처리 방향까지 보고했다는 증거”라고 지적했다.

이 문서엔 ‘광주사태 난동자 수사 계획 보고’ 사실도 합동수사본부장에게 보고했다고 나와 있다. 특히 신군부의 시민발포 명령을 거부했던 안병하 전 전남 도경국장과 관련해 “안씨 등 주요 직위자는 합수부에서 직접 수사하라”는 내용이 포함돼 주목된다.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공동저자 이재의씨는 “12·12 쿠데타와 5·17 내란을 통해 실권자로 부상한 전씨가 5·18 사후 처리에도 깊숙이 관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전씨는 2017년 4월 낸 회고록에서 “발포 명령을 하지 않았다는 것이 밝혀져 학살자 누명을 벗었다”고 주장하는 등 5·18 전후 광주와의 관련성을 부인해왔다.

정대하 기자 daeha@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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