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따라잡기]
배우들 특수 속옷 준비부터 사전 리허설까지
인권 침해 발생하지 않게 감독·조율하는 역할
美 유명 방송사 HBO “모든 촬영에 동행할 것”
지난 1월 넷플릭스에서 방영돼 큰 인기를 모은 화제작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포스터. [사진 넷플릭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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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이 드라마의 성공에는 숨은 공신이 있다고 합니다. 바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intimacy coordinator)’를 담당한 이타 오브라이언인데요. 이름조차 생소한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들은 베드신 등 육체적으로 친밀한(intimate) 장면을 촬영할 때 사전에 수위를 조율하고, 촬영장에서 배우들의 인권이 침해되지 않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오브라이언은 영국 일간지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스턴트 감독이 액션 배우들의 동선을 설계하면서 부상을 방지하듯,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들은 애정신에서 배우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안무 짜듯 연출하면서 그들이 정서적으로 상처받지 않도록 돕는다”라고 자신의 직업을 소개했습니다. 쉽게 말하자면 ‘베드신 전문 감독’인 거죠.
이들이 단순히 ‘인권 수호자’ 역할에 그친다고 생각하면 오산입니다. 비영리단체 ‘인티머시 디렉터 인터내셔널’에 따르면 대부분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들은 영화나 연극, 무용을 전공한 뒤 많게는 수십년의 무대 경험을 쌓은 예술인입니다. 또 이들 대부분은 여성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오브라이언 역시 영국 최고의 드라마 스쿨인 브리스톨 올드빅 시어터와 국제적인 발레교육기관 로열 아카데미 오브 댄싱에서 연극과 발레를 배웠습니다. 예술적 동작을 만들고 무대에 올린 경험을 살려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직업까지 이르게 된 것이죠. 하지만 2014년 활동을 시작할 당시엔 큰 빛을 발하지 못했습니다. 대형 엔터테인먼트 회사와 방송국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고용하기 시작한 것은 2017년 할리우드에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벌어진 뒤의 일이죠.
인티머시 코디네이터 이타 오브라이언이 키스신을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사전에 동의된 내용과 동작들을 확인하는 모습. [사진 가디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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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한국까지 강타한 미투 운동의 모태는 2017년 할리우드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뉴욕타임스(NYT)를 통해 할리우드의 거물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범죄 전력이 폭로된 것을 계기로 전 세계적인 미투 운동이 일었습니다. 앤절리나 졸리, 기네스 펠트로 등 유명 여배우들이 와인스타인에 당한 피해 사실을 폭로하고 70명이 넘는 영화 관계자 등이 와인스타인을 고발하기도 했습니다.
또 이들은 와인스타인을 처벌하는 것으로 미투 운동이 끝나서는 안 된다고 호소했습니다. 배우와 감독 사이의 권력 불균형, 거물급 관계자의 추천으로 이뤄지는 캐스팅, 애정신에 대한 구체적 논의 없이 이뤄지는 촬영 계약 등 구조적 문제가 와인스타인 같은 괴물을 낳았다는 의미죠. 레아 세두, 마리아 슈나이더 등 여배우들은 촬영장에서 감독이 배우에게 계약에 없었던 애정신을 갑작스럽게 요구하거나 강압적인 분위기에서 원치 않는 촬영을 강행해야 했던 경험을 털어놓기도 했습니다.
결국 미투 운동이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라는 새로운 직종을 탄생시킨 셈입니다. NYT는 지난 1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들이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소개했습니다. 신체 접촉과 노출 수준을 미리 협의하는 일은 물론 베드신에서 성기가 직접적으로 닿지 않도록 하는 특수 속옷을 준비하는 일까지 베드신의 A부터 Z가 이들의 손에 달려있습니다. 이들이 동행한 촬영장에서는 모든 성적 동작이 각본에 따른 리허설을 거친 뒤 시작된다고 합니다. ‘즉흥 연기’에 대한 요구가 자칫 성범죄로 이어지는 것을 막겠다는 취지입니다.
감독과 배우들은 만족을 표시합니다.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 감독인 벤 테일러는 오브라이언과 함께 촬영을 진행한 후 “(베드신에 대해 논의하는 것을 꺼리는) 촬영장의 관행을 깨고 적극적인 의사소통을 시작한 것은 값진 경험이었다”고 NYT에 밝혔습니다.
아일랜드의 배우 데미언 몰로니는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배우들은 베드신을 찍기 전에 심한 불안감과 수치심을 느끼게 된다”며 “인티머시 코디네이터와 함께 일하면 이 장면들이 오로지 각본에 의한 것이며 충분한 설계를 거쳤다는 사실을 스스로 납득하게 된다”고 했고요.
인티머시 코디네이터를 고용한 것은 넷플릭스뿐만이 아닙니다. 미국의 유명 방송사 HBO는 지난해 10월 “베드신이 포함된 모든 작품은 인티머시 코디네이터가 지켜보는 가운데 촬영할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런 변화가 한국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 기대되는군요.
홍지유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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