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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4.25 (목)

이슈 끝나지 않은 신분제의 유습 '갑질'

대표적 '을' 경비원들 갑질과 고용불안에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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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

“꿇고 일이나 하라”

이달 6일 서울 강남구 삼성동 I 아파트에서 경비원 A(43)씨를 상대로 입주민 권모(43)씨가 내뱉은 발언이다. 권씨는 A씨의 인중을 두 차례 때리며 낭심을 무릎으로 가격하고 10분간 폭언을 했다. 이 사건은 한국사회 갑을 문화의 단면을 보여준다. 특히, 이 아파트가 사회 지도층 인사들이 거주하는 것으로 알려진 초호화 아파트인 만큼 사회적 지위의 차이가 폭언과 폭행으로 이어졌다는 분석이 나온다. 잇따라 드러나는 경비원 상대 갑질 사건에 더해 사회적 지위가 낮다는 편견과 고용불안 속에서 경비원들은 삼중고를 겪고 있다.

20일 정의당 갑질신고센터에 따르면 제주시 노형동의 한 아파트에서 경비원 송모(75)씨가 2014년부터 올해까지 입주민 A(58)씨로부터 “내가 자치회장이니깐 왕이다”며 쓰레기를 치우라거나 큰 목소리로 인사하라고 강요한 것으로 드러났다. A씨의 갑질로 이 아파트에서 그만둔 경비원만 10여명에 달한다. 지난해 10월에는 서울 서대문구의 한 아파트에서 40대 입주민이 만취 상태로 70대 경비원을 때려 뇌사에 빠뜨린 사건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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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사회에 갑질 문화가 만연해왔던 것은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시장조사전문기업 엠브레인 트렌드모니터가 지난해 발표한 성인 1000명을 대상 설문조사에서 전체의 95.1%가 한국의 갑질 문화가 심각하고 개선이 매우 시급하다고 답했다. 설문 대상자 중 45%는 대표적인 ‘을’로 아파트 경비원을 꼽았다. 광주시 비정규직지원센터가 2017년 아파트 경비원 212명을 대상으로 실태를 조사한 결과 29.7%가 입주민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응답하기도 했다.

경비원 대상 갑질 사건이 이어지는 근본적인 원인으로는 불안한 고용 상황이 손꼽힌다. 대부분의 경비원들은 아파트 관리사무소에 직접 고용되는 대신 용억업체에 비정규직으로 고용된다. 경비원들은 입주민과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면 곧 계약 해지 위험에 놓인다고 두려워한다. 또 입주민들이 납부하는 관리비 일부가 경비원의 급여로 사용되는 탓에 입주민과 경비원의 관계는 일종의 고용주와 노동자 사이라는 인식도 있다.

최저임금 인상이 경비원들의 고용불안을 더 가중시키고 있다는 의견도 있다. 올해 최저임금은 시간당 8350원으로 지난해보다 820원(10.9%) 올라 경비원들의 인건비도 따라 상승했다. 경비원들 임금이 오르는 것은 관리비 상승과 직결되기 때문에 일부 아파트에서는 경비원들의 휴게시간을 늘리거나 인력을 감축하자는 논의가 이어지고 있다. 서울 강남구의 한 아파트 경비원 이모(73)씨는 “최저임금이 올랐다고 해서 경비원들이 마냥 좋아하는 것만은 아니다”며 “관리비가 늘어 동반된 부담이 그대로 경비원들에게 돌아올 것”이라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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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비원이 최소한의 호신을 하도록 규정한 관련법도 현실에서는 유명무실하다. 현행 경비업법은 경비원이 근무 중 단봉이나 분사기 등을 휴대해 자신의 몸을 지키고 우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을’의 입장인 경비원이 입주민의 폭행에 대처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회적 인식과 고용 체계가 개선되지 않으니 법·제도도 보호막 구실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윤상철 한신대 교수(사회학)는 “부모의 재력을 그대로 물려받는 등 사회의 계층이 고착화되면서 자신을 영원한 ‘갑’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진다”며 “자신의 지위에 대한 성찰 없이 사회적 힘만 강하다보니 갑질 사건이 발생한다”고 평가했다. 윤 교수는 이어 “자본주의가 정착된지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사회 의식은 여전히 제자리걸음”이라며 “모든 직업이 소중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청윤 기자 pro-verb@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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