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 송도에 있는 한 외국계 기업에서 근무하는 김윤희(29) 씨는 회사 근처 월세집을 구해 혼자 산다. 서울 월계동 본가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회사까지 세 번이나 환승해야 하는데, 이마저도 2시간 30분이 넘게 걸리는 출근 시간을 감당할 수 없어 내린 결정이다. 수도권광역급행철도(GTX)가 준공되면 결혼 전까지 부모님 댁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지만, 이 역시 요원하게 됐다.
수도권 직장인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제대로 누리려면 아직 갖춰야 할 것들이 더 필요해 보인다. 정부가 전국에 도로·철도 건설, 지역특화산업 육성 등 24조원 규모 사업에 ‘예비타당성(예타) 조사 면제’라는 선물꾸러미를 던졌지만, 수도권 교통 확충의 핵심으로 꼽힌 사업들은 무더기로 제외됐기 때문이다. 특히 인천과 분당신도시, 김포한강신도시 등에 사는 직장인들의 출퇴근 시간이 현 정부의 임기 안에 1시간 이내로 단축되기는 어려워졌다.
정부가 29일 발표한 국가균형발전 장기프로젝트에 따르면, 고읍과 옥정을 연결해 양주 신도시 교통을 개선하는 7호선 연장 사업과 위례 트램만 예타 면제 대상에 포함됐다.
인천 송도와 서울을 잇는 광역급행철도(GTX)-B 노선, 김포 지하철 5호선 한강선(가칭), 서울 서북부 지하철 3호선 연장과 8호선 연장선(별내선) 등은 올해 안에 예타를 마치도록 추진하거나 지자체와 빠르게 협의하겠다는 수준으로 마무리됐다.
예비타당성 조사란 국가재정법 제18조와 시행령 제13조에 의거해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면서 국가의 재정이 300억원 이상 투입되는 건설, 국가연구개발 사업 등은 경제성과 정책성에 대해 사전에 평가를 받는 제도다. 국가 재정을 선심성 지방 사업에 투입하지 못하도록 지난 1999년 제정됐다. 경제성과 지역균형 등을 고려하는 예비타당성 조사는 보통 6개월 정도 걸린다. 예타를 통과하더라도 설계, 사업 예정 지역 거주자에 대한 보상, 착공, 건설 등 후속 작업에 수 년이 걸린다.
이 때문에 정부가 지역균형발전이란 원칙에 얽매여 개선이 시급한 수도권 교통망 확충에 소홀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수도권 교통망을 신속하게 확충하겠다던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과도 어긋난다.
문 대통령은 19대 대선 당시 수도권 광역급행열차 확충과 ‘대도시권 광역교통위원회’ 신설 등을 내걸었다. 현 정부가 도입한 ‘출퇴근 시간 의무기록제’와 ‘주 52시간제’ 등 정책은 모두 문재인 대통령이 고배를 마신 18대 대선부터 밀어온 ‘저녁이 있는 삶’ 구상과 연결돼 있다. 수도권 직장인들은 교통망이 개선되지 않는 한, 아무리 정시에 퇴근해도 아침저녁으로 2~3시간을 길에서 버려야 하는 셈이다.
이번 결정은 수도권 쏠림 현상을 완화하기 위해서라는 게 정부의 입장이지만, 수도권에 본사를 둔 기업들과 거주민들 생각은 다르다. GTX-B 노선의 예타 면제에 기대를 걸었던 인천 송도의 경우, 포스코건설 등의 송도 사옥에 근무하는 직원 2100여명 중 4분의 1인 450명 정도는 서울 등 다른 지역에서 통근버스로 출퇴근한다. 이 외에도 직원 수가 1600명에 육박하는 셀트리온, 합산 직원 수가 3000여명인 삼성바이오로직스와 삼성바이오에피스, 2900명 이상이 몸 담은 코오롱글로벌 본사 등이 자리를 잡았다.
포스코그룹 계열사의 한 직원은 "통근버스는 정해진 시간에만 탈 수 있고, 그 마저도 1시간 안팎이 소요된다"며 "GTX가 들어서 서울에서 출퇴근하기 편해지면 송도에서 근무하는 직원들 삶이 여러 모로 윤택해지는 것은 물론이고, 현지 기업들이 타 지역 인재를 채용하는 데도 도움이 되지 않겠나"고 말했다.
지난 달 착공한 A노선은 경기도 파주시 운정신도시와 화성시 동탄신도시 등을 서울역과 서울 삼성을 잇고, 최근 몇 년 만에 예비타당성 조사를 통과한 C노선은 서울 청량리와 삼성, 양재 등을 경기도 양주시 덕정, 의정부시, 수원시로 연결한다. 인천을 제외한 경기권 주요 도시가 서울 강남으로 1시간 안에 연결되는 셈이어서 인천 지역민들은 ‘광역급행철도(Great Train Express)’가 아닌 ‘강남급행철도(Gangnam Train Express)’란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다. 물론 공사를 시작하더라도 완공까지는 몇 년이 더 걸린다.
이미 수 백만원에 달하는 교통분담금을 내고 분당, 김포한강 등에 집을 분양받은 2기 신도시 입주민들은 돈은 돈대로 내고도 불편한 출퇴근길을 감수해야 해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불만도 나온다.
임병철 부동산114 수석연구원은 "특히 수도권 신도시에선 주거환경이나 교육 여건은 좋은 반면, 서울과 출퇴근 여건은 고생스럽기 때문에 ‘아빠만 고생하면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라며 "교통망 확충이 필요한 다른 신도시 지역민들도 이번 결과에 실망할 수 있고, 최근 선정된 3기 신도시 등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유한빛 기자(hanvit@chosunbiz.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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