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월 동안 공동체 안에서 성폭력 문제 어떻게 풀어갈지 고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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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초 ‘미투’ 운동은 한국 사회의 민낯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많은 여성이 은폐됐던 성폭력의 ‘고발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마치 혁명처럼, 세상은 바뀌는 듯했다. 하지만 그 변화의 바람은 정작 개개인이 속해있는 공동체로 불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 조용하고도 천천히 변화를 꾀한 조직이 있다.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성평등위원회 얘기다. 7개월 동안 그들이 추진한 ‘작은 시도’와 그 의미를 짚어봤다.
“영화 및 영상작업 공고 글에서 남성 스태프만 구한다는 공고는 더 안 봤으면 좋겠어요.”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성평등위원회(성평등위)가 지난해 진행한 ‘성차별, 성폭력 설문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에게 들은 이야기들이다. 이들은 미투 열풍과 함께 뭔가 변해야 할 것 같은데, 어떻게 변해야 할지 가늠할 수 없어서 우선 조직 상황부터 제대로 진단하기로 했다. 그 시작은 과 학생들을 상대로 한 설문조사였다. 성평등위가 지난해 3월1일 김승섭 고려대학교 보건과학대학 교수에게 한 통의 전자우편을 보내 도움을 요청한 까닭이다. 사회역학자로 세월호 생존학생, 성소수자, 소방관 등의 아픔을 끊임없이 묻고 답을 들었던 김 교수는 설문조사 설계의 전문가다.
김 교수 역시 ‘미투’ 운동에 대한 고민이 컸다. 많은 이들이 피해자의 고발을 응원했고 가해자 처벌의 목소리를 높였지만, 가해자와 피해자가 속한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일에는 인색했다. 공동체의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조직을 제대로 진단하는 것이 필수였다. 다만, 모든 공동체는 저마다 특징이 있기 때문에 일반적인 내용만 질문하는 설문조사는 큰 의미가 없었다. 사서 고생을 하기로 했다. 성평등위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이들을 위해 조직 내 성폭력·성차별 진단을 위한 설문조사 설계 워크숍을 진행하기로 했다. 지난해 3월11일 김 교수는 자신의 연구팀과 함께 페이스북으로 참가신청을 받은 45명을 상대로 설문조사 설계 방법을 강의하고 실습까지 하는 워크숍을 열었다. 공공기관, 대학, 연구소, 기업 등 참가자들이 속한 공동체는 다양했다. 김 교수는 “성폭력은 권력관계와 조직 문화로 인해 생겨난다. 가장 크게 상처 입은 피해자가 용기를 내 물꼬를 텄다면, 그다음은 각각의 공동체들이 스스로 드러나지 않은 성폭력의 규모를 진단하는 등의 노력을 해야 한다. 여전히 말하지 못한 수많은 피해자가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숨겨진 성폭력을 파악하려는 시도가 없으면, 사건은 피해자 개인의 것처럼 여겨지고 사건의 사실 여부를 따지는 데만 집중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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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용기, 다음에는 공동체의 노력 따라야
워크숍에 참가한 성평등위는 이후 김 교수와 계속 연락을 하면서 설문지를 다듬었다. 김 교수에게 처음 전자우편을 보냈을 때 3개뿐이었던 설문조사 문항은 225개로 늘었다. 2개월 넘게 설문 문항을 만드는 작업을 한 성평등위는 지난해 5월25일부터 10일 동안 영화과 학생을 상대로 설문조사를 받았다. 온라인 조사로 진행된 설문에는 항목마다 응답자 수에 차이가 있다. 다만 가장 많이 대답한 문항의 경우 영화학과 학생 135명 중 120여명이 참가할 정도로 큰 호응을 얻었다. 성평등위는 설문조사 내용을 3개월 동안 분석한 뒤 그 결과를 지난해 9월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영화학과 누리집에도 올렸다.
설문조사는 그동안 짐작만 하던 것을 숫자로 명확하게 드러내 주었다. 학과에서 강제추행 등 성폭력 피해를 입은 경험이 있다는 답변도 나왔다. 응답자 중 여성의 42%, 남성의 26%가 영화학과 내에서 성희롱을 경험한 적이 있다고 대답했다. 공동체의 성평등 수준을 바라보는 시각도 남녀가 크게 달랐다. 중대 영화과가 성평등한 분위기냐고 묻는 질문에 남학생은 16%가 ‘그렇지 않다’라고 대답했고 ‘매우 그렇지 않다’는 응답은 없었다. 하지만 여학생은 32%가 ‘그렇지 않다’, 5%가 ‘매우 그렇지 않다’고 답변했다. 2배 이상의 차이다. ‘미투’에 대한 공감은 많았지만, 여전히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어렵다는 점도 드러났다. 수업 중 교수·강사로부터 ‘미투’를 깎아내리거나 가해자를 옹호하는 발언을 들은 적이 있냐는 질문에는 24%가 그렇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이 가운데 73.3%는 잘못됐다고 생각했지만 별다른 말과 행동을 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학과 내의 성차별 및 성폭력의 가장 큰 원인을 묻자(복수 응답 가능) ‘성차별 및 성폭력에 대한 지식이나 문제의식 결여’, ‘예술을 한다는 이유로 폭력이나 비윤리성을 정당화하는 분위기’, ‘피해자를 예민한 사람으로 취급하는 분위기’, ‘교수진의 성비 불균형’ 순서로 응답이 많았다. 여느 공동체에서 성폭력이 벌어지는 원인과 영화학과와 대학교라는 고유의 특성이 모두 영향을 미친 셈이다.
이번 설문조사를 기획한 성평등위원 김태은씨는 “지난해 초 문화예술계에서 ‘미투 운동’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영화학과다 보니 직·간접적으로 가해자와 인연이 있는 사람들과 접촉이 잦은 편인데, 답답한 일이 많았다. 예를 들면, 영화계 선배 등이 ‘미투 때문에 예술이 제대로 안 된다’라는 말을 공개적으로 하는 거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라도 바꾸려면 우리 과의 상황부터 진단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라고 말했다. 중대 영화과가 다른 학교 영화과와 견줘 성차별·성폭력이 특별히 심각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김씨는 학생 성비도 6:4 정도로 여성이 더 많고, 여러 사안에 대해 문제 제기를 적극적으로 하는 학생들도 여럿이라고 했다. 그래서 오히려 중대 영화과에서 먼저 설문조사를 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우리 학교에서 진행한 설문조사를 다른 대학 영화학과에서도 함께 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서 영화과 학생들이 고유하게 겪고 있는 성차별, 성폭력의 문제가 무엇인지 밝히고 어떻게 변화해야 할지 함께 고민해보고 싶었어요.” 김씨가 7개월 동안 이번 설문조사에 매달린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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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육계 미투 문체부 대책, 우려된다”
성평등위는 설문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성폭력 예방 및 처리에 관한 규정’을 만들었다. 규정에는 ‘성평등 문화를 훼손하는 사건에 대해서는 당사자만이 아니라 공동으로 대처한다’, ‘성폭력적인 상황을 목격했을 때 현장에서 주의나 경고를 주도록 한다’ 등 성폭력 문제를 공동체 모두가 함께 해결해야 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했다. 설문조사 문항을 한창 고민하던 지난해 5월에는 ‘중앙대 영화학과 워크숍 내 성평등 행동강령’도 만들었다. 행동강령에는 ‘여자니까 연출부 해야지’, ‘무거운 건 남자가 들어야지’, ‘여배우 오니까 현장이 밝아졌네’ 등 고정된 성 역할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담겼다. 워크숍이 잦은 영화과의 특성과 과 학생들이 직접 경험한 구체적인 사례를 고려해 작성했다.
김승섭 교수는 성평등위의 시도에 대해 “조직마다 상황이 다르고 구체적으로 물어야 하는 질문이 다르다. 기존의 문항을 그대로 활용한 것이 아니라 실습이 많은 영화학과라는 전공의 특성을 충분히 반영해 진행한 설문조사라는 점에 의의가 있다”라고 평가했다. 김 교수는 7개월 넘게 변화를 끌어내려 했던 성평등위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반면 체육계 ‘미투’ 이후 나오는 정부의 대책은 걱정된다고 했다. ‘조재범 성폭력 사건’이 알려진 뒤 문화체육관광부는 외부인을 중심으로 한 별도 위원회를 만들어 3월까지 대한체육회 등을 상대로 1단계 전수조사를 하고 이후 단계적으로 시·도체육회 등에 대한 조사를 추진한다는 계획을 밝혔다. 김 교수는 “3월까지 전수조사를 한다는 계획 자체가 현실적이지 않다. 설문조사를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설계 단계에서부터 여러 고민이 필요하다. 단순하게 성폭력 경험 등을 묻는 질문을 나열해 그 결과를 취합하는 방식이 되지 않아야 한다. 설문의 문항과 질문 방식을 섬세하게 고려하지 않거나 피해자가 안심하고 설문에 응답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하는 조사로는 은폐된 성폭력을 확인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변화는 모범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모범은 대부분 빠르게 만들어지지도 화려하지도 않다.
정환봉 기자 bong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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