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적절한 리스트…‘관행’이라도 용인 안 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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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와대가 민간인을 사찰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지난 11일 대검찰청 보통징계위원회 결정으로 해임 중징계가 결정된 김태우 검찰 수사관(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이 청와대 관계자들을 검찰에 고발하며 주장한 내용이다. 김 수사관은 자신의 비위가 불거지자 청와대 특감반이 고건 전 국무총리의 장남이 하는 비트코인 사업,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등 민간인을 사찰했으며, ‘환경부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공직자들에게 불이익을 줬다고 주장하고 있다.
청와대는 정상적인 공직 감찰 활동 중 ’민간정보’가 섞여들어 간 것일 뿐 ‘민간인 사찰’이 아니며, 환경부 리스트 또한 상당수가 재임 기간을 채우거나 현직에 남아있어 ‘블랙리스트’로 보기 힘들다고 반박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0일 새해 기자회견에서 “김태우 행정관이 제기한 문제는 자신이 한 행위를 놓고 시비가 벌어지는 것이다. 그 부분은 이미 수사 대상이 되고 있어서 가려지리라고 본다”고 했다. 김 수사관 개인 일탈이지 청와대가 지시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역대 정부가 대통령 주변과 특수관계자, 고위공직자들의 권력형 비리 때문에 국민에게 준 상처가 얼마나 크냐. 앞의 두 정부의 대통령과 주변이 그런 일로 재판받고 있다”며 “다행스럽게도 우리 정부에서는 과거 정부처럼 국민에게 실망을 줄 만한 권력형 비리가 크게 발생하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과거 두 보수정부의 ‘민간인 사찰’ ‘블랙리스트’ 처벌 사례와 현재 논란을 법조인들의 도움을 구해 비교해 봤다.
법조인들은 우선 청와대 특감반이 직제에 따른 정당한 권한을 행사했는지, 아니면 권한을 벗어난 ‘의무에 없는 일’을 한 것인지 살펴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형법 제123조에 규정된 직권남용죄는 “공무원이 직권을 남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의무 없는 일을 하게 하거나 사람의 권리행사를 방해한 때”에 5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하도록 하고 있다. 직제나 내규 등을 벗어나 법에 없는 일을 하도록 하거나 법으로 정해진 일을 하지 못한 행위를 ‘직권남용’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법원은 2012년에 있었던 이명박 정부의 국무총리 산하 공직윤리지원관실에서 있었던 민간인 사찰을 “의무 없는 일”을 수행하도록 한 위법행위로 보았다. 당시 공직윤리지원관실은 자신의 블로그에 이명박 전 대통령과 정부 정책을 비방하는 글과 동영상을 올린 케이비(KB)한마음 대표 김종익씨의 사무실을 수색영장 없이 뒤지는 등 압박을 가한 바 있다. 대법원은 이에 대해 “윤리지원관실의 일반적 직무권한은 소속기관의 직제와 공직윤리 업무규정에 규정된 업무여야 한다”며 “그렇지 않으면 직권남용에 해당한다”고 판결했다. 정부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 ‘민간인’의 사무실을 뒤지는 등 행위는 공직윤리지원관실 권한 바깥의 불법적 사찰이라는 것이다.
현재 논란이 되는 청와대 특감반의 ‘직제’는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특감반의 설치 근거인 ‘대통령비서실 직제’에 따르면 특별감찰반은 ‘대통령이 임명하는 행정부 소속 고위공직자·공공기관 및 단체의 장 및 임원·대통령의 친족 및 대통령과 특수한 관계에 있는 자’에 대해서 감찰을 할 수 있다. 김 수사관은 청와대가 직제에 규정된 감찰대상을 벗어나 ‘민간인’인 고건 전 총리의 아들, 창조경제혁신센터장 등을 ‘사찰’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청와대는 ‘공적 감찰을 수행하다가 민간정보가 섞여들어 갔을 뿐’이라며 ‘그나마 민간정보 중 직제를 벗어난 정보들은 검찰에 넘기거나 스스로 폐기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직제 중 ’특수한 관계에 있는 자’가 대단히 애매한 개념이다. 이를 어떻게 판단하는지가 관건이 될 것”이라며 “오해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서는 직제 자체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감찰과 동향파악이 ‘정치적 목적’에 따라 이뤄졌는지 아닌지도 중요한 기준이다. 검찰 고위 관계자는 “국가기관이 ‘동향’을 파악하는 것 자체는 문제 삼을 수 없다. 가령, 특정 지역에 수해가 나서 청와대가 어떤 구호품이 필요한지, 지원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파악할 수 있지 않나? 이런 정보수집은 민간인을 대상으로 했다 하더라도 문제 삼을 성격이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같은 동향파악이라도 ’정치적 목적’을 위한 것이라면 성격이 전혀 달라진다. 이 관계자는 “하지만 이런 정보수집이 선거기간 직전에 이뤄졌고, 보고서에 수해지역에 이러저러한 물건이 필요한데 지원이 충분하지 않을 경우 선거 판세가 뒤집힌다고 보고한다면, 이는 ‘사찰’로 봐야 한다”고 짚었다. 동일한 동향파악이라 하더라도 특정한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행되었다면 ‘감찰’이 ‘사찰’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청와대는 김 수사관이 폭로한 내용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수행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고건 전 총리 아들 사찰 주장을 예로 들며 “가상화폐 정책을 만들기 위해 기초적인 상황을 파악한 것은 꼭 필요한 요건인데, 이걸 민간인 사찰이라고 하면 정부 정책은 무엇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라고 반박한 바 있다.
그 목적이 ‘현실적 불이익’으로 실현됐는지도 중요하다. 한 판사 출신 변호사는 “감찰이나 감찰로 생성된 문건이 특정인이나 특정 단체에 대한 구체적인 현실적 불이익으로 실현되었다면 ‘직권남용’의 성격이 명확해진다”고 짚었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는 ’정치적 목적 ‘으로 특정인과 특정 단체에 불이익을 주려 한 부적절한 직권남용의 전형으로 볼 수 있다. 당시 김기춘 대통령 비서실장과 조윤선 청와대 정무수석은 정부에 비판적인 예술단체의 이름과 배제 사유가 정리된 ‘리스트’를 작성하도록 지시하고, 이 리스트를 토대로 정부지원 대상에서 특정 단체를 배제시킨 혐의로 각각 징역 4년과 2년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지난해 1월 “피고인은 정치적 성향이나 이념이 다르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정부를 비판한다는 이유로 조직적으로 문화예술계 개인 및 단체에 대한 정부 보조금 등의 지원배제를 위한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에 옮겼다”고 실형 선고의 이유를 설명한 바 있다.
청와대도 김 수사관이 폭로한 ‘환경부 리스트’가 무슨 불이익으로 이어졌느냐고 반문한다. 지난달 31일 국회 운영위원회에 출석한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은 “그 문건에 있는 분 중 임기 전 퇴직은 4명, 2명은 임기만료까지 근무, 7명은 임기 초과근무, 현재까지 계신 분이 3명”이라며 “만약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조직적으로 이분들을 뽑아낸다, 찍어낸다 했다면 어떻게 임기를 다 채우고 지금까지 근무했겠느냐”고 반박했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공직자의 리스트를 만드는 게 위법 여부를 떠나 적절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하태훈 교수는 “인사자료로 참고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전임 정부에서 임명된 공직자 리스트를 만드는 것이 적절한지 모르겠다. 관행이란 이름으로 이런 문건이 용인되어야 하는지는 되짚어 봐야 한다”고 지적했다.
임재우 기자 abbad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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