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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 변호사의 연애는 계약이다]썸타다 깨져도 책임은 있다, ‘연인 사이’ 기대하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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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빈 변호사의 연애는 계약이다]썸타다 깨져도 책임은 있다, ‘연인 사이’ 기대하게 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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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오늘의 연애>의 한 장면. 18년간 알고 지냈지만 ‘연인’이 되지 않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인이 되기 전에도 가져야 할 책임은 있다.

영화 <오늘의 연애>의 한 장면. 18년간 알고 지냈지만 ‘연인’이 되지 않은 두 남녀의 이야기를 그렸다. 하지만 본격적인 연인이 되기 전에도 가져야 할 책임은 있다.


■ 고백할 자유와 거절할 자유

“왜 연애 안 하세요?” 연애상태를 물어보는 질문에 ‘솔로’라고 말하면, 자연스럽게 이 질문이 따라온다. 솔로인 두 사람이 같은 공동체에 속해 있으면 당사자들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사귀라’는 압박에 시달리기도 하고, 성별이 다른 두 사람이 조금만 친분이 있어도 ‘썸’의 관계로 오인받기도 한다. 괜히 ‘연애 권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러나 연애, 안 해도 된다. 연애는 의무가 아니기 때문이다. 연애는 계약이다. 계약을 체결하고 안 하고는 전적으로 나의 자유다.

어떤 일이 나의 자유에 속한다는 말은, 그 일을 내가 원하면 공동체가 허락하는 범위 안에서 그 일을 할 수 있는 권리와 그 일을 하지 않을 권리가 동시에 보장된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는 계약에 대한 자유가 있다. 계약은 계약체결을 제안하는 의사표시인 ‘청약’과 이 의사표시를 받아들인다는 의사표시인 ‘승낙’에 의해서 체결된다. 우리에게는 계약을 체결하자고 제안할 자유도 있고 이를 받아들일지 거절할지에 대한 자유도 있다. 예를 들어, A가 사업을 위해 은행에서 대출을 받았는데, 추가로 자금이 더 필요한 상황이다. A는 절친한 친구 B에게 사업자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다. A로서는 사업의 전망이 좋기 때문에 B와 약속한 날짜에 반드시 돈을 갚을 수가 있고 가능하다면 이자도 많이 보태 돌려줄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친구 B의 입장은 어떨까. B는 A에게 이자를 약속받고 돈을 빌려줄 수도, 빌려주지 않을 수도 있다. A의 제안을 승낙하거나 거절하는 것은 모두 B의 자유에 속한다. A는 B가 거절하면 서운하긴 하겠지만, B가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고 B에게 폭력을 행사하거나 돈을 뺏을 수는 없다. 만약 B가 돈을 빌려준다면 두 사람 사이에 계약이 성립한다. 이 계약에 따라 A는 기간 내에 돈을 갚기로 한 약속을 지킬 책임이 생긴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고백할 자유가 있듯, 반대로 상대방에게는 그 고백을 거절할지 아니면 받아들일지에 대한 자유가 있다. 고백하는 사람과 고백을 받는 사람은 연애관계를 맺을지 말지에 대한 동등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이 동등함을 간과하고 때로 누가 고백을 하기만 하면 연애가 시작되어야 하는 것처럼 상대방의 ‘거절할 권리’를 무시한다면 이 제안은 이미 구애가 아니라 폭력이 될 가능성이 높다. 상대방의 거절의사를 무시한 채 ‘나는 고백했으니 우리는 사귀는 사이’라는 생각으로 지속적으로 상대방을 괴롭힐 수 있다.

■ 썸과 연애의 경계는 어디일까

연애하는 사이를 규정짓는 단 하나의 요소는 무엇일까? 서로 좋아한다고 마음을 확인하면 연애하는 사이일까? 좋아한다는 감정을 확인하는 일은 연애에서 반드시 필요한 단계이긴 하지만, 좋아한다고 곧바로 연애가 시작되는 것은 아니다. 일이 너무 바빠 연애를 위한 에너지와 시간을 할애하기 어려운 상황이라거나, 부양 가족이 너무 아프다거나, 아직 연애관계에 있는 사람이 있어서 그 정리가 필요하다거나, 당장 외국으로 떠나서 돌아올 계획이 없다거나, 서로 연락을 주고받을 수 없는 상황에 있거나 등등 다양한 이유로 연애관계를 형성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스킨십을 하면 연애하는 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떤 사람들은 ‘자는 것’을 연애의 징표로 여길지 모르겠다. 스킨십을 기준으로 ‘연인’임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손잡으면 사귀는 사이’ ‘키스하면 사귀는 사이’ 나아가 ‘잤으면 사귀는 사이’ 등등 스킨십의 단계를 기준으로 사귀는 사이를 정의하는 것이다. 그러나 성관계 여부가 연애하는 사이의 증거라면 ‘원나이트’는 그날 사귀고 그날 이별하는 연애관계라고 정의 내려야 하고, 혼후관계주의자가 맺는 관계는 연인관계가 아니게 된다는 뭔가 이상한 결론이 도출된다.

그런 점에서 연애관계는 사귀기로 ‘약속’하는 것이 핵심적인 내용이 될 것 같다. 사귀기로 약속함으로써 상대방에 대해 책임과 의무가 발생한다. 그래서 사귀기 전 단계는 ‘썸’이라고 부르고, 사귀는 관계와 달리 책임과 의무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곤 한다. 그러나 썸도 두 사람이 일정 정도 관계를 맺기로 하는 약속 위에 성립하는 특수한 관계다. 한쪽이 썸타기를 거절하면 시작될 수 없는 관계라는 점에서 그렇다.

■ 썸타다 헤어져도 책임은 있다


썸을 타다 깨지면, 대놓고 슬퍼하기도 참 애매하다. 사귀는 사이도 아닌데 ‘이별’이라고 말하기가 난감하기 때문이다. 그냥 서서히 연락이 뜸해지다가 마음이 다치고 멀어지면 그걸로 ‘그냥 만나던 사이’에서 ‘그만 만나는 사이’로 변경된다. 그러다 어쩌다 연이 닿으면 다시 만나기도 한다. 때로는 아무것도 없이 그냥 ‘썸의 종결’이 발생하기도 한다.

“왜 맨날 썸만 타다 헤어질까? 연애하는 거 왜 이렇게 힘드니.”

친구 J가 이번에도 실패라면서 하소연을 했다. 금방이라도 사귈 것처럼 데이트를 하다가도 결정적일 때 상대방이 연락을 끊어버리거나, 스킨십이며 여행이며 연인 간에 할 만한 건 모두 다 해보고서도 사귀는 건 안되겠다는 말을 한다는 것이다. 연애라는 진지한 관계가 주는 부담감을 상대방이 싫어하기 때문에 ‘썸’만 타다 매번 헤어지게 된다고 했다.


계약법은 계약이 체결되지 않았어도 마치 계약이 체결될 것처럼 교섭을 진행했고, 상대방도 곧 계약이 체결되리라고 정당하게 기대를 했는데 일방적으로 신뢰를 깨버리면, 그 사람에게 손해배상책임을 예외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서로 상대방과 계약을 체결할 마음으로 교섭을 진행하는 것이니만큼 주고받는 정보의 양이 늘어나고 조건을 조율하는 정도가 심화될수록 계약이 체결되리라는 기대가 올라가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법원이 손해배상책임을 인정한 대표적인 사례는 이렇다. 어떤 협회가 소유 건물에 조형물을 설치하기로 하고 그 설치방향에 대해 5명의 작가에게 샘플제작을 의뢰한 다음 그중에서 하나를 골라 그 작가와 조형물의 제작 및 납품, 설치계약을 하기로 했다. 그 후 샘플을 제공한 작가 1명의 작품을 당선작으로 선정하고 그 사실을 알렸는데 그 후로 거의 3년 동안 제대로 계약을 체결하지 않다가 조형물 설치를 취소하겠다고 통보했다. 알고 보니 협회는 다른 작가에게 의뢰해 조형물을 설치한 것이다. 당선 사실을 통보받았던 작가는 당연히 계약이 체결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갑자기 협회가 자기 마음대로 내부 사정을 이유로 계약체결을 거부하고 다른 작가와 계약을 체결한 것은 분명 계약자유의 원칙의 한계를 넘는 위법한 행위로 인정될 수밖에 없다. 협회는 손해배상책임을 져야 했다.

썸을 타는 관계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서 메시지 몇 번 주고받는 사이에서 시간이 맞으면 데이트를 하는 사이로, 약간의 스킨십을 더하는 사이로 나아가다가, 어느 순간이 되면 상대방이 연애감정을 두고 만나는 사람은 오로지 나였으면 하는 기대가 생기게 된다.

일정 시간 동안 서로 연인인 것처럼 시간을 보내고 감정을 쌓고 관계를 형성해왔다면, 일반적인 연인과 다를 바가 없을 정도로 신뢰를 쌓았다면, ‘사귀자’는 말 한마디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연인이 되었을 때 감당해야 할 상대방에 대한 의무와 책임을 회피할 수는 없다. 그건 연애관계에서도 자유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이다.

‘썸’이라고 해도 저마다 상호 간에 보낸 시간과 깊이에 따라서 지켜야 할 예절이나 책임 같은 것이 분명 있다. 사귀지 않더라도 관계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적어도 관계를 더 진행할 것인지, 아니면 이 정도 선에서만 즐기다 말 것인지, 상대방이 나에게 보내는 감정, 내가 상대방에게 주고 있는 신호의 의미에 대해 책임감 있는 태도를 보여야 한다. 자신이 없다면 ‘애매하게 지내기로 하는 약속’이라도 서로 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무언가 선을 넘으려고 할 때, 약속된 어느 경계를 넘어 상대방으로 하여금 연인으로의 진전을 기대하지 않게 하는 방어선 같은 것 말이다.

모든 자유에는 책임이 따른다. 연애도, 썸도, 썸타는 중에도, 썸타다 헤어져도 책임이 있다.

박수빈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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