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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에게 길을 묻다

경향신문 경향아티클 임근혜 영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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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틀즈에게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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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일 프로젝트_한국의 비틀즈

올가을은 전 세계 비틀즈 팬에게 있어 조금은 특별한 계절이다. 반세기 전인 1962년 10월 5일, 드러머 조지해리슨의 영입으로 오늘날 우리가 기억하는 4인 밴드의 모습을 갖추고 첫 히트 앨범 [러브미두(Love me do)]를 발표했기 때문이다. 사실, 기대와는 달리 영국에서 ‘비틀즈 50주년 기념일’은 의외로 조용히 지나갔다. 그들의 히트곡으로 구성된 뮤지컬 <렛잇비(Let it be)>가 웨스트엔드에서 오픈했고, 비틀즈의 고향 리버풀에서는 그들이 데뷔한 캐번클럽(Cavern Club)을 중심으로 소소한 행사들이 열렸으며, 관련 TV 프로그램이 몇 편 소개되었을 뿐이다.

그렇다면, 비틀즈는 잊혀지고 있는 것인가? 그럴 리가 없다. 비틀즈 50주년이 영국에서 그리 특별하지 않은 이유는, 비틀즈는 굳이 기념일이나 행사가 필요하지 않은 시간을 초월한 존재이며 언제나 일상과 함께하기 때문이다. 1960년대 초 최초의 비틀즈 평전을 쓴 헌터 데이비스(Hunter Davies)는 비틀즈 신드롬은 영국보다 오히려 국외에서 더 강력하게 퍼져 나갔다고 말한다. 특히, 공산권 등 억압적 지배문화가 강한 지역에서는 그들의 음악이 자유와 저항의 상징으로 전유되어 은밀히, 그러나 더욱 뜨겁게 소비되었다. 우리나라도 예외가 아니어서, 소설가 김훈은 군가와 뽕짝이 지배적이었던 당시 비틀즈의 출현을 ‘천지개벽’으로 회상한다. “그 노래를 자유이며 희망이었고 저항이며 그리움이었다. 비틀즈는 여기가 아닌, 또 다른 세상이 있어야 한다는 꿈을 나에게 심어주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 꿈은 아직도 유효하다. 아직도 미완성이다.”

아티스트 이기일이 기획한 <한국의 비틀즈> 리버풀 공연(11월 18일 리버풀 카지미어 클럽)은 2009년 겨울 <군웅할거>(토탈미술관)와 2010년 <폭발하는 청춘>(조선화랑)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비틀즈가 심어준 미완의 꿈을 이루어가는 여정이다. 이전의 프로젝트는 비틀즈를 포함한 구미 록음악을 모방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한국적 록을 창조하며 1960-1970년대를 풍미하다가 기억 속으로 사라진 한국의 1세대 록밴드를 추적했다. 이들은 미술 전시의 문맥에서, ‘왕년의 스타’들이 남긴 음반과 사진 이미지, 그리고 지금은 60대에 이른 밴드 멤버들의 인터뷰로 이루어진 아카이브를 구성하고, 당대 대중음악의 산실이었던 명동의 한 클럽의 무대를 재현하는 시각적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군웅할거>와 <폭발하는 청춘>이 시각 자료를 통해 과거를 다루었다면, 이번 <한국의 비틀즈>는 비틀즈로부터 음악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을 무대 위에 올려 시대를 초월한 비틀즈의 의미와 그들의 꿈 이야기를 음악과 함께 들려주는 자리였다.

한국 최고의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 맨틀즈 공연 장면


때마침 리버풀비엔날레가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을 무렵, 네오고딕 풍의 실내가 인상적인 카지미어 클럽 무대에 1970년대 초 ‘한국 록음악 대왕’으로 불리던 그룹 피닉스의 창립자이자 작곡자이자 기타리스트였던 심형섭 선생이 올라섰다. 그는 이 공연을 공동 기획한 숨(SUUM) 큐레이터 마크 워와의 인터뷰에서 비틀즈의 카피밴드 ‘김치스’로 시작해 월남전에 참전해 지미 핸드릭스, 딥퍼플 등을 접하면서 자신의 음악 세계를 넓혀온 과정이며, 한국에 돌아와 자작곡을 연주하는 최초의 록밴드 중 하나로 음악사의 한 장을 열었다가 유신정권의 탄압으로 미국으로 도피한 사연을 소개했다.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동안 2008년 개봉한 <고고 70>에서 주인공의 밴드 ‘데블스’의 기를 죽이며 1971년 시민회관에서 열린 그룹사운드 경연대회를 휩쓸던 전설의 ‘피닉스’의 현란한 연주 장면이 오버랩 되었다. 참으로 역설적인 것은 록음악의 자유정신을 경계하고 억압한 유신정권의 ‘긴급조치 9호’ 직전의 5년 동안이 한국에서 가장 많은 그룹사운드가 활동하던 시기라는 점이다. 그리고 그 많은 음악인들이 한국을 떠나고 무대를 떠난 후에도 그 뿌리가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졌다는 사실이다.

심형섭 선생의 인터뷰는 현재 활동하는 비틀즈 트리뷰트 밴드 중 최고로 알려진 ‘맨틀즈(젠틀맨+비틀즈)’의 1970년대 한국 록의 주옥같은 레퍼토리와 맨틀즈의 비틀즈 대표곡 열창으로 이어졌다. 직장인 2명과 직업 뮤지션 2명으로 이루어진 맨틀즈는 각자 생계 활동을 하면서 연주가 있으면 밤에 모여 연습을 한다. 그들이 노래한 곡목 중 하나인 [하드데이즈나이트(A hard day’s night)]의 “개처럼 일한 힘든 하루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와 그대만 있으면 올라잇”이라는 가사처럼 비틀즈 음악은 그들에게 삶의 피로를 덜어주는 강장제 같은 것일까. 평범한 회사원으로, 영어 학원 강사로 일하면서 자신들의 음악으로 무대에 서는 희망을 놓지 않는 그들의 모습에서 50년 전 김훈이 말한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보게 된다.

1965년 결성한 한국 최초의 비틀즈 카피밴드 ‘김치스’와 2012년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맨틀즈’가 함께한 리버풀 무대는 57년이라는 시간차와 그간 이루어진 한국사회의 변화 그리고 최근 싸이 덕분에 영국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 K-pop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마침, 비틀즈 50주년에 즈음하여 한국가요가 영국의 음악차트에서 선전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주목할 만하다. 심형섭 선생의 말처럼 K-pop은 비틀즈로부터 시작하여 한국적 음악을 만들어낸 1960-1970년대 록밴드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기일 프로젝트 : 한국의 비틀즈 공연 포스터


다시 비틀즈의 나라 영국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990년대 창조산업의 주요 품목으로 ‘브릿팝(Britpop)’이란 브랜드 네임이 주목받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정부까지 적극적으로 이들을 후원하여 영국 록밴드가 1960년대에 이어 제2의 전성기를 맞는 듯했다. 그러나 당시 수혜자들 중 하나였던 펄프(Pulp)의 자비스 코커(Jarvis Cocker)는 비틀즈 50주년을 맞아 기고한 글에서 브릿팝은 실패했다고 단정하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넘쳐났고, 너무 많은 열정을 쏟아 부었다. 그러나 비틀즈가 213곡의 노래를 만들어낸 것은 완벽한 계획이나 청사진이 아니라, 본능과 충동이었다.”

거꾸로 해석하면, 문화산업이 풍부한 정보를 수집하고 치밀한 계획을 세우고 수출 상품을 기획하고, 정부가 이를 위한 제도적 정비와 적극적 후원을 하는 동안, 예술은 바깥세상에 한눈팔지 말고 본능과 충동에 충실해야만 가장 생산성을 높일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1970년대 유신정권조차도 ‘또 다른 세상에 대한 꿈’을 향한 본능과 충동을 꺾을 수 없었다. 비록, 한국 대중음악의 세계 진출이 가능해지는데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흐르긴 했지만 말이다. 오늘날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브리트니 스피어스와 마돈나를 춤추게 하고, 자유정신의 시대적 아이콘으로 전용되어 아이 웨이웨이와 아니쉬 카푸어와 세계적인 미술관을 들썩이게 만든 힘은 알고 보면 꽤 오래전부터 한국 대중음악 속에 내재되어 있었던 셈이다.

최근 대중음악의 한류 현상을 시간적으로 역추적 하는 이기일의 한국 대중음악 프로젝트는 바로 이러한 지점에서 의미를 지닌다. <한국의 비틀즈>가 보여주는 것은 순수예술이 K-pop이란 브랜드네임으로 대표되는 문화산업에 편승할 수 있다는 사실이 아니다. 문화콘텐츠를 과거의 노동집약적 제조품을 대신한 수출품목으로 인식하는 구조 안에서, ‘상품성’이 덜하다는 이유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가는 대중음악의 과거를 다시 현재 속에서 의미화하는데 의의가 있다. 제도와 기획이 놓친 의미의 사각지대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예술적 본능과 충동을 찾아내서 전체 시공간을 재맥락화하는 것, 그것이 시대의 꿈을 함께 완성해나가는 작가로서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경향아티클 임근혜 영국통신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