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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9 (금)

이슈 '미투' 운동과 사회 이슈

[ESC] ‘#미투’는 계속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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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너 어디까지 해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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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차 시간 다 됐는데, 낮에 외출한 아내로부터 아무 연락이 없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가 보다. 그런데 왜 이렇게 불안하지? 설마 아내가 들른 공중화장실에 괴한이 숨어 있거나 몰래카메라가 설치된 건 아니겠지? 누가 헤어진 자기 여자친구와 아내가 닮았다고 아내 뒤통수를 벽돌로 내려치진 않겠지? 내 주변만 해도 뜻밖의 봉변으로 트라우마에 시달린 여자들이 제법 있는데, 그래도 아내는 괜찮겠지? 가만, 일전에 어떤 남자는 아내를 집 앞까지 쫓아왔는데, 그 남자는 대체 왜 아내를 쫓아왔을까?

그렇다고 아내에게 시시때때로 문자메시지를 보내거나 전화를 할 수는 없다. 모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을 텐데, 웬만하면 그 즐거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다. 밤길은 위험하니까 일찍 다니라는 당부도 다 큰 아내에게 할 소리는 아니다. 아내가 내 소유물도 아니고, 아내는 자기만의 시간을 마음껏 누릴 자유가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밤 12시가 넘으면 언제 돌아오느냐며 아내에게 기어이 문자메시지를 보내고 만다. 답장이 없으면 전화를 하고, 전화를 안 받으면 안절부절못한다. 아내의 일거수일투족이나 단속하는 남편이 되고 싶진 않은데, 불길한 상상을 좀처럼 멈출 수 없다.

내가 예민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고, 어쩌면 내 불길한 상상은 현실이 부추겼다. 그런데도 몇몇 남자들은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는 아니다”라며 굳이 ‘모든 남성’을 대표하려 한다. 그 말이 피부로 와 닿으려면 함부로 여자들을 해코지하는 남자들이 없어야 할 텐데, 여성을 대상으로 한 강력 범죄는 마치 그 말을 비웃듯이 반복되고 있다. 게다가 나조차 마음만 먹으면 아내에게 얼마든지 위협적인 존재일 수 있다. 아내를 해코지하고 술김에(또는 홧김에) 그랬다고 적당히 둘러대면, 정상참작 받을지도 모른다. 그게 엄연한 현실인데, 모든 남성이 잠재적 가해자는 아니라고? 나 같으면 면구스러워서라도 최선을 다해 가만히 입 다물고 있겠다.

무엇보다 여자들을 위협하는 게 어디 그와 같은 강력 범죄뿐인가. 아내가 살면서 지금까지 겪은 일상 속 성폭력을 열거하자면, (여느 여자들처럼) 책 한 권 분량은 가뿐히 되고도 남는다. 아내는 미투운동이 한창 이어지던 지난봄에도 속으로만 삭이다 “그때 그 자식이 말이야”라며 나한테 풀기 일쑤였다. 아니, 미투운동이 일어나기 전부터 아내는 내가 ‘대나무숲’이라도 되는 양 종종 나한테 풀었다. 그럼 나는 처음에는 귀담아듣다 나중에는 고발하든지, 이런 식으로 속앓이만 할 수 없다며 ‘현실적인 대안’을 들먹이곤 했다. 아내가 고발할 리 없으니 한 얘기였다. 듣다 보면 괜히 기분만 나빠지는 아내 얘기가 그만 듣고 싶었고, 그 덕분에 부부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아내는 자신이 당한 일을 지나치게 수치스러워하지 않았다. 자책이나 증오심에 사로잡혀 자기 인생을 망치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아내는 스스로 약자라고 생각하지 않는 나름 굳센 피해자인 셈인데, 그 나름 굳센 피해자도 막상 법정에 서면 산산이 무너질 수 있다. 오죽했으면 현직 검사마저 직속상관의 성폭력을 법적으로 해결하지 못해 폭로를 선택했을까. 그만큼 법정에서 성폭력 피해 사실을 인정받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아내처럼 나름 굳센 피해자는 오히려 피해자답지 않다는 이유로 성폭력 피해 사실을 부정당할 수 있다.

한편 지난 18일, 위력에 의한 성폭력 혐의 등으로 기소된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의 무죄 판결 반대 시위에서는 시위에 참여한 여자들을 향해 야유를 보내거나 욕을 하던 남자들이 더러 있었다고 한다. 여자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그 남자들에게는 별 위협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런데 만일 그 시위 현장에 ‘마동석’이 잔뜩 모여 있었다면 어땠을까. 찍소리도 못했겠지. 아무리 술김이라도 자신의 ‘위력’을 뽐내며 섣불리 까불지 못했겠지. 대신 그 비열한 남자들은 아마도 이 글 밑에 부지런히 악플을 달겠지.

마침 기다리던 전화가 왔다. 아내는 막차가 끊겨서 택시를 탔다고 한다. 악플이 달리든 말든, 슬슬 아내를 마중 나갈 채비나 해야겠다. 아내의 귀가가 늦든 말든, 아내가 술에 취했든 말든, 아무 걱정할 필요 없는 세상이면 얼마나 좋을까. 차라리 내가 예민한 거였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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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용득(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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