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가해 ‘지옥도’ 펼쳐놓고 “나서라, 싸워라” 할 수 있을까요
성폭력 혐의를 받고 있는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27일 오전 서울 마포구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결심 공판에 출석하기 위해 법정으로 향하는 동안 여성단체 회원들(왼쪽)이 안 전 지사의 엄중처벌을 촉구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백소아 기자 thanks@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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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고인석에 앉은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와 피해자석에 앉은 김지은 전 수행·정무비서의 거리는 채 5m도 떨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검은색 뿔테 안경을 쓰고 재판정에 나온 김 전 비서는 변호인단 사이에 앉아 재판부를 지켜봤고, 검찰 구형 내내 눈을 감은 채 앉아있던 안 전 지사는 간간이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지난 7월6일 피해자 심문 이후 3주 만에 법정에서 만난 두 사람의 마지막 발언은 치열했던 지난 공판만큼이나 팽팽했습니다.
“재판장님. 피고인의 행위는 지사와 수행비서의 힘의 차이에서 오는 강압, 압박, 권력을 가지고 일방적으로 한 성폭행이었습니다. “(김지은 최후진술)
“어떻게 지위를 갖고 한 사람의 인권을 뺏을 수 있겠습니까. 지위를 갖고 위력을 행사한 적 없습니다.”(안희정 최후진술)
27일 오전 서울서부지방법원 303호. 기자와 방청객으로 가득 찬 법정에서 결심 공판이 시작됐습니다. 비서에게 성폭력을 행사한 혐의(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으로 재판에 넘겨진 안 전 지사에게 검찰은 징역 4년을 구형하고 성폭력 치료강의 이수 및 신상공개 명령을 재판부에 요구했습니다.
검찰 구형 이후 안 전 지사 쪽 변호인단은 반박에 나섰습니다. 변호인단은 “차기 유력 대선 후보라는 인지도가 곧 간음죄의 ‘위력’과 이어진다고 볼 수는 없고, 피해자의 피해 감정과 그 이후의 행동도 불일치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또 “피고인과 피해자의 말 중에 무엇이 진실이고 허위인지 엄격히 보아야 한다”고 강조하기도 했습니다. 선고기일은 약 3주 뒤인 8월14일로 정해졌습니다.
올해 초 서지현 검사의 고발로 시작된 ‘#미투 운동’은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의 민낯을 드러냈습니다. 그중 안 전 지사의 비서로 근무했던 김지은씨의 고백은 가장 파장이 컸습니다. 이번 사건이 #미투 고소·고발 중 맨 처음으로 법원의 판단이 나오는 사건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하지만 안 전 지사의 재판을 둘러싼 언론 보도와 피해자에 대한 사회적 편견 등은 우리 사회가 ‘미투’ 이후 제대로 자리를 찾아가고 있는 것인지 되묻고 있습니다. 안 전 지사 사건의 결심 공판을 하루 앞둔 지난 26일 ‘미투운동과 함께하는 시민행동’ 주최로 진행된 ‘긴급토론회 :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2차 피해’ 토론회에서도 이런 질문과 고민이 쏟아졌습니다.
이번 사건이 한국 사회에 던진, 이제는 답해야만 하는 질문들을 정리했습니다.
지난 3월9일 서울서부지검에 안희정 전 지사가 자진 출두하고 있다. 강창광 기자 chang@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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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희정 재판의 쟁점 안 전 지사는 형법 제297조의 ‘강간죄’가 아닌 형법 303조의 ‘업무상 위력에 의한 간음’ 혐의로 기소됐습니다. 강간죄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상대를 제압해 성관계했을 때 적용됩니다.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은 한 조직 내의 권력관계, 다시 말해 ‘위력’으로 원치 않은 성관계를 했을 경우 적용됩니다.
그래서 이번 재판의 쟁점도 바로 이 ‘위력’의 인정 여부입니다. 안 전 지사 쪽 변호인단은 ‘위력이 없었다’고 주장합니다. “(김 전 비서는) 아동이나 장애인이 아니고 혼인 경험이 있는 학벌 좋은 여성으로서 안정적인 공무원 자리를 버리고 무보수 자원봉사로 일할 정도로 주체적이고 결단력 있는 여성이다. (중략) (이런 여성이) 성적 자기결정권이 제한된 상황에 있었다고 보는 건 맞지 않는다.” 안 전 지사 변호인단이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한 말입니다.
검찰의 주장은 다릅니다. “정치 조직은 다른 조직과 다른 특성이 있다. 권력을 정점으로 강한 위계질서가 작동한다. (김 전 비서가 속한) 정무 조직의 특수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최고 권력자의 의사에 따라 피해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직업 공무원과 달리 피해자가 (언제든 해고가 가능한) 별정직 공무원이었던 특수한 맥락도 있다.” 검사가 징역 4년을 구형하면서 한 말입니다.
#미투에서 재판까지
권력관계 ‘위력’ 인정 여부가 쟁점
변호인단, ‘피해자답지 않다’ 강조
검찰, 생살여탈권 지닌 ‘조직’ 주목
안희정 전 지사에 징역 4년 구형
“위력 간음 기준점 제시할 재판…
법원서도 범위 폭넓게 해석해야”
검사의 말처럼 이번 사건은 ‘어떤 피해자이냐’가 아니라 ‘어떤 조직이었냐’를 주목해야 합니다. 성범죄는 ‘주체적이고’ ‘결단력있고’ ‘의사표시 능력이 우수한’ 여성이라고 하더라도 언제든지 불평등한 관계와 조직 분위기 속에서 피해를 입을 수 있는 권력형 범죄입니다. 올해 시작된 미투운동도 대부분 특정 분야나 영역에서 권력의 정점에 있거나 혹은 피해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가해자의 성폭력을 고발해왔습니다. 대학, 직장, 극단 등이 대표적입니다.
여성계에서는 이번 판결이 ‘업무상 위력 등에 의한 간음’에서의 ‘위력’을 해석하는 기준을 세우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아가 법원이 ‘위력’의 범위를 보다 폭넓게 해석해주길 바라고 있습니다. 권김현영 여성주의 연구활동가는 “감독자가 피감독자의 생사여탈권을 쥔 상황에서는, (강간죄 성립 요건인) 폭행이나 협박을 하지 않고 단순히 성적인 접촉 혹은 제안하는 것만으로도 원하는 것을 얻어낼 수 있다. 피감독 간음은 가장 전형적인 권력형 성폭력”이라고 강조합니다.
■ 선정 보도 길 터준 재판부 첫 공판준비기일에서 검찰은 “재판이 일부라도 공개되면 피해자의 사생활이 노출될 수밖에 없고, 심리적 혼란이 커질 우려가 있다”며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 위해 재판 전 과정을 비공개로 진행해달라”고 재판부에 요구했습니다.
1주일 뒤인 지난달 22일 열린 2차 공판준비기일에서 재판부는 “여러 규정과 사례를 확인한 결과 전면 비공개는 어려운 것으로 판단했다”고 밝혔습니다. 재판부는 이어 “다만 피해자가 재판 과정에서 언론 등에 드러나지 않도록 피해자의 출석권을 보장하고, 검찰과 변호인단의 의견을 적극 반영해 민감한 내용의 심리일 경우 비공개로 진행하겠다”고 덧붙였습니다.
“법정에서 가장 강한 것은 바로 판사 자신이다” 최근 종영한 드라마 ’미스 함무라비’에 나오는 대사입니다. 판사는 재판을 이끌어나가는 주인공입니다. 형사 사건은 공개 재판이 원칙이지만,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비공개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폭력 사건은 피고인쪽의 증언으로 피해자의 사생활이 침해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때문에 ‘성폭력 범죄의 처벌 및 피해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은 ‘성폭력 범죄에 대한 심리는 그 피해자의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 이를 공개하지 아니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서울서부지법 형사11부(재판장 조병구)는 이번 재판을 일부 공개로 진행했습니다. 이런 결정은 결과적으로 이번 재판이 선정적으로 보도되도록 ‘길을 터준 것’이라는 지적이 나옵니다. 이미경 한국성폭력상담소장은 “(재판 진술이 공개되면) 피해자는 2차 피해와 사생활 침해를 걱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피고인은 피해자를 걱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피해자의 평판과 행실을 집요하게 공격하는 게 (이번 재판에서도) 하나의 전략처럼 활용됐다”고 짚었습니다. 안 전 지사의 변호인단이 “고소인이 피해자일 수 없는 이유를 재판 과정에서 증명해 보이겠다”고 밝힌 대목에서도 이런 전략이 드러납니다.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하는 게 아닌, 피해자의 무고를 입증하겠다는 태도입니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이번 사건은 재판부가 사건 기록만 봐도 피고인 쪽 증인들이 피해자에게 어떤 증언을 할지 뻔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안 전 지사 변호인단의 의사에 따라 피고인 쪽 증인들의 진술을 공개 심리했다. 재판부가 (2차 가해에 대해) 허술하게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2차 가해 길 터준 재판부·언론
평판·행실 공격하는 피고인쪽 전략
예상 가능했는데도 재판 일부 공개
언론은 증인심문 일일이 ‘생중계’
자극적 보도로 여론 재판 촉발
“피해자에 책임 전가 고정관념 강화”
성폭력 고발 ‘용기’ 헛되이 만들어
지난 7월2일 서울서부지법에서 열린 공판에 안희정 전 충남도지사가 출석하고 있다. 박종식 기자 anaki@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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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차 가해’ 앞장 선 언론 공개된 심리에서 피고인 쪽의 증언은 사실상 ‘생중계’됐습니다. 법정에 나온 증인들의 말에 따라 피해자는 “안 전 지사를 일방적으로 좋아하는 사람”이 됐고, “비서 마누라로 불릴 정도로 애인 같은 사람”이었다가, “자신이 성폭행당한 호텔을 직접 예약한 사람”이 됐습니다. 피고인 쪽의 주장을 마치 ‘사실’인 것처럼 보도한 언론 탓에 법정 밖에서는 ‘피해자가 순수했나’를 묻는 여론 재판이 열렸습니다. ‘성폭력은 피해자가 자초한 것’이라는 인식이 퍼졌습니다.
심지어 지난 2일 열린 재판에서는 70여명의 취재진과 방청객이 있는 법정에서 피해자의 산부인과 진료 기록까지 공개됐습니다. 피해자가 성폭력을 입증하려고 법정에 제출한 병원 기록은 공개된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인터넷 기사의 헤드라인을 장식했습니다. 자극적이어서 이 기사에 차마 인용할 수 없는 내용입니다. 개인의 병원 진료기록은 법에도 발급 요건이 별도로 명시되어 있을 정도로 내밀한 개인 자료입니다. 공개 재판에서 이 내용이 검토됐을 때 재판부가 이를 적극적으로 제지하지 않았다는 아쉬움이 남는 대목입니다.
공개된 피고인 쪽 증인 심문 만을 토대로 재구성된 언론 보도는 성폭행 사건에서 ‘피해자의 순수성과 일관성’을 요구하는 현상을 강화했다는 지적이 나옵니다. 김수아 서울대학교 기초교육원 강의교수는 “언론은 피고인 쪽의 말에 초점을 두고, 이를 ‘사실’로 전달했다. 하지만 여기서 ‘사실’은 재판에서 이러한 발언이 있었다는 것이지, 그 발언 내용이 진실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도 언론은 이를 부각하며 ‘새 국면, 새 증언’이라는 틀을 만들어냈다”라고 꼬집었습니다. 또 “피고인 쪽 증인의 말에 따라 ‘피해자가 이상한 사람이기 때문’에 책임은 피해자에게 있다는 식의 내러티브가 만들어졌다”고 지적했습니다.
‘안희정 전 지사 성폭력 사건’ 대책위원회와 전국성폭력상담소협의회 회원 등이 지난3월13일 오전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위력에 의한 성폭력과 정치권력을 중단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이 적힌 손팻말을 들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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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소인의 용기가 헛되지 않기를” 이번 사건은 ‘업무상 위계 등에 의한 간음죄’ 고소 사건 중 피해자가 직접 공개적으로 재판에 나선 굉장히 드문 사례입니다. 때문에 재판 결과도 이후 다른 사건들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입니다. 과연 ‘#미투’로 시작된 이번 사건이 법적인 처벌로 이어질 수 있을까요? 권김현영 연구활동가는 안 전 지사 재판을 심리 중인 재판부에 제출한 의견서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저는 20여년간 피해자를 상담하고 사건을 지원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려면 피해자들이 스스로 나서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피해자에 대한 비난을 이토록 가혹하게 하는 사회에서 어떤 피해자에게도 감히 앞에 나서라고, 끝까지 싸워야 한다고 함부로 권유할 수 없었습니다. 그동안 피해자를 돕고자 했던 변호사, 검사, 판사 등 우리 사회 사법부의 구성원들과 연구자들과 활동가들 역시 결국 피해자가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만 변화를 위한 행동을 지속할 수 있었습니다. 고소인의 용기가 부디 헛된 것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황금비 기자 withbe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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