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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5 (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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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 그리고 100일…세상은 조금 달라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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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박보희 기자] [the L] [그일, 그 후] 피해자들이 만든 '전국미투생존자연대' 설립 100일 "여전히 쏟아지는 피해자들…끝까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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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투연대 회원들이 지난 3일 접수된 상담 사례 진행 상황 논의를 위한 회의를 열고 있다.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고유미씨(가명), 부현정씨, 강민주PD, 남정숙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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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어요. 이미 사내 성폭력 신고 사례가 있었는데 가해자가 기억 안난다고 하니, 피해자 조사도 없이 그냥 끝났거든요. 모든 직원들이 다 알게됐지만, 서로 모르는 척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나는 절대 말하지 못하겠구나 생각했죠."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서 근무하던 고유미씨(가명)는 상사의 성폭력에 시달리다 못해 5년간 다닌 직장을 그만뒀다. 사실 문제제기를 할 생각도 없었다. 회사를 그만두고 잊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유미씨의 이야기가 본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유미씨는 억지로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졌다. 사건을 보도한 기자는 제보를 받았다고 했는데, 유미씨는 제보를 한 적이 없었다. 그렇게 유미씨의 싸움이 시작됐다.

"결국 상대는 회사니까, 크고 유명하다는 로펌들부터 순서대로 찾아갔어요. 하지만 아무도 못맡는다고 하더라고요. 어떤 로펌은 회사가 고객이라서 안 된다고 하고, 어떤 변호사는 이기기 어렵다는 말만 했어요. 사실 전 싸울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증거를 수집해둔 것도 아니었거든요. 여성단체에도 연락해봤지만, 어떤 성폭력을 당했는지만 관심이 있고 정작 도와줄 수 있는 곳은 없었어요. 포기해야겠다고 생각했을 때 우연히 미투연대를 소개받았어요."

◇ "'미투'가 지겹다? 아직도 피해 상담 줄이어…패턴도 대응도 '대동소이'"



지난 4일, 전국미투생존자연대(미투연대)가 문을 연지 100일을 맞았다. '미투(Me too)'가 한창 뉴스창을 뒤덮던 때 문을 연 미투연대는 다른 단체와는 조금 다르다. 성폭력 피해 '생존자'들이 직접 또다른 피해자들을 지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점에서다. 연일 충격적인 폭로가 이어지던 것도 잠시, 어느새 세상은 잠잠해진 듯 보인다. 성폭력 피해자가 없어졌기때문일까?

"상담 연락이 하루에 서너건씩 들어오기도 해요. 지난 100일간 여러 경로로 도와달라는 연락을 50건 이상 받았어요. 개인적으로 받은 연락이 이정도니 다른 회원들이 받은 연락까지 하면 훨씬 많겠죠. '미투'가 잠잠해지고 있다고요? 전혀요. 지금도 피해자들은 생기고, 할 일은 많은데 여건이 안돼 돕지 못하고 있을 뿐이에요."(남정숙 미투연대 대표)

유미씨가 미투연대를 찾은 것은 지난 4월 말.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때다. 변호사들은 '이기기 어렵다'며 유미씨를 돌려보냈지만, 이곳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자'고 했다. 이미 자신의 싸움을 진행 중인 피해자들이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앞으로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고,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 알려줬다. 그리고 그 일들은 실제로 일어났다.

"직장내 성폭력 사건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흘러가요. 사건이 일어나면 가해자는 부인하고, 조직은 은폐하려고 해요. 그리고 피해자를 배제시키죠.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저 뿐만 아니라 '우리들'은 이미 겪어본 일이거든요. 피해자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다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눈에 보여요."(강민주 PD)

이들이 직접 다른 피해자를 도울 수 있는 이유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피해자들의 정서적 상황부터 가해자들의 대처법까지 내다본다. 직접 겪어봤기 때문이다. 피해자들이 가장 힘든 순간은 피해 상황을 떠올리며 진술서를 쓸 때, 가해자와 대면할 때다. 가장 어렵지만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을 할 때 이들은 서로의 손을 잡아준다.

"처음 연대에 와서 제 얘기를 하는데 계속 눈물이 났어요. 그런데 이제는 웃을 수 있어요. 다른 피해자들 얘기를 들었더니 눈물이 쏙 들어가더라고요. 그리고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제가 해야할 일들을 알려주고,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니까. 숨기고 싶은 일이었는데 이제는 말할 수 있고, 회사와 가해자에게 당당하게 사과를 요구할 수 있게됐어요."(고유미씨)

◇"나 같은 피해자 다시는 생기지 않길"



도움이 필요한 이들만 이곳을 찾는 것은 아니다. 도움을 주고싶은 이들도 이곳을 찾는다.

방송사에서 계약직으로 일하던 부현정씨는 2014년 직장내 성폭력을 신고했지만, 증거 부족으로 혐의를 입증하지 못했다. 현정씨가 가해자로 지목한 직장 상사는 처음에는 "미안하다"며 무릎을 꿇고 사과했지만, 불기소처분을 받자 2년여가 지난 뒤, 현정씨를 무고로 역고소 했다. 성추행으로 조사를 받을 때는 "그런 추행 행위 자체가 없었다"던 상사는 무고죄로 현정씨를 고소한 뒤에는 "그런 일은 있었지만 서로 감정이 통해서 한 일"이라고 했다. (관련기사: "뽀뽀해서 죄송하다"던 가해자, 말 바꿔 '무고'로 맞고소)

현정씨는 증거 부족으로 성추행을 인정받진 못했지만, 검찰 조차 조사 결과 '무고혐의를 인정하기 어렵다'고 명시한 만큼 상사의 주장을 법원이 인정하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현정씨는 "성추행을 신고한 것일 뿐, 증거가 부족해 범죄로 증명되지 않았어도, 무고를 한 것은 아니다"고 주장했지만, 법원은 현정씨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현정씨는 대법원 판결을 기다리고 있다. 그 사이 상사는 1억5000만원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고, 소송을 낸지 1년 2개월이 지났지만, 상사 측이 재판 기일을 미뤄달라고 요청하면서 결론은 늦춰지고 있다.

지금 상황에서 현정씨에게 남은 것은 '기다림' 뿐이다. 현정씨가 연대에서 받을 수 있는 도움은 많지 않은 상황이지만, 현정씨는 연대에 나오고, 다른 피해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들의 피해를 구제받을 수 있는 방법을 함께 찾는다. "더이상 나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이유에서다.

"저같은 상황에 빠지는 사람이 더는 없었으면 좋겠어요. 처음에는 제가 사실을 말하면 경찰이 수사를 해주고 진실이 밝혀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현실은 다르더라고요. 전 사과를 받고 싶었을 뿐인데, 경찰이 아닌 제가 성추행범죄를 입증했어야했고, 하지 못하니 무고로 역고소를 당하고 손해배상 소송까지 당했어요. 그런데 저만의 일이 아니더라고요. 미안하다던 가해자들이 변호사 조력을 받기 시작하면 태도가 바뀌어요. 제 단계까지 빠지는 다른 피해자가 없었으면 좋겠어서 연대에 나오고, 제 얘기를 해주고 있어요. 정말 다른 사람들은 저처럼 안됐으면 좋겠어요."

미투연대가 만들어진 이유는 현정씨가 연대에 나오는 이유와 같다. 이들은 성폭력 피해자가 되기 전에는 세상이 '시스템'에 따라 '합리적'으로 돌아간다고 생각했지만, 이들이 성폭력 피해자가 된 후에는 그렇지 않았다. 이들이 피해를 말한 뒤 성폭력을 해결하겠다고 만들어진 회사내 조직도, 정부 기관도, 사법기관도 제대로 된 해결책을 주지 못했다. 오히려 피해자의 '행실'을 탓하거나, 자신의 업무 영역이 아니라는 이유로 다른 기관으로 역할을 미루거나, 덮고 지나가자며 회유했다. 이들이 직접 해야겠다고 나선 이유다.

미투 연대 창립 멤버인 남 대표는 직장내 성폭력 피해자로 긴 시간 소송전을 벌였고, 법정 투쟁 끝에 1심에서 가해자에게 벌금 700만원과 40시간 성폭력 치료 프로그램 이수 명령을 받아냈다. 강PD 역시 전남CBS 내에서 일상적인 성희롱에 시달렸고, 이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해고를 통보받았지만, 투쟁 끝에 회사의 사과와 복직 결정을 받아냈다. 이들은 본인의 사건은 마무리지어 가지만, 또 이런 상황에 처하는 피해자는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어떻게든 연대를 이어갈 생각이다.

이들이 모두 한 목소리로 말하는 것은 '더이상 나같은 피해자가 나오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소박한 희망사항같지만, 사실은 세상을 바꿔보겠다는 얘기와 다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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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월27일 국회에서 열린 미투연대 발족식/ 사진=미투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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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형 성범죄는 '남녀' 문제 아니야…아직 숨어있는 피해자 용기 내길"

이들이 나선지 100일이 흘렀다. 100일이 지난 지금, 그래서 세상은 좀 달라졌을까?

"100일 전과 지금요? 많이 달라졌죠. 당장 기자들의 질문부터 달라졌어요. 예전에는 '더 센거 없어요?'라고 물어보는 기자들도 있었어요. 노골적인 피해 상황을 묻는 질문이 대부분이었죠. 아마도 경쟁이 과열되면서였겠지만, 당시에는 깜짝 놀랐어요. 지금은 성별과 관계없이 관심과 이해가 높아진 것을 느껴요."(강민주 PD)

물론 아직 갈 길은 멀어 보인다. '미투'가 쏟아져나온지 수개월이 지났지만, 이들이 바라보는 정부 차원의 대책은 여전히 '깜깜이'다.

"연대를 이어나가려면 어떤 식으로든 지원이 필요하죠. 지금은 회원들이 회비를 내고, 개인들이 사비를 들여 하고 있는데 한계가 있어요. 상담 문의는 쏟아지고 정말 안타까운 사연들도 너무 많은데 저희가 다 도와줄 수가 없어요. 사실 정부가 해야할 일인데. 여성가족부가 간담회를 열고 뭐가 필요하냐고 물어봐서 연대 지원과 모니터링 시스템 마련 등을 요청했는데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더니 그 뒤로 연락이 없어요. 그렇다고 정부 차원에서 피해자를 위한 대책이 나오지도 않고 있고요. 관련 정책을 만들 때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반영해달라고 했는데 그 조차도 제대로 안됐어요. 태스크포스(TF)팀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뭐하고 있는거죠?"(남 대표)

피해자가 배제된 채 나온 대책들은 이들이 볼 때는 이해하기 어려운 것들 투성이다. 대표적인 것이 '데이트폭력 3진 아웃제'다. 대검찰청은 지난 1일 데이트폭력에 대해 삼진아웃제를 도입하고 2일부터 시행하겠다고 밝혔다. 같은 피해자를 상대로 데이트폭력 전력이 두 번 이상인 사람이 세 번째 같은 일을 저지르면 정식 기소하고 구속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겠다는 것이 제도의 골자다.

"똑같은 사람에게 폭행을 당해 두 번이나 신고를 했는데, 한번 더 맞아야 적극적으로 처벌에 나서겠다는 얘기잖아요. 두 번이나 신고를 했다는건 이미 심각한 폭력 상황에 처했다는건데, 피해자를 보호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가해자에게 두 번의 기회를 주겠다는 것 아닌가요? 피해자의 입장과 상황이 전혀 고려되지 않은 것 같아요. 만약 피해자가 저항을 하다 가해자를 때리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서로 싸운 것이라고 하지 않을까요? 가해자를 때리는 등 목숨걸고 거부하지 않으면 '암묵적 동의'가 있었다고 하고, 적극적으로 거부하면 피해자가 가해자를 폭행했다고 보는게 현실인 것 같아요. 얼마나 저항을 해야 합법적인 '비동의'가 되는지 가이드라인이라도 나왔으면 좋겠어요."(부현정씨)

'여력이 없다'면서도 이들은 숨겨진 피해자들을 기다린다. 다른 곳이 아닌 미투연대만이 도울 수 있는 이들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를들면 남성 피해자다. 남성 중에서도 성폭력 피해를 입고, 말하지 못한 채 숨어있는 이들이 있으리라 생각하고, 함께 대처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권력형 성폭력의 피해자는 남녀 모두 될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오히려 남성들이 피해를 말하기 더 어려울 것 같아요. 하지만 여성 상급자, 또는 권력자에 의한 남성의 성폭력 피해 역시 분명히 존재할 거에요. 성폭력은 남녀가 아닌 권력의 문제니까요. 누구든 피해자가 될 수 있고, 우리는 끝까지 피해자와 함께 해보려고요. 결국 우리의 일이니까요."(강 PD)

박보희 기자 tanbbang15@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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