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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접촉의 역사…제네바 합의에서 9.19 그리고 6.12까지

머니투데이 김하늬, 백지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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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 접촉의 역사…제네바 합의에서 9.19 그리고 6.12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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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투데이 김하늬, 백지수 기자] [the300][6·12 한반도 대전환-세기의 첫만남]①첫 대화부터 정상회담까지 27년…종전선언 이끌어 낼까?



역사상 처음 북미 정상이 만난다. 양국 고위급 회담이나 전직 미국대통령의 방북 사례는 있지만 '살아 있는 권력' 간의 직접 만남은 이번이 처음이다.

1991년부터 시작한 북미 '접촉의 역사'는 공개된 것만 약 100회에 달한다. 전 세계를 양분했던 냉전의 시대까지만 해도 두 나라간 접점은 없었다. 북한은 한국전쟁 직후인 1955년부터 소련의 도움으로 핵 개발에 돌입했고 1974년 국제원자력협력기구(IAEA) 가입으로 전 세계에 핵 개발을 공식화 했다. 하지만 1990년을 전후해 소련이 개혁·개방 정책으로 선회하고, 동유럽 연방이 붕괴하기 시작하자 국제기구 대신 미국이 전면에 나서 '비핵화' 패러다임을 주도했다.

◇북미 첫 접촉에서 '제네바 합의' 까지 = 1991년 북미 고위 관리단이 워싱턴에서 첫 접촉을 한 직후 미국 국제안보연구소 대표단이 방북했다. 당시 단장은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었다. 이후 3년간 뉴욕과 제네바에서 3차에 걸친 북미고위급 회담이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선언하면서 전운이 감돌기도 했지만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민간인 신분으로 방북해 대화 분위기를 이어갔다. 1994년 10월, 북한과 미국은 '제네바합의'에 도달했다.

'북한과 미국간에 핵무기 개발에 관한 특별계약'이 정식 명칭인 제네바합의는 북한이 핵개발을 포기하는 댓가로 북미간 평화협정을 맺고 공식 수교와 북한 에너지 개발에 미국이 도울 것을 명시했다. 경수로 발전소 건설, 대체에너지(중유) 공급 등도 포함됐다.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빌 클린턴은 북핵 문제 해결에 적극적이었다. 합의 이후 크고 작은 고위급 회담과 협상을 이어갔다. 핵 전문가들을 북한에 파견해 핵시설 사찰 등의 수순을 밟으며 신뢰 회복과 경제협력, 인도주의적 협조를 약속했다. 2000년엔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국무장관이 북한을 방문해 김정일 전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기도 했다.


◇美 부시 정권 북한 '테러지원국' 지정…6자회담 9.19 성명 = 2001년 부시 대통령의 취임 첫 해 터진 9.11 테러는 미국의 대북정책 나침반을 정반대로 바꿨다. 북미관계는 경색됐고 미국은 이듬해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했다. 체결 이후 미 의회 반대로 '기본합의' 수준에만 머물러 구속력이 약했던 제네바합의는 쉽게 파기됐다.

미국은 북한에 '완전하며, 검증가능하며, 번복 불가능한 방식'(CVID: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armament)의 핵폐기 검증을 요구했다. 이를 요구한 사람이 당시 미 국무부 차관이던 존 볼튼 현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다.

미국은 북핵 문제 해결 과제를 인근 국가에 분담했다. 우리 정부를 비롯해 북한, 중국, 러시아, 일본까지 끌어들이는 '6자회담'으로 비핵화 논의의 불씨를 이어갔다. 2005년 4차 6자 회담 결과 북한이 모든 핵무기를 파기하고 NPT와 IAEA로 복귀한다는 내용의 '9.19공동성명'까지 이끌어냈다.


그러나 북한은 합의 1년여만에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하고 풍계리 핵실험을 단행했다. 협약은 깨지고 또다시 '원점'으로 회귀했다. 북미간의 접촉이 아예 단절된 건 아니었다. 2008년까지 북미관계 정상화 실무회의가 수차례 열렸고 크리스토퍼 힐 미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가 방북해 부시 대통령의 친서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 해 힐 차관보와 김계관 당시 북 외무성 부상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회동을 하기도 했다. 그 장소가 이번 북미정상회담 장소인 싱가포르였다.

2009년 버락 오바마 대통령으로 미국 정권이 교체되면서 빌 클린턴 전 대통령과 성 김 북핵 특사 방북, 리근 북한 미국국장 방미 등 대화 재개에 시동이 걸렸다. 오바마 행정부의 ‘전략적 인내’ 기간인 2012년 8월과 2015년 1월에도 양국은 싱가포르에서 ‘1.5트랙’ 또는 ‘투 트랙’ 대화를 이어왔다. 북미는 뉴욕과 제네바에서 다시금 고위급 대화를 연달아 가진 끝에 2012년, 2.29선언을 통해 과거 '9.19 공동성명' 재이행을 천명했다.

◇北 미사일 실험 vs UN 제재…6.12북미정상회담으로 종전선언? = 뿌리깊은 불신이 지워지지 않은 상태에서 맺은 협약들은 줄줄이 파기됐다. 국제사회는 제재를 강화했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 집권 이후에는 제재 국면은 더 공고해졌다. 2013년 UN 안정보장 이사회는 대북 규탄 결의안을 통과시켜 금수조치와 금융제재를 강화했다. 북한은 이때부터 2017년까지 총 50여차례 미사일 및 발사체(운반수단)를 발사했다. 지난해 9월엔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위기가 최고조가 됐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국제사회는 곧바로 유엔안보리 대북제재 결의 2375호를 만장일치 의결했다. 원유 공급 30% 감축 등 처음으로 유류가 제재 대상에 포함됐다.


장외에서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말싸움도 치열하게 이어졌다. 새해 벽두 '핵 단추 설전'이 대표적이다. 김 위원장이 신년사에서 "핵 단추가 책상 위에 놓여있다"고 하자 트럼프 대통령이 트위터에 "나는 더 크고 강력한 핵 버튼이 있다"며 싸웠다.

북미 대화의 물꼬는 그로부터 한 달 만에 갑작스레 터졌다. 지난 3월 북한에 특사로 다녀온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통해 김 위원장의 '조속한 만남' 희망을 전달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5월 안에 만나겠다'고 전격 호응하면서 시작됐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3월과 5월,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면담하며 정상회담 준비에 나섰다.

한 때 트럼프 대통령이 공개서신으로 "지금은 적절치 않다"며 회담 취소선언을 했지만 문 대통령의 적극 중재와 북 측의 "아무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앉아 풀어나갈 용의"라는 유화적 메시지로 정상회담 재개가 결정됐다.

김하늬, 백지수 기자 honey@m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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