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월드비전 공동기획 - 나는 난민 아이입니다
요르단서 만난 시리아 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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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즈락 난민캠프.’
표지판이 나타난 건 요르단 수도 암만 시내에서 자동차로 꼬박 1시간 반을 달린 때였다. 주위를 둘러보니 차가 달리는 아스팔트 도로를 제외하곤 온통 갈색 평야다. 사막이었다. 저 멀리로 네모난 흰색 건물 수천개가 줄지어 있는 것이 보였다. 2014년 4월 시리아 난민 수용을 위해 문을 연 아즈락 캠프다. 시리아 국경에서 90㎞ 떨어진 이곳에 난민 5만4000여명(2월 기준)이 터를 잡고 산다. 요르단 최대 난민캠프인 자타리 캠프(약 8만명)에 이어 두 번째 규모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요르단에 자리 잡은 시리아 난민은 약 65만7000명(미등록 난민 포함 시 130만명)이다.
지난달 24일(현지시간) 경향신문은 국제구호단체 월드비전과 함께 요르단 아즈락 캠프를 찾았다. 입장부터 까다로웠다. 입구에서 경찰에 여권과 각종 서류를 제출하고 20여분을 기다린 후 게이트가 열렸다. 취재 허가를 받지 못한 탓에 월드비전 관리 시설을 제외하곤 사진 촬영은 물론 접근조차 엄격히 금지됐다. 통상 방문 한 달 전에 신청하면 받을 수 있는 허가였다. 허가가 늦어진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방문 일주일 전 단행된 미국 주도의 시리아 공습과 그에 따라 높아진 긴장 때문으로 추측할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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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구에서도 자동차로 5분여를 달리고 나서야 사람이 보이기 시작했다. 제 몸집만 한 가방을 멘 아이들이 손을 잡고 걸어갔다. 가방엔 UNHCR, 사우디아라비아 등 국제기구와 지원국 이름이 적혀 있었다. 히잡 차림의 여성이 아이 손을 잡고 분주히 움직였다. 포장도로가 드물어 차바퀴가 구르는 대로 흙먼지가 폴폴 날렸다. 나무 한 그루 보기 힘들었다. 사막 위라는 것이 실감 났다.
사흘간 캠프 안팎의 난민들을 만났다. 이들은 취재진에게 간식을 대접하고 과거를 회상하며 웃기도 했다. 매일 폭탄이 터지는 아수라장의 시리아만 생각하고 보면 당황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볼수록 이 안정은 모래성처럼 위태로운 것이었다. 전체 난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아동들의 삶도 마찬가지다.
■ 동물을 본 적 없는 아이들
아즈락 캠프 3번 마을에 위치한 유치원(ECD)은 월드비전 지원으로 2016년 만들어졌다. 4~6세 난민 아동 500명이 유아교육을 받는 곳이다. 오전 11시 오전반 수업이 한창이었다.
흰색 철제 건물 십여동에서 체육, 미술, 음악, 영어 등 다양한 종류의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중 아이들 목소리가 유난히 우렁찬 교실로 들어가봤다.
“이 악기 이름은 뭐죠?”
교사 무함마드 왈리브 오베이드(25)가 탬버린을 집어들자 십여명의 아이들이 서로 손을 들었다. 얼룩말 그림이 그려진 티셔츠를 입고 머리를 하나로 바짝 묶은 하난(5)이 손을 번쩍 들고 “탬버린!”이라고 외쳤다. 음악 수업은 하난이 가장 좋아하는 수업이다. 좋아하는 이유를 묻자 “여기서는 춤추고 노래하는 법을 배울 수 있고 악기도 다룰 수 있다”며 웃었다.
이 수업은 내전의 상처를 간직한 아이들을 위한 치료 목적의 프로그램 중 하나다. ECD는 유치원 교육 외에 5~6세 아동을 대상으로 한 음악·미술 치료 수업을 함께 진행하고 있다.
음악교사 무함마드는 “음악은 아이들을 위한 테라피(치료법)”라며 “아이들은 악기를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면서 전쟁과 난민생활에서 얻은 스트레스를 해소한다”고 말했다. “이 수업을 통해 긍정적으로 바뀌고 웃음이 많아진 아이들이 많다”고 했다. 그 자신도 시리아 난민 출신인 무함마드는 “카라반(임시 주택)에 있으면 우울하다가도 이곳에만 오면 기분이 좋아지고 아이들에게서 희망도 얻는다”고 말했다.
이곳 아이들에게 캠프는 세상의 전부다. 바깥세상을 볼 수 있는 통로는 텔레비전 정도다. 이 때문에 ECD에서는 난민 아동을 위한 맞춤 교육이 진행된다. 1년 반째 ECD에서 교사로 일하고 있는 루바 압둘라(23)는 난민 아동들이 바깥 아이들과는 전혀 다르다고 설명했다. “이곳 아이들은 모든 걸 텔레비전, 태블릿PC로 배워요. 정보가 제한적이라 설명에도 어려움이 있고요.” 루바는 동물을 예로 들었다. “바깥 아이들은 동물원에 가서 동물을 볼 수 있어요. 하지만 이곳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죠. 사진이나 모형을 보여주면서 가르쳐줄 수밖에 없어요.” 사회화 과정도 다르다. 캠프에서 자란 난민 아동들은 신호등을 건너본 적도, 대중교통을 이용해본 적도 없다. 그래도 가르친다. 언젠가 캠프를 떠났을 때를 위해서다.
2016년 6월 요르단·시리아 접경 지역에서 트럭 자살폭탄 테러가 발생했다. 요르단 정부는 국경을 폐쇄했다. 이후 2년간 공식적인 난민 유입이 없었다. 즉 캠프 내 아이들은 이미 고향을 떠난 지 적어도 2년이 됐다. 4~5세인 이 아이들이 가진 바깥세상의 기억은 희미하다. 다른 교실에서 진행 중인 미술 수업에서도 이런 특징이 보였다. 십여명의 아이들은 ‘내가 좋아하는 것’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하얀 도화지에 집과 태양, 구름이 펼쳐졌다. 그런데 그림 속 집들의 모양이 약속이나 한 듯 비슷했다. 가로 폭이 좁고 세로가 기다란 직사각형 모양의 흰색 집에 지붕이 뾰족하다. 캠프 안 카라반이었다. ECD 최고 책임자 마야다 카슈(44)는 “우리의 가장 큰 목표는 난민 아동의 안전 그리고 캠프 밖 세상을 알려주는 것”이라며 “하다못해 세서미 스트리트나 미키마우스 같은 디즈니 캐릭터를 알려주는 것부터 시작한다”고 말했다.
■ 그래도 일상은 구른다
난민캠프에서도 일상은 굴러간다. 때가 되면 잠을 자고 밥을 먹는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공부를 한다. 캠프에 시장이 들어선 것은 그래서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즈락에는 3개 시장에 총 250개 상점이 있다. 유엔난민기구가 일부 난민과 요르단 현지인에게 영업허가를 내주면서 만들어졌다.
이날 오후 찾은 3번 마을 중심부에도 수십개 상점이 직사각형을 이루며 서 있었다. 과일, 채소, 휴지, 염소젖 등 생필품을 파는 슈퍼마켓부터 케밥 가게, 옷 가게, 자전거포 등 종류도 다양했다. 스마트폰을 파는 가게도 보였다. 김동주 월드비전 코리아 국제구호팀장은 “난민이 무슨 스마트폰이냐 하지만 일자리를 구하거나 시리아에 남겨진 가족과 연락하기 위해선 꼭 필요한 물건”이라고 말했다.
빵집에 들렀다. 커다란 화덕이 고소한 냄새를 뿜어냈다. 2디나르(약 3000원)를 내고 피자 3개를 주문하자 손바닥만 한 반죽에 잘게 썬 양파와 소시지 같은 토핑 몇 가지를 얹어 구워줬다. 토마토소스가 적어 주로 밀가루 맛이 났다. 가게를 나서는 길에 바깥에 놓인 쇼케이스가 눈에 띄었다. 절인 체리를 올린 초코케이크, 생크림케이크 예닐곱 개가 진열돼 있었다. 난민캠프에 케이크라니. 곧 이어진 월드비전 요르단 직원 오다이의 설명에 무릎을 쳤다. “난민캠프에서도 누군가는 생일을 맞으니까요.”
모스크가 캠프 한가운데 자리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대부분 무슬림인 난민들은 하루 다섯 번 기도를 거르지 않는다.
▶전쟁에서는 벗어났지만, 예측 가능한 삶은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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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꼭대기’에 사는 사람들
캠프 밖에도 난민들이 산다. 암만은 ‘언덕의 도시’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언덕 19개로 이뤄져 있다. 지난달 22일 경향신문이 만난 캠프 밖 난민들은 그중에서도 가장 가파른 언덕 꼭대기에 살고 있었다. 언덕을 오르는 자동차가 끼익끼익 여러 차례 멈춰선 후에야 마리암(51) 가족의 집에 도착했다.
마리암은 2013년 1월 시리아 남부도시 다라에서 딸 6명, 아들 1명과 함께 피란했다. 쉴 새 없이 터지는 폭탄을 피해서였다. 1월의 추위는 혹독했다. 집을 떠나던 그날 눈비가 섞여 내렸다고 마리암은 회상했다. “날씨를 확인할 겨를이 없었어요. 여행가방 몇 개에 옷 몇 벌만 챙겨 떠났거든요.” 한겨울 개울을 건널 때면 ‘악’ 소리가 절로 났다. 마리암은 누군가에게 들킬세라 아이들에게 “차갑다”는 소리 한번 내지 못하게 단속했다. 며칠을 걸어 요르단 북부 자타리 난민캠프에 도착했을 땐 가방과 신발 모두 잃어버린 후였다.
내전 초기 정돈되지 않은 캠프에서의 생활은 고달팠다. 무분별하게 지어진 탓에 텐트는 무질서했고 비가 오면 쓰러지기 일쑤였다. 불에 타기 쉬워 사고도 잦았다. 어린 딸들은 공용화장실 쓰기를 무서워했다. “차라리 시리아에서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리암 가족은 석 달 뒤인 그해 4월 도시로 나왔다.
5년 사이 8명이었던 가족은 11명으로 늘었다. 아들 에이만(26)은 같은 시리아 난민 여성과 결혼해 두 아들의 아빠가 됐다. 그는 가족 중 유일하게 돈을 번다. 취업허가증이 없어 몰래 하는 일이다. 시리아에서 휴대전화 가게를 했던 그는 이곳에선 농사일을 돕거나 건설 현장에서 막노동을 한다. 에이만은 “일이 있을 때는 한 달 100~150디나르(약 15만~22만원)의 돈을 번다”며 “그나마도 일정치 않다”고 말했다. 사실상 생활을 지탱하는 것은 유엔난민기구가 지원하는 바우처다. 유엔난민기구는 캠프 밖 난민 한 명당 매달 23디나르, 우리 돈으로 3만5000원 정도의 돈을 지급한다. 이 돈으로 11명 식구 입에 밥을 넣고 옷을 입히는 게 마리암의 일이다. 돈이 충분하냐는 질문에 마리암은 “괜찮은 돈”이라고 했지만 최소한의 생활만 가능할 뿐이다. 제조업이 취약해 대부분 물건을 수입해 쓰는 요르단은 중동에서 물가가 비싼 곳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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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시 난민 “돈·교육 문제”
요르단은 물리적 폭력으로부터 안전한 곳이지만, 삶이 위태롭긴 마찬가지다. 지난해 6월 국제구호단체 케어의 조사에 따르면 요르단 내 시리아 난민 82%가 빈곤선 아래에서 생활한다. 응답자의 78%는 실직 상태였고 89%는 월세와 식비, 의료비를 내느라 빚을 졌다고 말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아프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난민은 의료보험 혜택을 받지 못한다. 2년 전 에이만의 막내아들 하무데(2)가 태어났을 때 유엔난민기구로부터 받은 겨울용품 구입비 300디나르(약 45만원)를 몽땅 병원비로 썼다. 그래서 월드비전 지원으로 옥상에 설치한 태양열 패널은 가계에 큰 도움이 된다. 연중 300일이 따뜻한 요르단에서 태양열은 활용이 용이한 에너지다. 에이만은 “패널 설치 이후 매달 60디나르(약 9만1000원) 넘게 나오던 전기요금이 절반으로 줄었다”고 말했다. 도시 난민의 일상을 굴리는 것도 결국 국제기구 및 구호단체의 손길인 셈이다.
전쟁 전만 해도 시리아는 안정적인 중소득 국가였다. 한때 중동에서 가장 많은 난민을 수용할 정도였다. 중동 국가 중 교육 수준도 높은 편에 속했다.
23일 암만 외곽 도시 자르카에서 만난 자말(60)·파티마(50) 가족은 시리아의 전형적인 중산층이었다. 2013년 4월 고향 다마스쿠스를 떠나오기 전까지 자말이 운전을 해 먹고살았다. 풍족하진 않았어도 돈 걱정 한번 해본 적 없었다고 했다. “시리아에서는 가난한 사람이라도 집 한 채씩은 가지고 있었어요. 물가도 쌌고요.”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흉흉한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괴한이 찾아와 남자아이들을 인질로 잡아간다는 것이었다. 폭탄 소리가 점차 자주 들리면서 딸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기 시작했다. 중·고등학생인 두 아들을 걱정하며 밤잠을 설치는 날이 많아졌다. 설상가상 임신 중인 딸 미스린(32)이 다니던 산부인과가 폭격을 당했다. 그 길로 짐을 쌌다.
삶은 산산조각 났다. 자말과 파티마, 딸 미스린과 사위, 손녀 둘, 아들 2명 등 총 8명이 사는 집에서 가장은 아들 함마드(23)다. 시종 밝게 이야기를 이어나가던 파티마는 함마드 이야기가 나오자 눈시울을 붉혔다. 함마드는 대학에 가지 않고 자르카 시내 빵집에 취업했다. “시리아 여성들은 강해요. ‘0’에서 무엇이든 만들어낼 수 있어요. 그런데 대학은 어쩔 수 없었어요. 정말 똑똑한 아들이 학교에 가지 못한다는 게 가장 마음이 아파요.”
자말이 A4 크기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파란색 UNHCR 로고가 찍힌 종이에는 자말과 파티마, 미스린, 함마드 등 가족 8명의 사진과 이름, 생년월일 등이 적혀 있었다. 난민증명서다. 자말 가족의 요르단 생활을 지탱하는 종이다. “요르단은 안전합니다. 평화로워요. 하지만 이곳 생활은 우울해요. 일도 할 수 없고요. 시리아에서 정말 행복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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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깨 무거운 요르단
2012년 시리아 사태가 시작된 이후 560만명이 넘는 시리아인이 국경을 넘었다. 터키에 이 중 절반이 넘는 290만명이, 레바논에 150만명이 산다. 요르단은 이들 국가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시리아 난민(자체 집계 기준)을 받아들였다.
요르단은 남한만 한 땅덩어리에 80%가 사막인 나라다. 나머지 20% 지역에 970만 인구가 몰려 산다. 이른바 ‘오일 머니’를 가진 다른 중동 국가들과 달리 자원이 거의 없다. 물가는 높고 일자리는 부족하다. 2017년 4분기 요르단의 실업률은 18.5%로 25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적은 일자리를 두고 현지인과 난민 간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런 상황에서 난민 유입은 요르단에 상당한 부담일 수밖에 없다. 2016년 2월 세계은행 보고서에 따르면 요르단이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며 드는 비용은 매년 25억달러(약 2조6800억원) 이상이다. 요르단 국내총생산(GDP)의 6%, 정부 연간 수입의 4분의 1에 해당하는 액수다. 유럽의회 싱크탱크가 지난해 2월 “난민위기 지속에 따른 긴장은 요르단 정부를 향한 대중의 불만으로 이어졌다”고 지적한 것도 같은 배경에서다.
학교는 이미 포화 상태다. 난민 아동 약 13만명이 요르단 공립학교에 다닌다. 국내 209개 학교가 난민을 수용하기 위해 오전·오후반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난민 아동이 몰리면서 자르카 지역의 한 여학교는 내전 전 300명이었던 전교생이 7년 만에 두 배 넘게 뛰기도 했다.
자원 부족도 큰 고민이다. 유엔개발계획(UNDP)에서 요르단은 시리아 사태 이전부터 세계에서 가장 물이 부족한 5개 국가 중 하나다. 난민 유입 이후 일부 북부지방에서는 물 수요가 최대 40%까지 증가했다. UNDP 소속 요르단 주재 인도주의 조정관 안데르스 페데르센은 지난달 23일 공식 웹사이트 기고문을 통해 “일자리와 자원 확보를 위한 경쟁이 요르단 내 긴장을 키우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다행스럽게도 지금까지 요르단 사람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시리아 사태 장기화는 언제 요르단 내 평화에 균열을 낼지 모른다”고 경고했다.
조짐은 이미 나타나고 있다. 지난해 9월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시리아인에 대해 긍정적 인상을 가지고 있다고 응답한 요르단인은 27%였다. 시리아 내전 이전 51%에서 절반으로 떨어졌다.
요르단은 난민 수용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인정하고 국제사회의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 지난 2월 아이만 사파디 요르단 외무장관은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최고대표와 만나 “시리아 난민을 받아들이는 국가들의 부담 절감을 위해 지속적인 지원이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압둘라 국왕도 지난달 15일 사우디에서 개최된 제29회 아랍연맹 정상회의에 참석해 시리아 사태의 정치적 해결을 강조했다.
■ “모든 나라 책임, 해법도 함께 내야”
오랜 내전은 2000만 시리아 인구의 절반을 난민으로 만들었다. 유엔난민기구 통계로 560만명은 해외로 610만명은 국내 다른 곳으로 떠났다. 세계를 떠도는 팔레스타인 난민의 규모를 진작 넘어섰다. 가족은 해체됐고, 고향을 기억하지 못하는 아동 난민들이 이국 땅에서 자라고 있다. 난민을 넘어 디아스포라(민족 이산)라 할 만하다.
경향신문이 만난 난민들은 전쟁에 대한 공포보다 지겨움이 큰 듯했다. 에이만은 인터뷰 말미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묻자 이렇게 말했다. “우리 시리아인들은 다른 나라에서 사는 것도 전쟁도 정말 지긋지긋합니다.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모든 나라가 책임이 있어요. 그러니 해법도 함께 내야 합니다.”
이들이 고향에 돌아갈 날이 올까. 파티마에게 물었다. 8년째 좌절을 거듭해온 난민들은 이제 섣부른 예측도 하지 않는다. 그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곤 “오직 신만이 알 것”이라고 할 뿐이었다.
<월드비전 홈페이지(www.worldvision.or.kr)를 통해 세계 곳곳의 분쟁피해지역 아동보호 캠페인에 참여하실 수 있습니다. >
<아즈락(요르단) | 최민지 기자 mi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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