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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9 (목)

이슈 [연재] 중앙일보 '성호준의 골프인사이드'

[성호준의 골프 인사이드]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악천후’로 돕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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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 변화로 대회 파행 증가 추세

박성현, 비바람 속 36홀 돌고 우승

더스틴 존슨 파행 대회 3차례 독식

행운도 열심히 한 선수에게 따라

중앙일보

쇼트게임 때문에 시즌 초반 부진했던 박성현은 텍사스 클래식 최종 2라운드 4번 홀에서 칩인 이글, 18번 홀에서 칩인 버디를 잡아 지난해 8월 캐나다오픈 이후 9개월만에 우승을 차지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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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숫자는 2013년 LPGA투어 퓨어실크 바하마 클래식의 홀 경기 순서다. 당시 폭풍 때문에 골프장 일부가 물에 잠겼다. 선수들이 보트를 타고 골프장에서 이동할 정도로 비가 많이 왔다. 주최 측은 밤을 새워 코스를 복원했지만 다 끝내지 못했다. 대회를 할 수 없는 위기에서 주최 측은 묘안을 짜냈다. 경기가 가능한 12개 홀을 세 번 도는 방식이다.

베테랑인 줄리 잉크스터(미국)는 “이전에는 이런 일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스테이시 루이스(미국)는 “이런 상황에서 경기하는 것이 바보 같다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신설 대회라는 점을 이해하고 스폰서를 위해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했다.

기후 변화와 함께 악천후로 파행을 겪는 골프 대회가 많아지고 있다. 박성현(25)은 비바람 탓에 36홀 경기로 줄어든 텍사스 클래식에서 7일 우승했다.

LPGA투어가 유달리 파행이 많다. 지난해 미시간 주 그랜드 래피즈에서 벌어진 마이어 클래식은 2라운드 후 폭우가 내려 코스 일부가 유실됐다. 파5인 5번 홀을 다 복구하지 못해 그린 100야드 정도 거리에 티잉 그라운드를 만들어 놓고 파3 홀로 바꿔 경기했다. 1, 2라운드 파 71이었는데 비 온 뒤인 3, 4라운드는 파 69로 변했다. 1989년 켐퍼 오픈에서는 대회 전 2개 홀이 유실돼 첫날엔 16개 홀 파 63으로 경기했다. 대회 전체로는 52홀 경기로 끝났다.

PGA투어의 경우 36홀 경기는 공식 우승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최소한 54홀까지 가야 한다. 골프는 일종의 마라톤인데 날씨가 안 좋더라도 절반만 달린 걸 챔피언으로 볼 수 없다는 논리다. LPGA투어는 36홀을 마치면 공식 대회로 인정한다. 바하마에서 12홀을 세 바퀴 돈 이유다.

경기 축소가 반드시 천재(天災)라고 볼 순 없다. LPGA투어가 PGA투어보다 파행이 잦은 건 예비일이 적고 코스 복구를 할 재정적 능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또 악천후에 대처하는 노하우도 부족하다. 텍사스 클래식에서 노련한 캐디들은 그린 경사가 심하고 바람이 많은 지역인데 그린 속도가 너무 빨랐다고 했다.

권위있는 메이저 대회인 디 오픈을 주최하는 세인트 앤드루스 올드 코스는 바람이 강하다 싶으면 8번 홀의 그린 스피드를 늦춘다. 이 홀이 바람 골이어서 그린에서 공이 멈추지 않는 경우가 왕왕 있기 때문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골프 대회는 가능하면 72홀을 채우는 것이 좋다. 그래야 날씨에 따른 운의 차이를 줄이고, 실력이 좋은 선수가 우승할 가능성이 커진다. 또한 2라운드 선두가 3라운드, 4라운드 끝날 때까지 1등을 유지한다는 보장은 없다. 그런 점에서 축소된 대회의 우승자는 운이 좋다고 볼 수 있다.

이 행운을 직접 만들었다고 평가되는 선수도 있다. 2007년 경주 마우나오션 골프장에서 열렸던 하나은행-코오롱 챔피언십 우승자인 수잔 페테르센(노르웨이)이다. 3라운드 54홀 경기였는데 최종일 오전 바람 때문에 공이 그린에 서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바람이 잦아들었는데도 일부 선수들은 더이상 경기를 할 수 없다고 버텼다.

갤러리들이 “할 수 있는데 왜 거부하느냐”며 항의 시위를 해 분위기가 험악해지기도 했다. 당시 경기 중지를 강하게 주장한 선수 중 한 명이 페테르센이었다. 2라운드 선두였던 그는 3라운드가 취소된다면 자동으로 우승하게 돼 있었다. 당시 2위였던 지은희는 “컨디션이 좋아 경기가 열린다면 역전 가능성이 높았는데 아쉽다”고 했다.

악천후로 인한 경기 축소로 가장 큰 혜택을 받은 선수는 더스틴 존슨(미국)이 꼽힌다. PGA투어에서 54홀로 줄어든 최근 4개 대회 중 3개 대회에서 존슨이 우승했다. 그 우승들이 존슨의 자신감과 세계랭킹 1위 등극에 기여했다.

박성현이 우승한 텍사스 클래식은 복잡한 대회였다. 주최 측의 부주의로 경기 재개 여부를 파악하기조차 쉽지 않아 선수들이 전전긍긍했다. 연습장과 클럽하우스 사이의 이동 거리도 길었다. 박성현은 날씨 때문에 가장 고생한 그룹에 속했다.

박성현은 “지금까지 경기하면서 가장 날씨가 안 좋았던 경기는 지난해 텍사스 슛아웃(현 텍사스 클래식) 최종 라운드였다”고 했다. 우승 경쟁을 하다 최종 라운드에서 3오버파를 쳐 4위로 밀렸다. 그런 대회라면 피하는 게 일반적이다. 박성현은 그러나 올해 이 대회에 당당히 참가했다. 시즌 초반 부진했던 퍼트와 칩샷을 집중적으로 연습하고 나와 최종 라운드 4번 홀에서 칩인 이글, 마지막 홀에선 칩인 버디를 잡아냈다.

박성현도 물론 행운의 주인공이다. 그래도 결국 가장 열심히 한 선수가 행운을 잡을 가능성이 크다. 무명 시절 악천후 덕을 톡톡히 본 존슨처럼 박성현도 이 우승으로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찾기를 바란다.

성호준 골프팀장 sung.hoj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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