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일 오후 강릉시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 A조 예선. 한국 골리 맷 달튼이 캐나다 선수에게 깔려 괴로워하고 있다. [강릉=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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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중반. 한국남자아이스하키 실업팀인 안양 한라는 캐나다 전지훈련에서 낯선 현지팀과 연습경기에서 1-8 대패를 당했다. 알고보니 상대는 캐나다 동네 피자배달원·집배원·소방관들이 만든 동호회팀이었다.
2018년 2월18일. 한국남자아이스하키대표팀(세계 21위)은 평창올림픽 조별예선 3차전에서 캐나다 국가대표(1위)를 상대로 0-4로 졌다.
한국아이스하키 등록선수는 2675명(남자선수는 171명)에 불과하다. 반면 캐나다 등록선수는 63만1295명에 달한다. 아이스하키는 축구보다 국가별 수준차가 훨씬 크다. ‘빅6’ 캐나다·미국·스웨덴·러시아·핀란드·체코는 ‘넘사벽(넘을 수 없는 사차원의 벽)’이라 불린다. 한국은 1982년에는 일본에 0-25 참패를 당한 적도 있다.
대한민국 신상우가 18일 강원도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아이스하키 남자 조별 예선 A조 대한민국 대 캐나다의 경기에서 상대 선수들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강릉=뉴스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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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세계 최강 캐나다를 상대로 2피리어드에 유효슈팅 8-13으로 크게 밀리지 않았고 여러차례 득점찬스도 만들어냈다. 백지선(51·영어명 짐 팩) 감독은 “더이상 바랄 수 없을 정도로 잘 싸웠다”고 말했다. ‘어려운 상대를 맞아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고 박수를 보낸 네티즌들이 더 많았다.
20년 전 한국 실업팀이 캐나다 피자배달원팀에 참패를 당했는데, 한국 국가대표가 올림픽 9회 우승팀 캐나다 국가대표를 상대로 선전했다. 앞서 한국은 세계 7위 스위스에 0-8 대패를 당했지만, 세계 6위 체코를 상대로 1-2로 아깝게 졌다. 평창올림픽에서 희망을 봤다.
16일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러시아-슬로베니아 남자아이스하키 경기를 관전한 정몽원 회장. [강릉=박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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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은 1994년 실업팀 만도 위니아(현 한라)를 창단했고, 1997년 외환위기 때도 팀을 지켰다. 2013년 대한아이스하키협회장에 취임한 그는 해마다 한라 아이스하키팀에 50~60억원, 협회에 15억원을 출연했다.
선수들을 위해 직접 물을 준비하는 정몽원 회장. 서번트리더십을 실천하는 경영자다. [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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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부터 대표팀 원정경기마다 동행해 선수들이 묵는 3성급 호텔에서 함께 자고, ‘주무’처럼 선수들 물통에 물을 손수 채워넣었다. 대회기간 경기를 말아먹을까봐 면(麵)류를 절대 먹지 않는다. 정 회장은 “전 소면을 좋아하는데 강릉에서는 꾹참고 된장찌개를 먹었어요. 면을 먹고 팀이 지면 꼭 저 때문에 진 것 같아서…”고 말했다.
18일 오후 강릉시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 A조 예선 캐나다에 0-4로 패한 후 한국 선수들이 관중에게 인사하고 있다.[강릉=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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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아이스하키리그(NHL) 유명 블로거 퍽 대디는 2011년 “캐나다가 한국과 맞붙으면 162-0으로 이길 것”이라고 조롱했다. 국내 아이스하키 기자들은 평창올림픽 조별리그 3경기 모두 두자릿수 대패를 우려했다. 정 회장은 “걱정 안했다면 거짓말이죠. 그런데 162골을 언제 넣습니까? 넣기도 힘들고 먹기고 힘들어요. 체코를 상대로 졌지만 잘싸웠잖아요”라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정 회장은 “2008년에 세계선수권에 나가면 꼴찌팀이다보니 라커룸을 항상 후진걸 받았어요. 상대팀이 실력이 떨어진다고 우리선수들과 악수도 안했어요. 얼마나 서럽고 자존심이 상하던지. 스포츠는 외교랑 똑같아서 힘과 실력을 키워야한다고 생각했죠”라고 말했다.
18일 오후 강릉시 강릉하키센터에서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 남자 아이스하키 A조 예선. 한국 백지선 감독과 선수들이 캐나다에서 첫 실점한 영상을 보고 있다.[강릉=연합뉴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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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살 때 캐나다로 이민간 백 감독은 1991년과 1992년 피츠버그 펭귄스 수비수로 NHL 스탠리컵 우승을 차지했다. 백 감독은 지난해 4월 세계선수권 2부리그 우승을 이끌며 한국을 월드챔피언십(1부리그)에 올려놓았다.
1부 리그인 월드챔피언십 진출이 확정되자 기뻐하는 대한아이스하키협회 정몽원 회장(오른쪽)과 양승준 전무. 사진=하키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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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은 “백 감독은 대표팀 명단을 발표할 때 탈락한 선수들을 먼저 불러요. ‘훌륭한 재능을 가졌는데 이부분만 보완하면 다시 태극마크를 달거야’라고 위로해줘요”라며 “엄격할 땐 엄격해요. 지난해 우크라이나 원정경기 때 대사관에서 육개장을 줬거든요. 백 감독이 매운음식은 컨디션에 영향을 미칠수 있다며 절대 안된다고 하더군요”라고 말했다.
한국 공격수 조민호(30·한라)는 체코전 1피리어드에 선제골을 터트렸다. 그의 오른 손목에는 길이 5㎝가 넘는 흉터가 선명하다. 2012년 1월 일본 오지와 경기에서 상대선수의 스케이트날에 베여 오른 손목의 정맥과 동맥이 끊어졌다.
정 회장은 “당시 경기장에 있었는데 민호의 피가 뿜어져 나와 링크 주변이 붉게 물들 정도였죠. 선수생활이 끝나는거 아닐까 걱정는데 2달만에 복귀해 역사적인 올림픽 첫 골을 터트렸죠”라고 말했다. 조민호는 체코전 후 “부상이란 시련을 겪으면서 좀 더 단단해진 것 같아요”고 말했다.
정몽원 회장의 손. 반지에는 오륜기, 팀 코리아 등이 새겨져있다. [강릉=박린 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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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회장 손가락에 반지가 눈에 띄였다. 반지에는 하키 스틱·퍽·2018 평창·오륜기·팀 코리아가 새겨져있다. 정 회장이 올림픽을 앞두고 사명감을 갖자며 70개를 맞춰 선수단에 선물했다.
한라그룹 창업자인 故 정인영 회장은 생전에 ‘꿈을 꾸고, 꿈을 믿고, 그 꿈을 실현하라’란 말을 많이 했다고한다. 차남 정몽원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2003년 한라가 아시아리그 데뷔전에서 1-11로 졌어요. 10년 안에 우승하자고했는데 7년만에 정상에 섰죠. 대표팀은 4부리그부터 1부리그까지 올라왔어요. 제 이름은 꿈 몽(夢)자에 으뜸 원(元) 자를 써요. 꿈꾸는 건 으뜸이죠. 전 꿈을 포기하지 않을겁니다.”
한국은 20일 세계 4위 핀란드와 8강 플레이오프를 치른다.
강릉=박린 기자 rpark7@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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