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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22 (금)

이슈 난민과 국제사회

비록 난민일지라도…이렇게 행복을 꿈꿀 수 있는 우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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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할레드 호세이니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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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수단의 어린 난민 글래디스가 해어진 가족 사진첩을 뒤적인다. 어깨 너머로 이 모습을 보면서 나의 어린 시절을 회상한다. 1983년, 나는 고등학생이었다. 좋은 성적을 받고, 오래된 승용차가 굴러가도록 관리하고, 형제들과 함께 사용하던 방을 치우는 것 정도가 내 책임의 전부였다. 그리고 가장 큰 염원은 언젠가 브루스 스프링스틴(미국 록가수)의 공연을 보는 것이었다.

열여덟 살의 글래디스는 사실상 일곱 아이의 어머니 역할을 하고 있다. 남수단 내전으로 2016년 우간다로 왔고 어린 동생들과 사촌들의 보호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그의 가족들은 물론 글래디스조차 자신의 어린 나이를 잊은 듯하다. 아이들이 임베피 난민 거주지에서 왕복 4시간 거리인 학교까지 공부하러 가도록 하는 것은 이제 그의 책임이다. 글래디스의 하루 일과는 우물에서 물을 긷고, 장작거리를 줍고, 음식을 만들고, 유엔난민기구가 제공한 나무 기둥과 방수포로 만들어진 거주지를 청소하는 것으로 채워진다.

글래디스가 사진첩을 한 장 넘기자 이제는 존재하지 않는 가족들과 집이 보인다. 웃음 짓는 얼굴들, 정원에서 열린 잔치, 생일파티, 졸업식, 소풍과 결혼식, 현관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 이젠 엄마도 없다. 밤이 되면 글래디스는 아직 어린 네 명의 아이들을 침대에, 나머지 세 명은 침대 머리맡의 매트리스에서 재운다. 자신은 침대와 매트리스 사이, 남동생과 여동생, 사촌들 사이의 맨땅에서 잠을 청한다.

사진첩을 넘기며 침착하게 설명하는 글래디스를 보며 그가 어린 나이에 인간의 최악의 모습을 목격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글래디스는 비명을 지르는 여자들이 남아 있는 불붙은 버스에서 겨우 끌려 나왔다. 그러곤 아는 사람들이 하나하나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어째서 자신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어깨를 살짝 으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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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신발을 다시 신기 위해 무릎을 굽히자 그는 미소를 짓는다. 나를 집으로 초대한 그는 손짓으로 소박한 집을 가리키며 신발을 벗지 않아도 된다고 이야기했었다. 임시 거주지 안의 모든 것은 일상에서 벗어나 있다. 소중한 사진첩, 교과서 몇 권, 손때 묻은 성경책, 코바늘로 뜬 담요와 곰 인형까지 그 모든 것이 일상의 모조품일 뿐이다. 방안을 둘러보니 유엔난민기구와 함께한 지난 세월 동안 익숙해진 ‘필수 구호품’들이 보인다. 조리도구 세트, 물통, 아이들이 밤에 숙제를 할 수 있도록 하는 태양열 램프, 담요, 건조 식량, 비누와 생리대가 포함된 위생 키트 등이다. 자존감을 위한 기초 물품이자 삶의 재건을 위한 필수품이다. 소박할지언정 이곳은 글래디스와 아이들이 잠을 자고, 먹고, 웃고, 이야기와 비밀을 나누고, 다투고 화해하는 보금자리다. 이 지붕 아래에서 이들은 안정적이고 안전한 생활을 할 수 있다. 작별 인사를 하기 전, 내 어릴 적 소원이 떠올라 꿈을 물어본다. “남동생과 여동생을 잘 돌보고 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직업을 갖는 것이죠. 가장 이상적인 직업은 회계사예요.”

임베피에서 화이트 나일강 반대편의 아주마니로 향하는 울퉁불퉁한 길에 들어서며 나는 글래디스의 의지력에 감탄한다. 글래디스와 같은 아이들은 매일 이 국경을 넘는다. 7만5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보호자 없이 또는 가족과 헤어진 채 남수단에서 피신한다. 한 차례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아주마니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폭풍우가 지나간 뒤 늦은 오후의 햇살이 강물에 비치고, 저 멀리 하마의 등이 보이는 화이트 나일강의 해가 질 무렵은 아름답다.

하지만 강 반대편에서 남수단 내전의 잔혹성이 다시 고개를 든다. 유엔난민기구의 호송선이 강 건너 팔로린야 정착지로 가기 위해 대기 중이다. 버스 안에는 난민 수십명이 앉아 있다. 이들은 파족 마을의 공습을 피해 불과 몇 시간 전 국경을 넘어 우간다로 들어왔다. 나는 교복을 입은 남자 아이들, 부녀자들, 지치고 놀란 표정의 남자들이 버스에서 내리는 것을 본다. 그들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 채 선착장 앞에 말없이 모인다. 남자들 중 한 명이 내게 군인들이 파족 마을의 도로, 병원, 학교에서 민간인을 공격했다고 이야기한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버리고 도망쳤고, 노인과 병자 등 피하지 못한 사람들은 학살당했다. 그의 가족은 3일을 굶었고 겨우 풀뿌리를 먹으며 국경으로 걸어갔단다. 나는 태어난 지 일주일이 된 갓난아기에게 젖을 먹이는 어머니를 지나친다.

버스에서 나오는 아이들의 지친 얼굴에서 아프리카 최대 규모의 위기이자 가장 빠른 속도로 팽창하고 있는 남수단 난민 상황의 심각성을 절감한다.

180만명이 넘는 난민이 인접 국가로 피신했고, 이 중 100만명이 우간다로 향했다. 난민의 62%는 겁에 질리고 혼란스러운, 보호와 거처를 간절히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다.

유엔난민기구 동료들이 파족에서 새로 온 난민들을 맞아 음식과 임시 거주지, 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다고 안심시키는 모습을 지켜본다. 유엔난민기구 남수단 긴급구호기금이 14%밖에 모금되지 않은 우울한 상황이다. 그럼에도 위기의 최전방에서 이뤄지는 이런 활동은 무척 존경스럽다. 난민들을 가득 태운 버스 행렬을 보며 기금 마련의 절박감을 느낀다. 기금이 더욱 필요한 까닭은 이곳 우간다의 인도주의 단체들이 야심에 찬 혁신적이며, 실패해서는 안되는 난민대응책을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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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우간다 여정은 이전에 방문했던 다른 나라의 난민촌 방문과는 사뭇 다르다. 가장 확연한 차이점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난민촌이 없다는 점이다. 땅을 가진 개인과 지역공동체, 정부가 관대함과 연대감의 표시로 난민들에게 땅을 나누어 준다. 지친 표정의 난민들을 바라보며 그래도 며칠 뒤면 이들이 긴급 임시 거주지를 세울 수 있는 땅을 할당받게 될 것이라는 사실에서 작은 희망을 느낀다. 그들은 그 땅에 농사를 지으며 점차 원조에 의지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우간다에 거주하는 난민들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고, 현지인들과 동일한 의료 서비스와 교육을 제공받고, 취업과 창업도 할 수 있다.

난민과 관련된 아픈 역사를 지닌 우간다는 전쟁 등으로 난민들이 짧게는 몇 년, 길게는 몇 십년을 고국을 떠나 생활할 수도 있다는 점을 이해한다. 난민을 인도주의적 차원에서만 바라보는 게 아니라, 국가발전계획에 포함시키는 것이 모두에게 이로운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우간다의 정책은 진보적이고 자비로울 뿐 아니라, 자국민의 삶까지 돕는 현명한 것이다. 비디비디의 예를 살펴보자. 우간다 북부의 이 작은 마을은 9개월 만에 27만2000명의 난민을 수용하는, 세계에서 가장 큰 난민 거주지 중 하나가 됐다. 난민들이 오기 전 이곳은 학교, 보건소, 다듬어진 도로조차 없었다. 야하야라는 농부는 과거엔 학교가 너무 멀어 자녀들이 교육을 받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수확물을 팔러 시장에 가기 위해서 과거엔 며칠씩 걸렸지만 이젠 새 도로로 몇 시간이면 된다고 한다. 그는 정부정책을 통해 땅을 기부하거나, 경작할 땅이 필요한 난민에게 땅을 직접 나눠 주기도 했다. 우간다 난민정책이 이뤄낸 실용적인 공존 속에서 나는 ‘실리적 관대함’의 힘을 볼 수 있었다.

비디비디를 떠나게 될 즈음, 나는 인간의 관대함이 가진 힘도 목격하게 됐다. 크고 상냥한 눈에 호리호리한 체형의 아이샤는 29세다. 남편에게서 버려진 그는 13세와 5세인 두 아들이 있다. 지난해 8월 그는 아들들과 두 어린 조카와 함께 남수단에서 피신했다. 죽음의 문턱을 넘은 아이샤와 아이들이 우간다에 도착했을 때,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유엔난민기구의 지원으로 그는 튼튼한 집을 짓고, 아이들을 학교에도 보낸다. 아이샤는 버려진 아이의 입양을 결정했다. 입양할 아이를 만나고 나서야 아이의 오른쪽 몸이 마비됐고 대소변도 가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스스로 밥을 먹거나 앉거나 말도 할 수 없었다. 기도로 하룻밤을 보낸 이튿날 아침, 아이샤는 깨달음을 얻었다. “이 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그 누구에게도 쉬운 일은 아닐 거예요. 하지만 저는 포기할 수 없어요. 누군가는 이 아이의 가족이 돼 안전하게 살 수 있는 곳을 제공해야 되니까요.” 아이샤는 새로 얻은 딸의 이름을 글로리아(Gloria), 머시(Mercy), 그레이스(Grace) 세 개 중 어느 것으로 할까 고민했다. 결국 머시로 정했다. 이 단어가 지닌 간결하고도 가슴 아픈 의미를 떠올리며 그는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우간다 정부의 호의에 감사하지만 아이샤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 글래디스도 같은 말을 했다. 남수단에서 교육부 국장을 지냈고 지금은 뉴만지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이비드 역시 같은 말을 한다. 학교 이야기를 나누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가끔은 신께서 왜 나를 난민으로 만드셨는지 이해하기 힘들어요. 얼마나 더 난민으로 살아야 할까요?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요?”

우간다, 차드, 요르단, 이라크, 그리고 내가 태어난 아프가니스탄에서 만난 모든 난민은 하나같이 같은 소원을 말했다. 자신이 태어난 곳에 대한 깊은 애착은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 그러나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경우에는 소속감을 느끼게 되는 곳이 집이 된다. 사람들이 ‘너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아’라고 말하지 않는 곳 말이다. 그러나 오늘날 이 세상에는 난민을 원치 않는 두려움의 목소리가 너무도 많다.

나는 따뜻한 끼니와 건강 진료가 제공되던 콜루바 환승센터에서 매일 목격한 아름다운 광경을 떠올린다. 난민들에게 토지가 할당되기 전 매일 아침, 우간다 국무총리실 직원은 마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면서 난민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자녀의 안전을 위해 이곳에 오셨습니다. 이 아이들이 우리의 희망이자 미래입니다. 우리의 소망은 여러분이 여기 이곳 새로운 보금자리에서 아이들의 꿈과 희망을 이루도록 하는 것입니다. 우간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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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할레드 호세이니(52)는 아프가니스탄 카불에서 외교관의 아들로 태어났다. 구소련의 아프간 침공 후 1980년 가족과 미국에 난민신청을 했다. 미국에서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로 일하다 2003년 장편소설 <연을 쫓는 아이>로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이 작품은 호평 속에 80여개국에서 출판되고 영화로 만들어졌다. 2006년부터 유엔난민기구의 친선대사로 활동 중이다.


<할레드 호세이니 | 유엔난민기구 친선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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