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 피해자 편 : 그에겐 아무 수단이 없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몰카’, ‘리벤지 포르노’ 등으로 불리는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들에게 엄청난 정신적·경제적 피해를 끼친다. 그러나 촬영자나 유포자에겐 벌금 몇백만원이 고작이다. 시청한 이들은 본인의 행위가 범죄인지조차 모른다. 생과 사를 오가는 극심한 고통 속에 사는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고통에 부합하는 합당한 처벌을 요구하고 있다.
‘동창들 사이에서 이상한 소문이 돈다.’ 친구의 연락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성관계 영상이 인터넷에 돌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저 질 나쁜 ‘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영상이 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문’은 곧 실체를 드러냈고, 인생을 무너뜨리기 시작했다. <한겨레>와 서면 인터뷰에 응한 성관계 영상 유출 피해자 ㄱ씨, ㄴ씨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 지옥’이라고 고통을 호소했다.
소문 듣고 확인해 보니 악몽
숨이 막히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성인 사이트엔 영상 수두룩
혼자 아무리 지워도 또…또…
삭제 업체는 “수백만원 달라”
방심위 맡겨도 10여일 걸려
증거 요구하는 경찰에 절망
유포자 찾아내도 처벌 경미
“사람이 두렵고 매일 죽고 싶어
나 같은 피해자 안 생기게 해주길”
■ 보름 만에 영상을 찾다 그날부터 ㄱ씨는 매일 피투피(P2P. 개인간 파일 공유) 사이트를 뒤졌다. ‘소문’이라는 점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 실제 영상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시작한 일이었다. ‘몰카’로 보이는 영상은 엄청나게 많았다. 영상을 볼수록 불안해졌다. 진짜 자신의 영상이 있을까봐 두려워졌다. 악몽에 시달리는 밤이 이어졌다.
보름째 되던 날, ‘오늘 하루만 더 찾아보자’고 생각하던 ㄱ씨는 마침내 자신이 등장하는 영상을 찾아냈다. 본인과 비슷하게 생긴 여성을 영상에서 볼 때마다 심장이 덜컥하고 내려앉는 기분을 수십번 느꼈기 때문에 덤덤할 줄 알았다. 그런데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기억도 안 날 만큼 오래전의 모습이었다. 이 영상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 공간을 떠다니고 있었을까. 머릿속이 하얗게 방전되는 것 같았다. 하나를 찾으니 두 번째는 쉬웠다. 비슷한 제목으로 검색하니 다른 사이트에서도 영상이 속속 발견됐다. 밤새 울면서 영상을 찾았다. 하지만 하룻밤에 해결할 수 있는 양이 아니었다. 이런 영상을 판매해 수익을 얻는 소라넷류의 성인 사이트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웹하드 업체만 해도 전국에 52곳(지난 7월 기준·64개 누리집 운영)이다.
■ 혼자서 영상을 지우다 ㄱ씨는 이런 동영상을 전문적으로 지워준다는 업체를 찾았다. 돈이 문제였다. 너무 비쌌다. 그 돈을 내면서 몰카를 지워야 한다는 게 억울하고 원통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디지털 장의사 업체들은 보통 3~6개월 단위로 피해자와 계약을 맺는데, 비용은 한달 200만~300만원에 이른다. 이런 경우, 3~6개월 단위 계약이기 때문에 최소 600만원이 필요하다. 하예나 디지털성범죄아웃(DSO) 대표는 “민형사 절차를 밟기 위해 변호사를 구하면 두세달에 2000만~3000만원이 드는 경우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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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ㄱ씨는 혼자 지워나가기 시작했다. 피투피 사이트를 돌아다니며 영상을 찾고, 찾으면 이메일로 ‘지워달라’고 요청했다. 매일 사이트를 뒤졌고, 뒤질 때마다 영상이 나왔다. 찾아야 할 사이트가 너무 많아 엑셀로 정리해야 했다. 헷갈리지 않게, 회사 업무처럼 매일 일지도 썼다. 이메일을 보내면 바로 삭제는 해줬다. 하지만 얼마 안 가 영상은 다시 올라왔다. 3개월이 지났을 무렵, ㄱ씨는 이 싸움이 어쩌면 영원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통하면 ‘대리 삭제’가 가능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피해자는 ㄱ씨처럼 방심위의 존재조차 알지 못한다. 방심위에 의뢰한다 해도 더딘 처리 속도에 피해자들은 애를 태운다. 민원이 접수된 뒤 ‘시정 요구 의결’까지 평균 10.9일(올해 6월 기준)이 걸린다. 그나마 18.2일(올해 2월 기준)에서 줄었다. 서승희 한국사이버성폭력대응센터 대표는 “디지털 성범죄는 시의성이 중요한 만큼, 최대 3일 정도로 줄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 경찰 신고를 포기하다 영상 제목은 끔찍했다. ㄱ씨는 ‘잘 대주는 과 후배’가 되었다가 ‘색기 넘치는 전 여친’이 되기도 하고 ‘속궁합 잘 맞는 섹파년’이 되기도 했다. 두세달 새 10㎏이 빠졌다. ‘이렇게 사느니 그냥 죽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ㄱ씨는 끝내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하면 피해가 ‘공식화’될 것 같았다. 기록에 남고, 알려질 것 같았다. 유포한 사람, 본 사람, 또 올리는 사람, 공유하는 사람, 댓글 다는 사람, 다운받는 사람…, ‘다 죽이고 싶다’는 살의에 섬뜩해졌다가 현실적으로 다 잡아낼 수 없다는 체념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용기를 내 경찰에 신고해도 피해자는 거대한 절망에 부딪히곤 한다. 또 다른 피해자 ㄴ씨가 그런 경우다. 그는 올해 초 지인을 통해 영상 유포 사실을 알았다. 최근 유포자 5명의 게시글을 캡처해 경찰서 사이버 수사팀을 찾아가 신고했다. 며칠 뒤 남성 경찰이 전화를 걸어왔다.
“ㄴ씨가 채증한 자료에 본인 성기가 나와 있지 않네요. 성기가 나오게 다시 캡처해 오셔야 해요.” 영상만으로는 ‘몰카’라는 걸 입증할 수 없어서 성폭력처벌법을 적용할 수 없다. 따라서 일단 정보통신망법의 ‘음란물 유포죄’를 적용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음란물임을 입증하기 위한 성기 노출 장면이 필요하다는 얘기였다. 전화를 끊은 ㄴ씨 머릿속엔 ‘한강’이 떠올랐다. 잠시 진지하게 자살을 고민했다. 남성 경찰들에게 계속 자신의 성기 사진을 보여줘야 한다는 수치심을 견디기 어려웠다.
물리적 성폭력 사건과 달리, 디지털 성범죄 피해자의 경우 남성 경찰이 여성 피해자를 면담하는 경우가 흔하다. “해외 사이트에 올라와 잡을 수 없다”, “사건 처리에 최소 석달이 걸린다”는 말처럼 ‘안 된다’, ‘못 한다’, ‘오래 걸린다’는 이야기를 듣는 것도 예사다.
■ 세상이 두려워지다 극심한 고통 끝에 최초 유포자를 찾아내도 처벌은 미약하다. 김현아 변호사가 2011년 8월부터 2016년 4월까지 서울 각 지방법원에서 나온 영상물 촬영·유포죄 66건의 1심 판결문을 분석한 결과, 선고유예된 사건은 5건, 벌금형이 선고된 사건은 19건, 징역형은 18건, 집행유예는 24건이었다.(‘성폭력 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상 카메라 등 이용 촬영죄에 관한 연구’) 벌금형이 선고된 19건 중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그친 사건도 10건이었다. 김 변호사는 “‘인격살인’이라 불릴 정도로 심각한 위법행위지만, 집행유예나 벌금형에 그치기 때문에 국민들은 디지털 성범죄가 심각한 범죄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고 지적했다.
어렵게 최초 유포자를 처벌해도 사건의 완전한 ‘해결’은 불가능에 가깝다. 영리 목적이나 단순 흥미를 위해 인터넷에 올리는 재유포자들 때문이다. 수백만원을 들여 3~4개월간 영상을 삭제해도, 영상 제거 비용을 거의 탕진할 즈음 영상이 다시 유포되면 피해자들은 모든 걸 포기하게 된다.
ㄱ씨는 모든 동창생과 연락을 끊었다. 밖에 나서면 누가 알아볼까 불안하다. 회사에서 남자 직원이 말을 걸면 영상 관련 얘기를 할까봐 조마조마하다. ㄴ씨는 언제까지 이 싸움을 혼자 해나가야 할지 막막하다.
“제발 보지 마세요. 당시 저는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고 있었던 것뿐이에요. 그 영상은 야동이 아니고, 그 영상의 여성은 포르노 배우가 아닙니다. 전 지금도 후유증이 있고, 앞으로도 평생 고통을 안고 살아야 하는데, 어떻게 그들은 벌금 몇백만원으로 끝나나요? 제 영상이 재유포되어도 아무도 보지 않고, 유포한 사람을 지탄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 같은 피해자가 더는 없기를 간절히 바랍니다.”(ㄱ씨) “하루하루 너무나 죽고 싶어요. 매일 아침이 두렵고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것도 두렵습니다. 저 같은 피해자가 또 생기지 않게 도와주세요. 너무 힘들고 세상이 두렵습니다.”(ㄴ씨) 정부는 이달 말께 종합 대책을 발표할 예정이다.
고한솔 기자 so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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