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정책연구원 연구 결과 / 성추행 38% 정서적 폭력 37% / 연인·부부 ‘무의식적 학대’ 만연 / 전문가 “상대 소유물로 인식 탓” / ‘매 맞는 남편’도 지난해 6440명 / 여성 중심적 지원 체계로 ‘소외’ / 가정 문제 치부… 법 개입 어려워
지난 18일 서울 한복판에서 만취한 20대 남성이 전에 사귀던 여자친구를 폭행했다. 치아가 5개나 부러질 정도로 심각했던 폭행은 폐쇄회로(CC)TV에 고스란히 찍혀 공개됐고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지난 13일에는 서울북부지법에서 남편의 폭행에 25년간 시달리다 결국 남편을 살해한 아내가 징역 3년형이 선고되기도 했다. 남편의 행패는 집요했고 우울증을 겪던 아내는 자살을 시도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소위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들이다. 가장 가까운 이들의 폭력에 우리 사회가 멍들어가고 있다. 성인 남성의 80%가 유·무형의 데이트폭력 가해자라는 연구 결과가 나왔고, 한 해 20만건이 넘는 가정폭력 신고가 접수될 정도다.
정부가 국정 100대 과제 중 하나로 가정, 여성에 대한 보복 등의 ‘젠더 폭력’ 근절을 포함해 강력 대응을 공언한 가운데 데이트·가정폭력을 사적인 일로 치부하는 인식부터 바꿔야 한다는 지적이 쏟아지고 있다.
◆남성 10명 중 8명 데이트폭력 가해 경험
성인 남성 10명 중 8명은 적어도 1번 이상 데이트폭력을 한 적이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결과도 나왔다.
20일 한국형사정책연구원의 ‘성인의 데이트폭력 가해 연구’에 따르면 19세 이상∼64세 미만 남성 2000명 중 1593명(79.7%)이 연인의 행동을 통제하거나 폭력, 성추행 등을 최소 1번이라도 한 경험이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누구와 함께 있는지를 항상 확인하거나 ‘치마가 짧다’며 옷차림을 제한하고 특정 모임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통제 행동’을 한 경험이 71.7%로 가장 높았다. 성추행(37.9%), 폭언이나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심리·정서적 폭력(36.6%)도 적지 않았고 신체적 폭력(22.4%), 성폭력(17.5%)이 그 뒤를 이었다.
연구에서 특히 주목되는 건 남성들이 데이트폭력의 가장 흔한 유형인 통제행동을 폭력으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전문가들은 상대방을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소유물’로 생각하는 이런 행동이야말로 사랑하는 연인이 ‘가해자’로 돌변하는 출발점이 된다고 지적한다.
한국여성의전화 손문숙 활동가는 “데이트폭력의 절반 이상이 연애 초반 일상적으로 상대를 옭아매는 행동을 ‘사랑’이라고 받아들이는 것부터 시작한다”며 “이런 관계가 지속되면 욕을 하거나 때리고, 심지어 성폭행이나 살인에까지 이르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매 맞는 남편’도 늘어
경찰청이 집계한 ‘가정폭력 신고·검거 현황’에 따르면 가정폭력은 증가 추세가 뚜렷하다. 2013년 16만272건이던 신고건수는 해마다 증가해 지난해에는 26만4528건을 기록했고, 올해는 6월까지 13만7459건이 접수됐다. 검거인원은 2014년 1만8666명이던 것이 이듬해 4만7549명으로 훌쩍 뛰었고, 지난해엔 무려 5만3476명에 달했다.
가정 내 여성의 지위가 높아지면서 남성 피해자가 늘어나고 있다는 점도 눈에 띈다. 2015년 5228명에서 지난해 6440명으로 증가했다. 지난해의 경우 30대 이상이 4081명으로 전체의 63%를 차지해 ‘매맞는 남편’이 늘고 있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남성 피해자에 대한 지원체계가 부족하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남성 피해자를 위한 상담센터는 민간에서 운영하는 서울 양천구의 ‘남성의 전화 상담센터’ 한 곳뿐이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이미정 여성권익연구센터장은 "가정폭력 피해자 다수인 여성을 중심으로 피해자 지원 서비스가 이루어지는 것이 현실인데, 상대적으로 남성은 피해자 지원에 있어 사각지대에 처해있다"고 지적했다.
김민순·배민영 기자 soon@segy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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