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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제로 던 비평 2: 캐릭터론 1 -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의 의미

매일경제 이경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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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이즌 제로 던 비평 2: 캐릭터론 1 -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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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경프리미엄 '게임의 법칙' 은 2017년 출시되어 큰 인기를 얻은 게임 '호라이즌 제로 던'에 대한 비평을 준비했습니다. 분량 문제로 총 4부에 걸쳐 연재될 예정인 글의 목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1.[호라이즌 제로 던 비평(1) 순환형 아포칼립스의 세계관에 대하여].

2. 캐릭터론 I - 세계관 속에서 주인공의 의미
3. 캐릭터론 Ⅱ
4. '호라이즌 제로 던'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이슈

이 연재에는 '호라이즌 제로 던'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으며, 그 밖에도 '매스 이펙트' 등 다른 게임에 대한 결정적 스포일러 또한 포함되어 있음을 사전에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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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편으로부터 이어집니다.

[게임의 법칙-38] ◆추방자로 시작하는 외부자로서의 주인공

제로던의 주인공인 에일로이를 주인공으로 규정짓는 요소는 크게 두 가지다. 그 중 먼저 드러나는 것은 태생적으로 가지게 된 외부자로서의 속성이다.

에일로이는 게임 시작부분에서 노라 부족의 추방자라는 낙인을 받고 시작한다. 아메리카 원주민의 문화에서 많은 부분을 가져온 느낌을 주는 노라 부족은 자연을 신성하게 여기고 모계 중심으로 구성된 부족 사회를 유지하며 멸망한 전대 문명의 유적들을 '철의 문명'이라 부르며 그들의 멸망이 자연을 거스른 악마 숭배로부터 비롯되었다고 믿는 부족이다.


노라 부족은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이들을 부족에서 추방하는 형태로 처벌한다. 그런데 에일로이의 경우는 좀 특이한데, 태어날 때부터 이미 추방자였다는 사실이다. 죄를 지을 겨를 도 없을 나이부터 추방자가 되어 부족 밖에서 살아왔다는 것은 에일로이가 선천적으로 외부자의 숙명을 지녔음을 가리킨다.

게임 중후반부에 에일로이가 추방자가 된 이유가 밝혀지는데, 바로 부모가 없는 아이이기 때문이었다. 부모를 알 수 없는 아이가 갑자기 부족의 지하 신전 (아직 보안시스템이 작동하는 전대 문명의 출입구) 앞에서 발견된 아이는 부족 장로들의 눈에는 신이 내려주신 아이 아니면 악마의 자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에일로이는 전대 문명에서 생태계 보존을 위해 프로젝트 제로 던을 수행했던 엘리자베트 소벡 박사의 유전자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복제인간이다. 그 출생의 비밀이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노라 부족의 입장에선 완벽한 외부자일 뿐이고, 출생의 비밀이 알려진 이후부터는 오히려 더욱 게임 속 세계와는 동떨어진 외부자일 수 밖에 없는 구조다.

◆포커스: 다른 차원의 연계를 만드는 주술사의 도구


현 세계의 혈통이 아닌 전대 문명의 복제인간인 에일로이를 독특한 위치로 규정짓는 두 번째 지점은 에일로이가 가진 전대 문명의 산물, '포커스'다. 귀에 살짝 꽂는 형태로 착용하는 포커스는 요즘의 기술로 바라보자면 '홀로렌즈' 와 같은 일종의 증강현실 장치다.

주인공 에일로이가 어린 시절 유적에서 발견해 사용하는 '포커스' 는 주변 사물의 정보를 읽어내 전달해 주는 일종의 증강현실 장치다.

주인공 에일로이가 어린 시절 유적에서 발견해 사용하는 '포커스' 는 주변 사물의 정보를 읽어내 전달해 주는 일종의 증강현실 장치다.


놀랍게도 포커스는 어마어마한 양의 정보를 처리한다. 포커스 착용자는 증강현실을 통해 주변의 사물을 바라볼 때 보다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일반인의 눈으로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생물의 위치나 흔적들, 작동방법을 알 수 없는 전대 문명의 유물들을 모두 살펴볼 수 있다. 특히 벌판을 활보하는 여러 기계 야수들의 경우에는 그 정도가 더한데, 포커스로 기계들을 바라보면 기계의 종류와 행동패턴, 구조와 약점까지도 볼 수 있는 수준을 자랑한다.

추방자의 숙명을 품고 태어난 에일로이는 고대 문명의 유적에서 포커스를 획득하면서 남들이 볼 수 없는 세계의 이면과 소통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며, 이 힘을 통해 주어지는 난관들을 극복하고 마침내 엔딩에 이르게 되는 주인공이 된다. 그리고 이 과정은 마치 일종의 샤먼과 같은 형태로 게임 안에서 표현된다.


대표적인 장면이 메리디안의 수호대장인 에렌드와의 이벤트다. 기습으로 살해당한 누나의 살해범을 찾아달라는 부탁에 에일로이는 에렌드와 함께 습격 현장을 찾아가는데, 이때 에렌드는 '너는 포커스가 있으니 내가 볼 수 없는 것까지도 볼 수 있지 않느냐' 며 부탁한다. 볼 수 없는 것을 보는 자를 통해 현실에서 해결하지 못할 일을 해결하는 것은 전형적인 샤먼의 역할이다. 그리고 실제 찾아간 사건 현장에서 에일로이는 포커스를 활용해 미처 발견하지 못한 흔적들을 찾아내 추적하고, 마침내 사건의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수호대장 에렌드는 포커스의 권능을 가진 에일로이의 힘을 빌려 누나의 살해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한다. 주술사를 통해 점을 치는 듯한 장면이다.

수호대장 에렌드는 포커스의 권능을 가진 에일로이의 힘을 빌려 누나의 살해 사건을 조사해달라고 요청한다. 주술사를 통해 점을 치는 듯한 장면이다.


단순히 하나의 이벤트에서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제로던'의 전체 서사에서 에일로이는 전대 문명으로부터 촉발된 새로운 위기를 전대 문명의 유산을 활용해 유산들과 소통함으로써 해결해 내는 샤먼의 여정 한가운데에 선다. 그런데 이 샤먼의 여정은 단순한 샤먼의 이야기로 머물지 않는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이 샤먼은 외부자라는 점에서 이야기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다.

◆문명의 멸망과 복원에의 노력에서 탄생한 주인공 캐릭터

에일로이는 이미 이야기한 바 대로 복제인간이다. 에일로이 유전자의 원본은 전대 문명의 과학자인 엘리자베트 소벡 박사로, 이 게임의 이름이기도 한 프로젝트 제로 던의 최종 책임자다. 외부자로서의 샤먼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확인하기 위해 우선은 게임의 이야기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멸망 전의 세계, 인공지능 로봇 제조로 큰 돈을 벌어들인 기업 FARO사는 전쟁을 대신해 줄 인공지능 병기를 개발한다. 전장에서 인류가 피흘리는 일이 없어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FARO사의 전쟁 로봇들은 알 수 없는 코드 오류에 의해 모든 인간을 포함한 유기물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유기물을 분해, 흡수해 에너지를 얻고 스스로 자가복제하며 학습을 통해 향상되는 이들 인공지능은 마침내 세계를 뒤덮는 수준에 이르렀고, 계산 결과 2065년 11월에는 모든 인간이 절멸할 것이라는 예측이 도출되었다.

엘리자베트 소벡 박사는 이 위기를 막기 위해 프로젝트 제로 던의 수행을 제안하고 채택된다. 모든 인공지능 로봇들을 박멸할 수 있는 슈퍼 무기 개발로 포장된 이 프로젝트는 그러나 수행에 상당한 시간이 걸렸고, 남은 인간들은 군대를 조직해 제로던 프로젝트의 완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한 인공지능과의 전쟁에 돌입한다.

그러나 프로젝트 제로 던은 사실 슈퍼 무기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모든 인공지능 로봇의 코드를 해킹해 정지 신호를 보내는 알고리즘의 완성까지 약 60년이 걸릴 것으로 예상되었고, 소벡 박사는 60년을 버티는 게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의 결론은 생명의 멸종 이후 인공지능 정지 코드를 자동으로 세계에 배포한 뒤, 무너진 세계에 생명의 씨앗을 다시 뿌려 인류의 복원을 이룩하는 것이었고 이 계획이 프로젝트 제로 던의 골자였다.

소벡 박사의 프로젝트 역시 인공지능이 중심에 선 계획이었다. 멸망한 세계의 잔존한 인공지능 로봇들에게 정지 코드를 보낼 '미네르바', 보존된 식물 종자를 활용해 멸망 이후 세계에 다시 식물계를 복원할 '데메테르', 같은 기능을 동물계에 수행할 '아르테미스', 독소로 망가진 대지와 바다와 공기를 되살릴 인공지능 로봇들을 생산하게 될 '헤파이스토스' 등의 설계가 제로 던 프로젝트 안에서 이루어졌다.

제로던 프로젝트는 로봇을 막는 무기가 아니라 멸망한 뒤의 지구에 다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복원의 프로젝트였다. 고대 신화를 모티브로 한 각종 인공지능들에 의해 생명은 다시금 지구에 뿌리내리게 된다.

제로던 프로젝트는 로봇을 막는 무기가 아니라 멸망한 뒤의 지구에 다시 생명의 씨앗을 뿌리는 복원의 프로젝트였다. 고대 신화를 모티브로 한 각종 인공지능들에 의해 생명은 다시금 지구에 뿌리내리게 된다.


인간의 복원 또한 인공지능의 주도 하에 이루어질 예정이었다. 출생의 신 이름을 딴 '엘레우시아' 는 인간 유전자를 보존한 채 동식물 생태계와 환경이 개선되는 시점에 복제인간을 생성해 기초 교육을 마친 후 세계로 내보내는 것을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생성된 인간에게 멸망 이전의 문명이 가졌던 모든 지식을 전수할 수 있는 학습과 전승 기능의 시스템인 '아폴로'가 제작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작업의 총괄 프로젝트 매니저를 담당할 최상위 인공지능으로 '가이아'가 제작되었다. 스스로 학습하며 사고하고 심지어 성장할수록 인간의 감정까지도 닮아가는 가이아는 멸망 후 세계 복원의 핵심 책임자였으며, 프로젝트 진행 과정에서 자신의 창조주인 소벡 박사와 나름의 교감을 나누기도 하는 수준을 가진 존재였다.

그러나 프로젝트는 예상과 달리 순탄한 전개를 보이지 못했다. 완벽해 보였던 제로 던 프로젝트는 여러 하위 기능 중 오류 발생시의 리셋을 담당할 인공지능, '하데스'가 앞선 FARO 사 로봇들과 같은 유형의 악성 코드에 감염되면서 위기를 맞이했다. 모든 시스템을 리셋하려는 오염된 하데스를 인지한 마스터 AI 가이아는 빠르게 스스로를 하위 기능들과 단절시키고 시설을 정지시킴으로써 하데스의 폭주를 멈추고, 모든 기능의 재복구를 위해 마지막 희망을 만든다. 바로 엘리자베트 소벡의 유전자로 만들어진 복제 인간 아기였다. (여기서 '희망'은 매우 중요한 단어다. 인공지능이 계산에 의한 행동이 아닌 희망에 미래를 건다는 건 여러 모로 의미심장하다.)

하데스 폭주 이후 가이아가 정지시킨 모든 시설의 출입은 유전자 감식 시스템으로 잠겨져 있는데, 사용자로 등록된 소벡 박사의 유전자를 가진 인간이 돌아온다면 이 시설들을 다시 복구시키고 불완전한 제로 던 프로젝트를 다시 가동시킬 희망을 얻는 것이다. 가이아는 마침 자신의 시설 앞에 정착하고 있는 노라 부족이 모계 사회임에 주목했다. 여자 아이인 소벡의 복제인간이 자라나면 다시 시설로 돌아올 수 있을 희망을 보고 수행한 가이아 최후의 작업인 소벡 복제 프로젝트는 그렇게 이 세계에 에일로이라는 존재를 희망의 열쇠로 남기게 되었다.

주인공 에일로이와 그 존재의 모태가 된 소벡 박사의 이야기를 살펴 보면, '제로던'의 이야기가 단순히 고대 지식을 활용한 샤먼의 세계 구원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재미있게도 이 구조는 어느 정도 종교적 모티브를 취하고 있는데, 멸망 후 신세계의 실질적인 창조주로서 등장하는 엘리자베트 소벡 박사와, 그의 복제물이자 독생자이며 신세계에 재림한 또 한번의 위기를 구원하는 주인공 에일로이, 그리고 소벡 박사의 창조물이면서 동시에 긴밀한 교감을 나누던 동반자이자 박사의 복제물을 세상에 내놓는 결정적인 일을 수행해 낸 인공지능, 가이아의 관계다. 바로 삼위일체의 형태다.

◆성부/성자/성령, 소벡/에일로이/가이아

성부-성자-성령으로 구성되는 기독교의 삼위일체는 '제로던' 에서 새롭게 열린 세계의 창조주로서 존재하는 세 사람 혹은 개체로 전이되어 나타난다. 성부로서의 소벡 박사, 성자로서의 에일로이, 그리고 성령으로서의 가이아는 묘하게도 신학에서의 삼위일체론이 논하는 형태와 닮아 있다.

멸망 이후의 세계를 계획하고 설계한 실질적 창조주 소벡 박사, 그리고 그의 독생자이면서 동시에 유전적으로는 창조주 자신이기도 한(시설로 들어갈 수 있는 천국의 열쇠가 유전자임을 생각해 보자) 에일로이, 그리고 성경에서 성령으로 잉태된 독생자를 게임에서 실제로 잉태해 낸 주체인 가이아. 이들 셋은 다르면서도 사실 하나의 존재라는 점에서 삼위일체가 가리키는 바를 무척이나 닮아 있다.

'제로던'의 재창조된 세계는 단순히 시발점에서의 삼위일체만을 기독교로부터 가져온 것만은 아니다. 프로젝트의 구성 또한 창세기의 그것과 닮아 있다. 시초에 빛과 어둠을 구분하며(로봇들에게 정지 코드를 날림) 이후의 세계에 물과 궁창을 만들고 식물과 동물을 풀어낸 뒤 마지막에 사람을 만드는 순서, 그리고 심지어는 선악을 구분하는 열매(게임에서 지식의 전수를 담당했던 아폴론)가 전달되지 않고 무너지는 과정까지도 그러하다. 기독교 창세 신화를 바탕으로 재구성된 창조 설화가 '제로던'에서는 설화가 아닌 이 세계의 존재 근거로 사용되고 있다.

에일로이, 소벡, 가이아 세 인격체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로,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와 유사한 격을 지닌다. 세계의 창조자이자 복원자, 그리고 무너진 세계를 다시 복원할 창조주의 독생자의 의미가 '제로던' 에 강하게 드러난다.

에일로이, 소벡, 가이아 세 인격체는 같으면서도 다른 존재로, 기독교 신학의 삼위일체와 유사한 격을 지닌다. 세계의 창조자이자 복원자, 그리고 무너진 세계를 다시 복원할 창조주의 독생자의 의미가 '제로던' 에 강하게 드러난다.


그러나 이 차용은 그저 옮겨다 쓰는 형태로만 적용되어 있지는 않다. 기독교 창조 설화는 상황과 조건에 맞게 나름의 변형과 가공을 거치며, 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고 만들어 낸다. 세세한 부분에서의 여러 가지 조정이 있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묵직한 의미를 보여주는 것은 역시 삼위일체의 창조주가 대체로 여성의 성별에 가깝게 묘사된다는 지점이다.

- 다음 편에 3부 '캐릭터론 2' 로 이어집니다.

[이경혁 게임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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