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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28 (토)

“코 망가진 우리 아들 ‘폐섬유화’ 아니라고 피해자 인정 못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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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단계 피해자들 눈물

경기 고양시의 이모씨(40)는 2008년 감기에 걸린 아들을 위해 가습기를 샀다. “애 키우는 집에 가습기도 없느냐”는 의사의 말 때문이었다. “더 잘 관리해주려는 마음에” 애경의 ‘가습기메이트’(SK케미칼 제조)를 이용해 살균에도 신경을 썼다. 9년이 지난 지금 그의 아들(13세)의 코는 딱딱하게 굳어가고 있다. 병명은 ‘섬유성 골 이형성증’. 코안의 세포가 하얗게 변해가는 이른바 ‘코 섬유화’였다. 의사는 이씨에게 “(증상의 진행방향이) 위로 조금 올라갈 경우 실명이 되고 안쪽으로 커지면 뇌를 건드릴 수 있다”고 했다. 이씨 역시 천식과 폐렴, 비염, 섬유근육통을 앓고 있다.

이씨는 자신과 아들이 가습기 살균제를 쓴 후 새로운 질환을 얻게 됐음을 입증했지만 정부는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정부가 옥시 등의 가습기 살균제 성분인 폴리헥사메틸렌구아디닌(PHMG)과 염화에톡시에틸구아디닌(PHG)에 의한 ‘폐 섬유화’만을 피해질환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기 의정부시에 사는 김미란씨(42)의 아버지 김명천씨는 5년 동안 폐질환을 앓으며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살다가 2015년 세상을 떠났다. 미란씨는 아버지가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해온 사실을 알고 정부에 2013년 피해신고를 했다.

아버지는 2011년 가습기 살균제 참사가 알려질 당시 방송에 소개된 피해자들처럼 ‘폐 섬유화’를 앓다가 사망했다. 병원에서도 ‘섬유증을 동반한 상세불명의 폐질환’이라고 진단했다. 당연히 피해 인정을 받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정부는 아버지가 ‘피해자’가 아니라고 했다. ‘급성 진행’ 조건을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미란씨는 “가습기 살균제 사용 후 폐질환이 생긴 것을 입증했고, 급성 시기가 지나면 만성이 되는 것일 텐데 정부의 판단기준을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미란씨는 지난해 국회 ‘가습기 살균제’ 국정조사가 끝날 무렵 아버지의 영정을 들고 “조사기간을 연장해달라”고 외쳤지만 무산됐다. 그는 “6·25 무렵에 태어나 독재정권을 겪은 아버지는 생전에 ‘싸워도 안될 것이다, 그냥 포기하라’고 했다”면서 “그때는 그 말을 이해할 수 없었는데 요즘은 알 것 같다”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에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다.

경남 밀양의 초·중·고교와 대학교에서 배구 코치로 일했던 안은주씨(49)는 2010년 호흡곤란이 시작됐고 3년 후부터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했다. 2015년에는 폐이식까지 받았다. 국가대표 후보에도 올랐을 만큼 체력이 좋았던 안씨가 폐질환을 얻게 된 것은 옥시싹싹 가습기 살균제를 사용한 이후다. 그러나 안씨 역시 정부로부터 피해 인정을 받지 못했다. 7년 넘게 투병 중인 아내의 간병을 위해 남편은 집안의 귀중품을 내다 팔아 생활비로 쓰면서 아이들을 돌봤다. 수술비용으로 1억원이 넘게 들었지만 피해 인정을 못 받은 탓에 아무런 지원도 받지 못한 상태다.

환경보건시민센터 최예용 소장은 “정부가 피해자 인정 심사에서 가습기 살균제 노출 전과 후의 건강변화를 가장 중요한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면서 “일본의 미나마타병, 한국의 원진레이온 직업병도 처음에는 ‘특이 증상’만 인정하다 다양한 피해자들이 나타나면서 결국 비특이적 질환까지 인정했다. 새 정부는 이 같은 사례를 참고해 피해자가 ‘피해자’로 인정조차 못 받는 사태가 더 이상 지속되지 않도록 적극 나서야 한다“고 말했다.

<송윤경 기자 kyung@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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