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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근면·성실의 이데올로기 벗어나 ‘적절한 게으름’ 회복해야 인간사회 될 수 있다

경향신문 문학수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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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삶]근면·성실의 이데올로기 벗어나 ‘적절한 게으름’ 회복해야 인간사회 될 수 있다

서울흐림 / 7.0 °
▲ 게으름은 왜 죄가 되었나…이옥순 지음 | 서해문집 | 232쪽 | 1만1900원

‘게으름’을 경계하기 위한 학습은 글을 깨치기 전부터 이뤄진다. 네댓살이면 접하게 되는 이솝우화 <개미와 베짱이>가 대표적이다. 2500년 전 그리스에서 태어난 이 유명한 우화는 게으름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른다는 것을 경고한다. 추운 겨울, 눈보라를 맞으며 벌벌 떨어야 하는 베짱이의 가난이 바로 게으름의 대가다.

게으름에 관한 거의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이 ‘죄와 벌’의 구조를 갖는다. 우리나라의 전래동화인 <소가 된 게으름뱅이>도 예외가 아니다. ‘게으름은 일종의 죄다. 가난이라는 형벌이 따를 것이다’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이 책은 동서양을 넘나들면서 게으름의 역사를 구어체의 문장으로 풀어놓고 있는 에세이다. 물론 이런 유의 책들이 항용 그렇듯, 이 책의 저자도 “게으름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나쁜 건 아니다”라고 전제한다. 다시 말해 게으름에 대해 죄의식까지 가질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저자는 “(우화 속의) 개미는 누구인가?”라고 자문하면서, “역사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개미들은 귀족, 자본가, 제국주의, 양반 등 힘을 가진 존재들”이라는 계급적 관점까지 드러낸다.

이 지점에서 어떤 이들은, 20세기 전반의 영국 철학자인 버트란트 러셀의 <게으름에 관한 찬양>을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느림의 철학자’로 알려진 피에르 상소의 <느리게 산다는 것의 의미>를 연상하는 사람도 있겠다. 하지만 저자는 선을 긋는다. 자신에게는 게으름을 찬양할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게으름이 나쁘다고 부추기는 문화와 역사에 대해 생각해보자”고 말한다. “게으름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권력과 결합하는지”를 보여주면서 “게으름을 자책하는 사람들에게 약간의 해방감을 안겨주는 것”이 자신의 의도라고 밝힌다.

게으름에 대한 죄의식은 동양보다 서양의 문화에서 한층 강력하게 유포됐다. 그 뿌리는 물론 <성경>이었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보낸 두번째 편지에서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고 적었다. 그것은 서양인들에게 하나의 인식적 좌표로 자리했다. “게으름은 신의 목적을 어기는 것, 신에게 헌신하지 않는 것, 신앙이 부족한 것”으로 여겨졌다. 그 인식이 한층 굳건해진 것은 근대에 접어들면서였다. 칼뱅은 “신은 게으른 자가 빵을 먹는 걸 저주한다”고 설파했고, 그것은 곧바로 프로테스탄트의 ‘근면 윤리’로 이어졌다.

‘근면과 성실’이 근대 산업사회의 이데올로기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증기기관이 나오기 이전의 영국에서는 적어도 근면이 지상제일의 덕목은 아니었다. 기계가 등장하면서 인간이 기계에 밀리자 근면은 더욱 강조됐다. 자본주의가 발전할수록 돈과 힘을 가진 부르주아들은 임금을 받는 노동자들이 게으름을 피운다고 불평했다. 막간의 휴식조차도 다음날 일을 더 잘하기 위한 준비로 여겨졌다.” 청교도 정신으로 무장하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유럽인들이 “절약과 근면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고 낭비와 게으름을 경멸”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로 불린 벤저민 프랭클린은 게으름을 증오하면서 스스로 근면의 상징이 됐다. 그는 ‘게으름은 자물쇠의 녹’이라거나 ‘시간은 금’이라는 유명한 격언을 남겼다.


그러나 저자는 항의한다. 그는 “게으름은 상대적”이라고 강조한다. 게으름에 대한 인식은 지역과 시대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야말로 이 책이 보여주는 핵심적인 메시지다. 저자는 우리가 서구의 기독교 자본주의가 주입한 관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게으름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발전시킨 서양에서는 부지런히 움직이고 일하는 것이 의무로 여겨졌지만, 이들의 지배를 받거나 다른 역사를 지닌 아프리카나 인도 등의 지역에서는 적절한 여유가 삶을 풍족하게 한다고 여겨졌다”는 것이 저자의 말이다.

저자는 책의 중반부를 넘어서면서부터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강조하는 한가로운 비서구 세계의 문화”를 은근히 치켜올린다. 한국은 물론이거니와 산업화하기 이전의 멕시코, 1960년대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의 부시맨을 관찰한 자료 등을 사례로 제시하면서 “근면의 기풍이 서구보다 약하다 해서 열등함을 의미하는 건 결코 아니다”라는 점을 강조한다. 저자에 따르자면 그것은 다만 “문화의 차이”이며, 좀더 본질적으로 들여다보자면 “시간의 개념의 차이”다. 예컨대 “인도는 윤회와 환생을 믿고, 중국은 광대무변한 시간 개념”을 가졌다. 반면에 서구인들에게 시간은 째깍거리며 초단위로 직진할뿐더러, “한번 가면 다시 돌아오지 않는 것”이다. 이 차이야말로 근본적인 문화의 ‘다름’이라는 것이 저자의 견해다.

그리하여 저자는 “남에게 휘둘리지 않고 운명을 스스로 이끌어나가는 길을 생각해보자”고 권한다. 다시 말해, 서구가 유포한 죄의식에서 벗어나자는 얘기다. “게으름을 폄훼하지 않고, 적절한 게으름을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마치 천년을 살 것처럼 일만 하고 돈을 모으려는 각박한 사회”에서 “인간의 사회”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선택이라는 주장이다.

저자 이옥순은 인도 델리대학 대학원에서 인도사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받았고 지금은 연세대 연구교수로 일하면서 인도문화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230쪽의 얇은 분량이지만 담고 있는 가치는 묵직하다. 간혹 무리한 논리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부드러운 대화체 문장이 독자를 다감하게 설득한다.

<문학수 선임기자 sachimo@kyunghya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