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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취재파일 19] 자살과 완주 '극과 극' 두 마라토너

SBS 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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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우 취재파일 19] 자살과 완주 '극과 극' 두 마라토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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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도쿄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일본의 쓰부라야 고키치(맨 오른쪽) (사진=게티이미지/이매진스)

스포츠는 흔히 우리 인생에 비유됩니다. 치열하게 노력하면 메달을 딸 수 있는 것도 비슷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땀을 흘린다 해도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장할 수 없는 점도 유사합니다. 오늘은 인생의 의미를 돌이켜보게 해준 두 마라토너 얘기를 소개하겠습니다.

일본은 아시아 국가로는 처음으로 1964년에 도쿄올림픽을 개최했습니다. 대회 하이라이트는 남자 마라톤이었습니다. 일본 국민의 기대는 24살의 쓰부라야 고키치에게 쏠렸습니다. 쓰부라야는 열광적인 응원 속에 초반부터 역주에 역주를 거듭했습니다. 30km를 지나서도 그는 여전히 선두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도쿄 시내 대로에 나온 사람들뿐만 아니라 TV로 중계방송을 지켜보던 일본인들은 기대감에 한껏 들떴습니다. 사실상 첫 올림픽 마라톤 금메달이 눈앞에 다가왔기 때문이었습니다.

1936년 베를린올림픽에서 고 손기정 옹은 일장기를 달고 정상에 올랐습니다. 비록 일본 국적으로 우승했지만 손기정 옹은 일본인이 아니었습니다. 일본 국민들도 이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손기정 옹과 달리 쓰부라야 고키치는 순수 일본인이기 때문에 열도는 엄청난 흥분으로 뒤덮였습니다.

바로 이 순간 깡마른 검은 마라토너가 쓰부라야를 추월했습니다. 쓰부라야는 사력을 다해 다시 선두를 탈환하려고 했지만 격차는 더 벌어졌습니다. 쓰부라야를 응원하던 일본 사람들의 표정은 실망감으로 바뀌었습니다. 잠시 뒤 스타디움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아프리카에서 온 검은 마라토너는 2시간12분11초의 세계 최고 기록으로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그가 바로 에티오피아의 비킬라 아베베였습니다. 아베베는 4년 전인 1960년 로마올림픽에서 맨발로 금메달을 따냈는데 도쿄에서는 신발을 신고 1위로 들어왔습니다. 올림픽 마라톤 사상 최초의 2회 연속 우승이었습니다. 42.195km의 레이스를 마친 직후 아베베는 지친 기색 없이 맨손체조를 곧바로 시작해 관중들을 깜짝 놀라게 했습니다.

그런데 정작 놀랄 일은 바로 직후에 벌어졌습니다. 2위로 달리던 쓰부라야는 일본 관중의 함성 속에 스타디움에 들어섰습니다. 세계 최고 선수인 아베베에 밀려 금메달은 놓쳤지만 은메달은 무난해보였습니다.


그런데 3위로 주경기장에 들어온 영국의 바실 히틀리가 무서운 뒷심으로 질주하다 결승선을 100m 정도 남겨 놓고 역전에 성공했습니다. 결국 히틀리는 2시간16분19초2의 기록으로 쓰부라야를 3.6초차로 제치고 은메달을 거머쥐었습니다. 반면 쓰부라야는 다 잡았던 은메달을 놓치고 동메달에 머물렀습니다.

아베베에게 추월을 당한 것은 도쿄 대로였지만 히틀리에게 추월을 당한 것은 주경기장 안이었습니다. 일본 국민을 2번이나 실망시킨 쓰부라야는 얼굴을 들지 못했습니다. 시상식이 끝난 뒤 그는 일본 취재진에게 “금메달을 따지 못한 것에 대해 모든 일본 국민에게 용서를 빈다. 국가가 겪게 된 모욕에 대해 마음 깊이 뉘우치고 있다. 멕시코시티에서 열리는 다음 올림픽에서 부진을 만회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멕시코시티 올림픽을 1년 앞둔 1967년에 큰 부상을 당했습니다. 3개월 동안 치료한 뒤 다시 강훈련을 펼쳤지만 몸은 예전 같지 않았습니다. 금메달은커녕 일본 대표로 출전할 가능성도 희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올림픽이 열리는 그해 1월 9일, 쓰부라야는 면도날로 자신의 손목을 베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 28살 때였습니다. 책상 위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습니다.

● "나는 지쳤습니다. 더 이상 달리고 싶지 않습니다."


쓰부라야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그해 10월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올림픽이 열렸습니다. 쓰부라야보다 2살 많은 탄자니아의 존 스테판 아크와리가 마라톤에 출전했습니다. 아프리카 마라톤선수권에서 우승한 기대주였기에 금메달은 장담하기 어렵더라도 잘 하면 동메달은 바라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무더위와 고지대가 발목을 잡았습니다. 멕시코시티 코스는 산소가 희박한 해발 2천 미터 이상이었고 기온도 30도를 훌쩍 넘었습니다. 찌는 듯한 폭염 속에 75명의 선수 중 18명이 중도에 경기를 포기했습니다. 악조건에서 힘들게 레이스를 펼치던 아크와리는 설상가상으로 19km 지점에서 자리다툼을 하다 다른 선수와 부딪혔습니다. 무릎 관절이 뒤틀렸고 넘어지며 어깨마저 다쳤습니다.


절반도 달리지 않은 상황에서 크게 다친 아크와리는 눈앞이 캄캄했습니다. 누가 봐도 완주는 불가능해보였습니다. 하지만 아크와리는 고통을 참고, 다리를 절뚝거리며 달리다 걷고, 달리다 걷고를 반복했습니다. 어느덧 해가 지기 시작했습니다. 함께 달리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의 친구는 오직 저녁놀뿐이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에티오피아의 마모 월데가 2시간 20분 26초로 가장 먼저 결승선을 통과했습니다. 에티오피아가 비킬라 아베베(2회 연속 우승)에 이어 올림픽 마라톤 3회 연속 우승을 차지한 것입니다. 시상식이 끝나자 TV 중계진도 철수했고 관중도 하나둘씩 빠져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바로 이때 기진맥진한 아크와리가 올림픽 주경기장에 들어섰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관중은 기립박수로 환호했습니다.

사투를 펼친 아크와리는 우승자보다 1시간 이상 늦은 3시 25분 27초에 레이스를 마쳤습니다. 비록 꼴찌의 기록이었지만 끝까지 포기하지 않은 역사적인 완주였습니다. 메달의 꿈이 날아간 상황에서도 그가 결코 중도에 단념하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조국은 출발하라고 나를 5천 마일이나 떨어진 이곳에 보낸 것이 아니라 완주하라고 보낸 것이다.”
(My country did not send me 5,000miles to start the race, they sent me 5,000miles to finish the race.)


아크와리는 1983년에 탄자니아의 ‘국가 영웅’으로 선정됐고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친선대사를 역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의 쓰부라야와 탄자니아의 아크와리, 두 마라토너는 동시대에 활동했던 스포츠 스타였습니다. 두 선수 모두 역경을 겪었지만 그들의 선택은 ‘극과 극’으로 갈렸습니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요?

[권종오 기자 kjo@sb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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