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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있는 얼음’은 공처럼 둥글다

중앙일보 이지영.신동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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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맛 있는 얼음’은 공처럼 둥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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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식재료’ 얼음의 세계
바텐더 손석호씨가 위스키용 얼음을 깎고 있다. 아래 보이는 공 모양 얼음이 완성품이다. 순수한 물만 얼린 얼음이라 투명하고 단단하다.

바텐더 손석호씨가 위스키용 얼음을 깎고 있다. 아래 보이는 공 모양 얼음이 완성품이다. 순수한 물만 얼린 얼음이라 투명하고 단단하다.

서울 청담동 ‘커피 바 케이’ 바텐더 손석호(29)씨는 매일 오후 얼음을 깎는다. 정육면체로 잘라진 얼음을 맨손으로 들고 송곳과 칼을 이용해 공 모양으로 만든다. 주류업계 전문용어로 ‘아이스볼 카빙’ 작업이다. 손씨는 매끈하게 다듬은 아이스볼을 냉동고에 차곡차곡 쌓아뒀다. 위스키를 ‘온 더 락’으로 주문하는 고객들에게 내놓기 위해서다. 얼음은 냉동고나 얼음 정수기 등으로 쉽게 만들 수 있는 게 아닌가. 얼음을 내놓기 위해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치는 이유를 손씨는 “맛 때문”이라고 했다. 물을 그냥 얼리기만 하면 ‘얼음’이고, 나름의 과정을 거치면 ‘맛있는 얼음’이 된다는 거다. 손씨는 “얼음은 크기와 모양·경도(硬度) 등에 따라 음식 맛을 바꾸는 까다로운 식재료”라고 했다. 섬세한 식재료, 얼음의 세계를 알아봤다.

식재료로 얼음을 쓰는 이유는 하나다. 음식을 차게 만들기 위해서다. 얼음의 ‘부작용’. 녹아서 물이 되는 것이다. 이러면 딱 맞춰놓은 음식 맛이 변한다. 식재료로서 얼음은 천천히 녹아야 환영을 받는다.

위스키용 얼음을 공 모양으로 만드는 이유는 얼음의 표면적을 줄이기 위해서다. 같은 부피의 입체도형 중 가장 표면적이 작은 도형이 바로 구(球)다. 얼음과 술이 닿는 면적이 작아야 얼음이 천천히 녹는다. 각진 얼음은 공 모양의 얼음보다 빨리 녹기 때문에 위스키를 빠르게 희석시킨다.

2010년부터 위스키용 얼음 ‘싱글볼’을 만들어 팔고 있는 디아지오코리아 진우식 부장은 “일반적인 각얼음이 5분에서 10분 안에 녹는 반면 지름 6.5㎝ 공 모양인 ‘싱글볼’은 3시간∼3시간30분에 걸쳐 서서히 녹는다”며 “위스키의 맛과 향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얼음”이라고 설명했다.

밀폐용기 업체 ‘락앤락’의 얼음틀을 이용해 만든 막대형 얼음. 천천히 녹는 얼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음의 표면적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밀폐용기 업체 ‘락앤락’의 얼음틀을 이용해 만든 막대형 얼음. 천천히 녹는 얼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얼음의 표면적을 최대한 줄여야 한다.

풀무원에서 생산하는 ‘돌얼음’. 오랜 시간 서서히 얼려 녹는 속도도 느리다.

풀무원에서 생산하는 ‘돌얼음’. 오랜 시간 서서히 얼려 녹는 속도도 느리다.

같은 원리는 위스키용 얼음뿐 아니라 아이스커피 등 음료용 얼음, 화채나 콩국수용 얼음 등에도 적용된다. 각진 자잘한 얼음보다 공 모양의 커다란 얼음을 넣는 게 음식 맛을 지키는 방법이다. 별 모양, 하트 모양 등 독특한 모양의 얼음은 보기엔 예뻐도 음식 맛을 빨리 싱겁게 만든다.

얼음의 녹는 속도는 얼음을 어떻게 얼렸는지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낮은 온도에서 빨리 얼린 얼음은 녹는 속도도 빠르다. 포장 얼음 ‘돌얼음’을 생산하고 있는 풀무원에서는 물을 영하 5도에서 15시간 동안 얼려 얼음을 만든다. 박광호 풀무원 얼음공장 생산기술파트장은 “영하 18도에서 얼리면 서너 시간밖에 안 걸리지만 얼음이 단단하지 않아 빨리 녹는다”고 말했다. 물속의 칼슘·마그네슘 등 미네랄 성분이 물과 함께 얼어버리면서 얼음의 결정력을 약화시킨다는 것이다. 빨리 얼리면 얼음 색이 투명하지 않고 뿌옇게 된다. 이 역시 미네랄 성분 때문이다. 얼음을 얼리기 시작하면 처음엔 물 분자만 얼다가, 마지막 단계에서 미네랄 성분이 물 분자와 함께 언다. 또 얼음은 용기 가장자리부터 언다. 따라서 얼음을 얼려보면 가장자리는 투명하고 가운데 부분은 뿌옇게 된다. 얼음은 뿌연 부분은 보기 싫을 뿐 아니라 결정력이 약해 쉽게 녹는 부분이다. 좋은 얼음의 기본조건으로 투명한 얼음을 꼽는 이유다.


투명한 얼음을 만들기 위해서는 물을 서서히 얼리다가 미네랄 성분이 얼기 전 물 분자만 얼었을 때 건져내면 된다. 풀무원에서 ‘돌얼음’을 만들 때 쓰는 방법이다. 박 파트장은 “물 80L를 얼리기 시작해 얼음이 60㎏ 정도 만들어졌을 때 건져 사용한다”고 설명했다.

얼음을 일단 얼린 뒤 뿌옇게 된 부분을 잘라내고 쓰는 방법도 있다. 하지만 얼음을 그냥 얼리면 한가운데 속 부분이 뿌옇게 되므로 잘라내는 작업이 간단치 않다. 얼음 납품업체 ‘아이스팜’ 정준양 대표는 뿌연 부분을 잘라내기 쉬운 쪽으로 바꾸기 위해 수도배관 동파방지용 스펀지를 이용한다. 길쭉한 물통에 물을 넣어 얼리면서 물통 겉을 동파방지용 스펀지로 감싸는 것이다. 물통의 윗면을 제외한 모든 면을 스펀지로 여러 번 감싼 뒤 냉동실에 넣어두면 물은 물통 윗면부터 얼기 시작한다. 이렇게 만든 얼음은 뿌연 부분이 아래쪽으로 몰린다. 아랫부분이 늦게 얼기 때문이다. 이 얼음을 꺼내 칼이나 송곳으로 아랫부분을 잘라 버리고 나머지 얼음을 사용하면 된다.

공 모양 위스키용 얼음은 이렇게 얻은 투명한 얼음을 깎아서 만든다. 간단히 공 모양 얼음틀에 물을 넣어 얼려 쓰면 편하겠지만, 미네랄 성분까지 한꺼번에 얼어 뿌옇게 되기 때문에 일일이 수작업으로 깎아내는 것이다.


천천히 녹는 투명한 얼음을 만들기가 이렇게 번거로운 만큼, 얼음을 사먹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풀무원 측은 “‘돌얼음’의 올 상반기 매출이 지난해보다 71%나 성장했다”고 말했다.

얼음이 음식 맛에 영향을 주는 요인은 하나 더 있다. 바로 냄새다. 특히 가정용 냉장고 냉동실에서 뚜껑 없는 틀에 넣어 얼린 얼음에는 마른멸치 등 음식 냄새가 배는 일이 잦다. 그래서 밀폐용기업체 락앤락에서는 2010년부터 뚜껑 있는 얼음틀을 생산하고 있다. 락앤락 홍보팀 윤혜진 과장은 “회원 25만여 명으로 구성된 주부 커뮤니티 사이트 ‘락앤락 서포터즈’에서 냄새 걱정 없는 얼음틀을 만들어 달라는 요구가 많아 개발한 제품”이라고 설명했다.

식재료인 얼음의 위생상태도 중요하다. 장염을 일으킬 수 있는 노로바이러스·대장균 등 미생물은 영하 20도 정도의 냉동고 안에서도 살아있다. 또 냉동고 속 고기나 생선 등에 있는 세균이 냉동고 공기 중에 떠다니다 얼음을 오염시킬 수도 있다. 식품의약품안전청 강윤숙 연구관은 “얼음 속에서 미생물들은 증식을 멈추고 있지만, 온도가 다시 높아지면 금세 증식한다”며 “얼음을 얼릴 때 위생적인 물을 사용하고, 냉동고 속에서 노출된 채 보관된 얼음은 되도록 빨리 먹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지영.신동연 기자 sdy11@joongang.co.kr
▶신동연 기자의 블로그 http://blog.joinsmsn.com/shs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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