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유독 방산분야에서 규모가 큰 비리가 많이 발생하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도입 절차가 복잡하고 전문성이 필요하며, 각 국가의 군사정책 및 군사전력과 직결되기 때문에 수량이나 가격을 기밀로 분류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대다수의 물자는 구입자가 원하는 사양에 따라 가격이 변해서 고정된 ‘정가’가 있는 것이 아니란 점도 비리 발생에 한몫을 한다. 방산 비리는 전 세계적으로도 문제인데, 가장 심각한 점은 이러한 ‘비리’에 대한 대가를 실제로 치르는 건 결국 납세자인 국민과 군인들이라는 점이다.
가장 대표적인 방산비리 사건으로는 인도에서 벌어진 보포스(Bofors) 스캔들이 있다. 인도뿐 아니라 스웨덴에서도 사상 최대 금액의 방산비리 사건으로 기록된 이 사건은 1986년 3월 24일, 인도 정부와 스웨덴 방산업체인 보포스 사가 410문의 155mm 견인포의 납품 계약을 따내면서 시작됐다. 최초 입찰에는 보포스와 프랑스의 소프마(Sofma) 사가 참가했다. 인도군은 최초 요구도로 사거리 30km 견인포를 요구했는데, 소프마의 155mm 포는 사거리가 29.2km, 보포스 측은 사거리가 21.5km에 불과한 견인포를 제안했다. 그나마도 둘 중 소프마 쪽이 최초 요구도와 가까웠지만, 인도 국방부는 재입찰을 하는 대신 불법적으로 요구도를 변경하면서 2억3500만달러로 보포스를 선정했다. 하지만 1년 후인 1987년 4월 16일, 한 스웨덴계 라디오 방송사는 보포스 사가 인도뿐 아니라 스웨덴의 정치가들에게 엄청난 금액의 뇌물을 전달한 의혹을 제기했다. 당시 이 비리에서 ‘중간책’으로 등장한 인물은 오타비오 콰트로키(Ottavio Quattrochi)라는 방산 브로커였다. 이 브로커는 당시 총리였던 라지프 간디(Rajiv Gandhi, 네루 총리의 외손자이자 인디라 간디 총리의 아들) 집안과 개인적인 친분을 이용해 약 1000만달러에 달하는 뇌물을 인도 정계와 국방관련 주요 인사에게 뿌린 것으로 추정됐고, 자신은 중계 비용 명목으로 총액의 약 3% 정도를 챙긴 것으로 확인됐다. 이 스캔들이 대대적으로 터지면서 결국 라지프 간디가 이끌던 집권 인도 국민회의는 1989년 선거에서 참패했다.
인도 국방부는 보포스 사에 인도 내 사업 금지명령을 내렸지만, 1991년 파키스탄과 “카길 전쟁”이 벌어지자 할 수 없이 이 금지 명령을 해제했다. 당장 가지고 있는 곡사포가 보포스제 뿐인 데다 예비 부품이 공급되지 않아 운용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전쟁 후에 계속 관련 재판이 재개되긴 했으나 당장 라지프 간디는 1991년에 암살당했고, 이탈리아의 브로커인 콰트로키는 재판이 시작되기 전에 말레이시아로 피신하면서 재판에 참석하지 않았다. 시간이 가면서 당시 국방장관을 비롯한 관련자들도 사망했고, 재판이 25년 가까이 진행되면서 결국 대법원은 증거 불충분을 이유로 라지프 간디 총리에 대한 뇌물수수 혐의를 무혐의 처분했다. 심지어 콰트로키도 인터폴에 의해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됐지만, 인도와 범죄인 인도 협약도 없는 데다 인도 경찰 측이 제때에 적절한 인도 요청을 하지 않아 아르헨티나가 인도를 묵살하자 2009년 송환 요청을 철회했다. 이렇게 인터폴 수배까지 풀린 콰트로키는 2013년 밀라노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결국 실질적인 처벌은 거의 이루어진 바가 없이 끝난 이 사건의 피해는 인도 육군이 홀로 감당한 셈이 됐다. 도입 초창기부터 보포스가 사업 정지를 당해 부품 수급이 끊겨 155mm 견인포는 만성적인 부품 부족 현상에 시달렸으며, 결국 몇 년 쓰지도 못한 포 100여 문은 금방 폐기 처분됐다. 앞서 말했듯 카길 전쟁 통에 보포스가 다시 사면되어 부품공급을 재개하긴 했지만, 그나마도 2001년에 공급계약이 끝나면서 운용을 중단해 실질적으로 이 2억달러를 들여 도입한 410문의 포는 제대로 써먹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불과 십여년 만에 퇴역하는 처지가 됐다. 이 사건을 통해 인도 국방부는 체계가 제대로 잡혀 있지 않던 인도의 국방획득체계(DPP: Defense Procurement Plan)를 정립하게 됐으며, 군에서 실시하는 입찰 사업에는 중개업자, 통칭 ‘에이전트’가 개입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못 박아 버렸다.
세간을 뒤흔들었던 또 다른 대표적인 방산비리 사건은 일본에서 있었던 통칭 ‘록히드(Lockheed)’ 사건이 있다. 록히드 사는 민항사인 전일본공수(全日空, ANA)가 록히드 사의 L-1011 ‘트라이스타(Tristar)’ 항공기의 구입을 유도하기 위해 로비 용도로 총 24억엔을 뿌렸다. 다나카 가쿠에이(田中 角榮) 총리에게는 5억엔에 달하는 뒷돈을 주었고, ANA 고위 임원들에게는 1억6000만엔의 뇌물을 상납했으며, 방산 브로커로 활동한 코다마 요시오(児玉 誉士夫)에게는 컨설팅 명목으로 17억엔을 지불했다. 이에 따라 ANA 사는 기존에 DC-10 도입 계획을 엎어버리고 1972년 10월 30일, 대당 500만달러로 트라이스타 21대의 도입을 발표했다. 하지만 1976년 2월 6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다국적기업 소위원회가 록히드 사를 조사하던 중, 록히드 사의 부사장이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에게 사업지원의 명목으로 약 300만달러를 제공했다는 사실을 언급하면서 문제가 됐다. 처음에는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 당시 미 국가안보보좌관이 미-일 양국관계의 악화를 우려해 이 사태를 키우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나 이 사건은 일본으로 넘어가 대형 스캔들로 터졌다. 결국 다나카 가쿠에이 총리는 1976년 7월 27일에 구속됐다가 한 달 후 2억엔의 보석금을 내고 석방됐지만, 1983년 10월에 도쿄 법원에서 진행된 재판에서 외환거래법 위반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고 징역 4년에 추징금 5억엔이 선고됐다. 그러나 그는 곧장 항소하였고 중의원 선거에서 연달아 두 차례 당선됐기 때문에 형은 제대로 집행되지 못했다. 이 사건은 그가 1985년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흐지부지됐지만, 다나카 가쿠에이는 1993년 사망할 때까지 정계에서 계속 영향력을 행사했다. 브로커로 활동했던 코다마 요시오는 이 사건으로 더 이상 방산 브로커로 활동하지 못했으나 1984년 도쿄 자택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비교적 최근에 발생한 사건 중에는 오스트리아와 독일을 동시에 뒤흔들었던 통칭 “유로파이터 스캔들”도 있었다. 문제의 발단은 2003년경 유럽계 방산업체인 EADS(現 에어버스) 사가 오스트리아에 EF-2000 ‘유로파이터 타이푼’ 18대의 판매 계약을 체결하면서 시작됐다. 당시 계약액은 총 20억유로였으며 오스트리아 측은 이례적으로 35억유로를 대응 구매로 약속했다. 하지만 엉뚱한 곳에서 이 사건의 내막이 알려지게 됐다. 이탈리아에서 마피아 자금이 포함된 금융사기를 일으키다 체포된 잔프랑코 란데(Gianfranco Lande)는 형량 거래를 위해 검사에게 자신이 ‘독일 대기업’을 위해 돈세탁 네트워크를 만들었으며, 그 중심에는 영국의 ‘벡터 에어로스페이스(Vector Aerospace)’라는 업체가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다. 그는 EADS 임원 및 두 명의 무기거래상 이름을 넘겼지만, 사실 이 사건 자체는 이탈리아 검찰 소관이 아니었기 때문에 검사는 이 진술 내용을 캐비닛에 보관했다. 그러던 것이 독일 하원의원이던 페터 필츠(Peter Pilz, 녹색당)에게 우연하게 알려지면서 독일로 사건이 넘어가게 된 것이다. 수사가 시작되면서 이 거래 과정 중 약 1억1300만유로가 EADS에서 의심스러운 업체 계좌로 흘러들어 간 정황을 포착했고, 이는 세금이 면제되는 맨 섬(Isle of Man)에 주소를 둔 프랑크 발터(Frank Walter)라는 독일 사업가의 소유인 것을 포착했다.
비엔나 검찰 측은 이들 유령회사를 통해 세탁된 돈이 오스트리아 정계에 뇌물로 뿌려져 당시 입찰기종 중에선 상대적으로 고가인 유로파이터가 낙찰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이 사건은 아직 종결되지 않았는데, 문제는 모든 관련 혐의가 사실로 입증될 경우 계약서에 근거해 거래가 무효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미 중고 기체 15대의 인도가 끝났으므로 생산자인 독일은 20억유로 어치의 계약이 국제 소송으로 커질 가능성이 높다. 이뿐만 아니라 브랜드 인지도 등에서도 타격이 불가피해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물론 여타 산업계와 마찬가지로 관행상의 비리나 부정은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지만, 제도적인 안전장치가 얼마나 마련되어 있고 제대로 처벌이 되고 있는지가 사실 가장 중요한 문제다. 특히 이렇게 과잉지출된 비용도 세금에서 나오는 것이긴 하지만, ‘비리’로 새나간 국방예산만큼 복지나 기타 공공시설의 건축, 공중 보건 혹은 교육 분야에서 손해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또한 무기 도입의 결정권자들이 개인적인 호혜 등을 이유로 성능에 미달한 물건을 도입한다면 결국 가장 큰 피해자는 이 무기를 들고 싸우게 될 병사들, 그리고 그들에게 보호를 받는 전 국민이 된다. 방산 비리를 척결하는 데는 만능 해결방법도 없고, 쉽고 간단한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차피 법 제도나 장치만 아무리 마련한들 어떻게든 이를 피해갈 방법을 찾기 마련이고, 처벌을 강화한들 사후약방문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저 정부, 방산업계, 군, 시민사회가 함께 이런 문제를 척결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이 필요할 뿐이다. 방산분야는 국가의 안보 및 국민의 안전과 직결되는 분야다. 방산비리의 근절을 위해서는 철저한 수사와 처벌뿐 아니라 관련 정부기관에 전문가들을 확충하고, 면허제를 부활시키는 등 강력한 통제방안이 필요한 때이다.
윤상용 한국 국방안보포럼(Kodef) 연구위원
-Copyright ⓒ 이코노믹리뷰.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